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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Oct 18. 2020

연인실격

<20. 에곤 실레, '죽음과 여인'>

   1. 원한다면,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2. 원한다면, 둘만의 여행도 즐길 수 있다.


   연한 갈색 머리를 한 여인, 입술을 질끈 깨뭅니다. 이 문장이 쓰인 종이를 꼬깃꼬깃 구기더니, 휴지통에 휙 던집니다. 큰 짐가방을 들고 길을 나섭니다. 이 남자를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 깨질듯한 구두의 굽 소리만 퍼집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에곤 실레(1890~1918), 받은 이는 그와 5년간 동거한 발레리 노이질(발리)입니다.


   발리는 왜 이 문장을 읽고, 분노 섞인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에곤 실레, 죽음과 여인


   멍한 남성, 무너져내린 여성이 바른 흰색 담요 위에 누워있습니다. 거친 이끼, 울퉁불퉁한 바위 같은 뒷배경은 수척해보이는 두 사람의 처연함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좀 더 시선을 두면, 남녀의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남성은 비교적 정갈합니다. 밤색 로브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남성의 눈을 볼까요. 여성이 울든 말든, 지금의 상황에 큰 관심이 없어보입니다. 여성의 머리를 쓰다듬지만, 그저 기계적인 습관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는 느낌도 받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는 것 자체가 기우뚱한 여성을 반대로 밀어내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면 여성은 절박해보입니다. 한때 화려한 색을 자랑했을 옷은 헝겊조각이 됐습니다. 몸과 마음도 찢긴 채 멍투성이로 젖었을 것입니다. 남성의 몸을 감고 있는 여인의 왼쪽 팔은 한 줄기의 끈처럼 가느다랗습니다. 그런데도 끌어안은 남성의 등 뒤로 힘껏 손가락 깍지를 끼려고 합니다. 연하고 약해보이는 그녀에게서 결코 보내지 않겠다는 결기마저 읽혀집니다. 


   허벅지가 나온 두 다리는 이미 남성에게 체중을 싣는 일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애처롭고, 불안정합니다. 시선은 그림 밖 누군가를 째려보는 듯합니다. 어떤 이든, 이 남성을 데려간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합니다.


   황폐한, 메마른 모습. 죽음과 삶, 사랑과 이별이 아슬아슬 떠다닙니다. 다소 어둡지만 로맨틱한 정서도 감지됩니다.


   실레가 그린 '죽음과 여인'(1915)입니다. 원래 제목은 '남성과 소녀'였지만요.


   눈치채셨겠지만 남성은 실레, 여성은 발리입니다.


   



   1911년, 실레과 발리가 만난 해입니다. 실레는 만 21세, 발리는 만 17세인 때입니다.


   당시 실레는 명문 빈 미술 아카데미 학도였습니다. 다만 그의 학업 생활이 평탄치는 않았습니다. 


   실레는 우아함과 그 속에 담긴 고매함을 신봉하던 교수와 싸운 후 더욱 아카데미를 겉돌았습니다. 그는 조만간 파격적 화려함, 노골적 신선함으로 중무장한 분리파가 주도권을 쥘 것으로 확신 중이었습니다. 실레 또한 그렇게 그리길 원했고, 담당 교수는 그럴수록 더욱 삿대질을 했습니다. 재능과 실력을 갖춘 실레가 당시 꿈틀대고 있던 분리파의 수장인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해진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에곤 실레, 발리의 초상


   발리는 그런 클림트가 실레에게 소개해 준 모델이었습니다.


   블론디에 큰 눈, 단정한 얼굴 선과 우아한 몸 자세.


   경제관념은 털 끝만도 없던 실레, 모델 섭외료는커녕 하루 식사도 제때 못하던 그에게 발리는 한줄기 오아시스였습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사랑에 빠지고, 이내 동거생활에 들어갑니다. 


   우아함의 반대편에 있는 퇴폐적인 솔직함을 추구하던 실레에게 발리는 천상의 모델이었습니다. 발리는 그가 원하는 야한 표정과 노골적인 자세, 때때론 그가 바란 이상의 영감까지 주는, 지금으로 보면 연기자의 재능을 타고 난 여성이었습니다.


   그랬던 두 사람이 왜…?




   "실레요? 천진함과 사악함을 함께 가진 사람이요." <발레리에 노이칠>


   실레는 남녀 관계에 있어선 늘 자신이 주도권을 갖길 원했습니다. 이는 말년의 아버지를 무시한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실레가 발리에게 빚을 지고 맙니다. 큰 빚입니다. 사실상 공짜모델로 부려먹은 데 이어, 무려 옥바라지를 시킨 것입니다.


   두 사람은 조용한 삶을 위해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 보헤미아 크루마우, 지금의 체코 내 체스키크롬로프로 이사를 갑니다. 현재 관광지로 유명한 이곳은 당시에도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던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어 또 다른 시골인 빈 서쪽의 노일렌바흐로 몸을 옮깁니다. 


