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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Oct 17. 2020

위대한 '위작' 사기꾼, 나치 이인자를 속여먹다

<속사정 특집 3 : 한 판 메이헤른>

 "그 그림요? 제가 그렸는데요?"


 1945년 7월, 한 판 메이헤른의 한 마디에 재판정이 뒤집어집니다. 그럴 수밖에요. 무릎 꿇고 싹싹 빌 것 같던 메이헤른이 지금 그 스스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을 똑같이 그릴 수 있다고 폭탄선언을 했거든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항복을 선언한 후 근 일주일이 지난 1945년 5월, 독일 나치군에 의해 빼앗긴 예술품을 찾기 위해 연합군이 꾸린 '모뉴먼츠 맨' 팀은 헤르만 괴링의 비밀 창고를 찾았습니다. 나치의 이인자로 불린 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처의 한 소금 광산 속에 자신이 끌어모은 보티첼리, 렘브란트,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등의 회화 6577점 등을 보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간통한 여인

 세계가 특히 주목한 작품은 네덜란드 출신 화가 베르메르가 그렸다고 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간통한 여인'이었습니다.


 왜일까요?


 베르메르가 평생 남긴 작품 수가 고작 35점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때, 숨어있던 새 그림이 튀어나온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술계는 베르메르의 새로운 작품 발굴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베르메르는 자화상조차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조용한 삶을 산 그는 일기나 편지조차 눈에 띄는 곳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은둔의 화가란 칭호가 딱 맞는 옷이었습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

 특히 네덜란드는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당시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칭송받고, 색감과 균형, 포근한 아름다움을 함께 품은 '우유를 따르는 여인' 등의 재조명도 이뤄지자 그의 흔적 찾기에 더욱 달려들었지요.


 1945년 5월. 네덜란드 경찰은 메이헤른의 집 앞으로 찾아가 그를 체포합니다. 추적 조사 끝, 화가면서 딜러였던 그가 2년 전 이 작품을 괴링에게 넘겼다고 확인한 데 따른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메이헤른을 '국가의 중요 문화유산을 적에게 팔아넘긴 반역죄'로 기소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를 품고 있는 유럽은 과거부터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메이헤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져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판사와 수많은 방청객을 앞에 두고 고작 한다는 말이 "사실 내가 그린 위작"이라니요.


 재판정이 술렁였습니다. 검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역정을 냈습니다. 방청객들 사이에선 거친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못 믿겠다면, 내가 즉석으로 그려주겠다."


 메이헤른은 이런 분위기 속 태연히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1889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메이헤른은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오랜 기간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1922년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나름대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로는 매번 죽을 쒔습니다.


 메이헤른은 1932년 프랑스로 갑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합니다. 유럽 전역에 인상주의·아방가르드 화풍이 불어온 때, 아직도 고전주의 화풍에 머물러 있다고 욕도 많이 먹었지요.


 메이헤른은 이때 '위작'을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비평가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떠올린 안이었습니다.


 당시 비평가들은 렘브란트, 베르메르 등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끈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라면 고전주의 화풍이 섞였다고 해도 찬사를 늘어놓았습니다. 메이헤른은 그가 학생일 때 베르메르의 작품을 소개받아 감명을 받았던 경험을 떠올립니다.


 그래, 베르메르의 작품을 베껴보자. 비평가 녀석들이 온갖 찬사를 던졌을 때, 사실 내가 베낀 그림이라고 해 망신을 줘버리자.


 메이헤른은 상상만 해도 통쾌한 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의 한 마을에서 근 4년을 위조 연구에 매진합니다.




 메이헤른의 당초 '작은 계획'에는 예상치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위작에 대해, 그에게는 그도 몰랐던 큰 재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17세기에 만들어진 캔버스를 구했습니다. 그 시대에 쓴 염료들도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긁어 모았습니다. 베르메르가 썼다고 한 붓과 같은 붓을 구해 그의 손놀림까지 흉내 냈습니다. 사후 처리도 철저했습니다. 먼저 그림이 오래돼 보이도록 페놀과 폼알데하이드 등 약품을 발랐습니다. 그림이 딱딱히 굳으면 100~120도 사이 온도로 굽고, 이를 드럼통 위에 놓고 굴려 의도적으로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그 균열 사이에는 검은 잉크를 채워 넣어 세월의 흔적을 극대화했지요.


한 판 메이헤른,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요하네스 베르메르작을 위작)


 메이헤른이 1936년 완성한 첫 위작은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이었습니다.


 그는 곧장 베르메르 전문가로 이름난 아브라함 브레디위스를 찾았지요. 그가 특히나 싫어했던 브레디위스는 거의 '유레카'를 외치듯 흥분했습니다. 드디어 베르메르의 숨은 작품을 찾았다면서요.


 뒤에서 웃고 있던 메이헤른, 진실을 밝히기에는 그간 들인 공과 시간이 너무 아까웠겠지요. 심지어 온갖 예술협회에서 거액의 돈을 들고 그 그림을 사겠다고 난리를 치니 더욱 욕심이 났을 것입니다.


 메이헤른은 이때부터 돈맛을 봅니다.


 그는 1936~1946년 10년간 위작을 그립니다. '최후의 만찬', '박사들 사이의 예수',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등 베르메르의 작품을 신나게 따라 그립니다. 위작 대상도 프란스 할스, 피터르 더호흐 등으로 넓혀갑니다. 시대도 그를 도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 당하는 등 혼란이 혼란을 낳던 때였습니다. 그가 사기를 치기에 딱 좋은 시기였지요.





 다시 메이헤른이 재판을 받던 때로 돌아가 봅시다.


 메이헤른은 결국 경찰의 감시하에 3개월간 베르메르의 '신전에서 설교하는 젊은 예수'를 위작으로 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밑천이 곧 드러날 것으로 믿은 네덜란드 측은 그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놀랐습니다. 그를 결국 매국노가 아닌 극악무도한 나치를 속여먹은 기술자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이헤른의 오랜 꿈도 이뤄집니다. 그의 위작을 진품으로 평한 비평가들은 큰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조사위원회가 정밀 검증에 나선 결과, 그간의 위작들에선 17세기에 사용되지 않은 기법이 섞여 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코발트블루' 색이 결정적 단서였습니다. 그 시대에 구현할 수 없던 색이었기 때문입니다.




 메이헤른은 미술품 위조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받아 1년 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는 이미 술·담배와 모르핀에 절어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감옥 수감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1947년 12월 30일, 그는 유죄 선고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생을 마감합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메이헤른은 죽었지만, 그가 낳은 위작 논란은 거듭 불거졌습니다. 일각에서 베르메르의 진품으로 판명받은 작품 중 메이헤른의 위작이 더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아직까진 당시 1946년의 결론에서 전진도, 후퇴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 시대에선 메이헤른이 남긴 위작, 그리고 그의 진짜 그림 모두 귀한 몸으로 취급받습니다. 이 또한 참 아이러니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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