   시골 사람들은 결혼식도 하지 않은 떠돌이의 두 남녀가 거처를 차린 것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다만, 어린 아이들은 달리 봤습니다. 나이 차이가 그나마 적은 형·누나, 오빠·언니가 마을에 온 것을 환영했습니다. 에곤과 발리는 아이들과 놀 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의 집은 곧 아이들의 아지트가 될만큼 북적이게 됩니다.


   문제는 예고치않게 발생했습니다.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서둘러 문을 열자, 온 몸이 비에 젖은 한 소녀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애원합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소녀를 맞아줘, 하룻 밤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경찰이 문을 두드립니다. 실레는 아이를 유인한 바 없고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지만, 경찰은 이를 무시합니다. 에곤의 방 안에서 온갖 퇴폐적인 그림을 본 후 그에게 형법96조(성적 목적을 위해 강압이나 속임수로 여성을 유괴한 경우), 형법 128조(14세 이하 어린이와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한 경우), 형법 516조(공공의 물의를 야기한 비도덕적 중대 범죄의 경우)등을 적용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소녀는 그 사이 자해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실레는 감옥에 갑니다. 다행히 죗값이 무거운 유괴·강간 혐의에선 무죄를 받아 21일간의 구류형을 받습니다.


   발리는 헌신적으로 옥바라지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민한 남성에게 감옥은 생명력을 차츰 옅게 하는 독극물과 같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감옥 창문 틈으로 매일 같이 편지와 음식 등을 전해줬습니다. 발각되지 않은 그림들을 보관했고, 생활비를 모아두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실레는 발리의 헌신이 고마운 한편, 마음 한켠에는 부담감의 씨앗이 자리 잡습니다. 발리는 실레가 출소한 날 소녀처럼 기뻐합니다. 실레는 그런 발리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습니다.


   실레는 아마 이때부터 발리와의 이별을 준비한 걸지도 모릅니다.





   실레가 사실상 발리를 찬 것일텐데, 그림은 왜 이렇게 애처로울까요. 마치 자기가 데인 것처럼요.


에곤 실레, 두 얼굴의 자화상


   실레 같은 사람의 유형은 둘 중 하나입니다. 1. 지독히 순수하거나 2. 지독히 악랄하거나. 발리가 이미 잘 꿰뚫어본 셈입니다.


   실레와 발리의 끝은 좋지 않습니다. 오직 실레에 의해서 좋지 않게 됩니다.


   실레는 1915년,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합니다. 일방적으로 발리를 버린 것입니다. 발리는 출신조차 불분명한, 소위 사창가의 여인으로 취급받던 여성입니다. 에디트는 격식 있는 철도 공무원의 집안으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고요. 성공과 안정된 미래를 위해 점잖은 가정 출신의 여성을 택한 것입니다. 


   발리는 이들이 결혼하기 전 실레의 편지를 에디트에게 전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설마'라는 마음이었겠죠. 발리의 마음을 더욱 무너뜨린 것은, 결혼식이 있을 때쯤 받은 편지였습니다. 원한다면 만날 수 있고, 원한다면 여행도 갈 수 있다….발리는 그의 아이 같은 사악함에 치를 떨게 됩니다. 그녀는 그 이후 실레의 삶 속에서 철저히 떨어져 나갑니다. 


   실레는 '죽음과 여인'을 그리면서 발리를 버린 죄악과 상실감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실레는 사실 그를 남성이 나닌 여성에 빗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이기심이 이같이 애절한 그림을 만든 것입니다.




   지독히 순수하거나, 지독히 악랄했던 실레는 발리를 떠나 행복했을까요.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에곤 실레, 앉아있는 에디트의 초상


   실레는 평생 발리를 그리워했습니다. 에디트는 좋은 아내감이었지만, 좋은 모델이 되는 데는 소질이 없었던 탓입니다. 실레는 에디트에게 거듭 발리의 상(狀)을 요구하며 성질을 냈습니다. 에디트는 그런 실레에게 지쳐가기를 반복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실레는 1918년 10월28일 임신 6개월이던 에디트를 스페인 독감으로 잃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극진히 간호한 실레는 사흘 뒤 자신도 똑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고작 28세였습니다.


   발리는요? 그녀는 에곤을 떠난 후 종군간호사로 참전, 1917년에 이미 성홍열로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실레의 장례식에 발리가 오지 않는 일을 놓고 수군대던 사람들은 그 사연을 뒤늦게 알고서야 눈물을 흘렸다고 하죠.



에곤 실레,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실레와 발리, 발리와 실레. 


   만약 두 사람이 이같은 결말을 알았다면, 그래도 이들은 처음부터 서로를 원할 수 있었을까요.


   실레가 그린 발리의 모습들을 보면,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이들의 합작품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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