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율 Oct 24. 2020

이럴거면 차라리, 주지도 말았어야 했다

<마지막.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1955년. 대한민국 극장가에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 포스터가 내걸렸습니다. 감독은 훗날 '영광의 탈출'(1966)로 이름을 날리는 오토 프레밍거, 출연진은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와 그녀 못지 않게 유명세를 탄 배우 로버트 미첨 등 입니다. 소위 '별들의 모임'이라고 불릴만 했네요.


   어느 날 한 남성이 포스터를 멍하니 봅니다. 한 시간, 두 시간…. 헝클어진 머리, 기력을 잃은 눈, 퀭한 표정. 하루 한 끼마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거리의 부랑자 모습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강….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 그는 홀린듯 중얼댑니다. 이 화가가 영화를 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이 제목에 영감을 받고 곧장 흰 종이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이중섭(1916~1956), 그리고 그의 절필작 '돌아오지 않는 강'(1956)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종이에 유채, 18 x 15cm, 1956, 한국데이터진흥원


   어두운 색조를 띤 그림에는 그리움이 끈덕지게 묻어있습니다.


   한 남성이 낡은 집 창틀에서 밖을 보고 있습니다. 겨우 실눈을 떴습니다. 초점도 분명치 않습니다. 울음도 메말랐고, 기다리는 일도 지쳐 표정을 잃은 것 같습니다. 슬픔 너머 체념의 감정도 읽힙니다.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도 않습니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이끼가 끼든 곰팡이가 피든, 얇은 창틀 한가닥이 집 안의 고요를 겨우 지탱해줍니다. 풍경의 일부로 사라진다해도, 그럼에도 처절한 그리움을 이어가겠다는 감정이 전해집니다. 


   그가 그리워하는 건 아내, 아들, 부모, 그리고 고향이었습니다. 


   멀리서 광주리를 진 한 여성이 흐릿히 보입니다. 서 있는지,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남성은 그런 여성에게 말합니다. 너는 어떤 상태여도 상관 없고, 무슨 짐을 지고 와도 상관없다. 그저 내 눈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된다고.


   배경의 얼룩은 함박눈을 표현했다지만, 얼핏 보면 눈물 자국 같습니다. 거칠고 불분명한 얼룩 사이로 죽음의 그림자도 슬며시 보이는 듯합니다. 이중섭은 이 '돌아오지 않는 강'을 끝으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필작을 그리면서 탈진을 할 만큼 울었다고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강의 첫 줄기, 아내.


   "한 없이 멋지고, 한 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멋지고 다정한 나의 천사….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천사. 만세, 만세."


   1939년. 이중섭의 당시 나이는 22살. 그는 서울 문화학원에서 문학도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와 처음 만났습니다. 이중섭은 단아한 그녀에게 첫 눈에 반했습니다. 마사코 또한 훤칠한 데 운동, 노래까지 잘한 그에게 끌렸습니다. 이중섭은 오산학교 출신입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그 학교가 맞습니다. 그런 그에게 일본인 여성과의 교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이중섭은 상사병까지 앓았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결국 국경과 민족, 역사를 뛰어 넘습니다. 둘은 연인이 됩니다. 둘은 마사코가 일본으로 간 후에도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결국 1945년, 마사코는 그를 보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습니다.


   두 사람은 북한 원산에서 결혼합니다. 이중섭은 마사코와 결혼한 후 '이남덕'이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남쪽에서 온 덕 있는 여인'이란 뜻입니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아스파라거스'란 애칭을 붙입니다. 그녀의 발이 작은 몸에 비해 유난히 크고 긴 게 그 모양을 닮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사코는 이중섭을 '아고리'라고 부릅니다. 그의 턱이 길다고 해 붙인 별명입니다. 요즘 말로는 '턱돌이' 정도입니다.


   신혼 생활은 달콤했습니다. 원산에서 집을 얻은 이중섭과 마사코는 아들 둘을 낳습니다. 프랑스 유학 계획까지 세웁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애절함이 달콤함을 점령해버립니다. 이들은 흥남 철수 때 월남합니다. 이중섭은 일본인 여성을 경계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녀를 힘껏 감쌌습니다. 그들은 부산과 제주도, 다시 부산으로 집을 옮기면서 힘겹게 삽니다. 1952년, 아내와 자식을 일본으로 보내기로 한 날에는 옛 생각이 나서 펑펑 울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살 수 없을만큼 빈털털이였습니다. 아내는 피를 토할만큼 심한 폐결핵 증상을 보였고, 설상가상으로 첫째 아들의 건강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일본으로 보내 치료부터 받게 하자는 판단이었습니다.


   이중섭은 당시만 해도 '잠시 떨어져 있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곧장 따라가거나, 아내가 곧장 돌아오거나, 둘 중 하나는 이뤄질 것으로 봤지만 둘 다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여권이 없었고, 전쟁통에 새 여권을 찍어줄 기관도 있을리 만무했습니다. 아내의 건강도 금방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희망은 차츰 탈을 벗고 절망을 내보입니다. 그리움으로 몸서리 친 이중섭은 1953년 참다 못해 선원 신분으로 위장한 채 일본행 배를 탑니다. 어떻게 일이 풀려 이중섭은 아내와 꿈 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없어 다시 고국 땅을 밟습니다. 영원한 이별이라곤 상상도 못한 채로요. 그는 혼을 잃을만큼 큰 후유증에 잠식됐습니다. 그는 그 절절함을 '돌아오지 않는 강'에 짙게 담았습니다.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32.0 x 49.5cm, 1955, 개인소장


   돌아오지 않는 강의 두 번째 줄기, 자식.


   "아빠는 감기도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 아빠가 한 달 후면 도쿄에 가서 자전거를 꼭 사줄게. 아빠는 하루종일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단다. 이제 곧 만날테니…. 아! 아빠는 기뻐요."


   "아빠가 가면, 반드시 자전거를 한 대씩 사줄게요. 건강히, 사이좋게 기다려요. 엄마가 편지를 보낼 때 편지도 같이 써줬으면 좋겠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건강히, 안녕."


   이중섭은 결국 자식에게 자전거를 선물하겠다는 소박함 꿈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중섭에게 아들 태현, 태성은 늘 미안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상당히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부족한 것 없는' 환경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익혔습니다. 반대로, '부족한 것 많은' 환경이 상당히 큰 불행인 일 또한 자연스레 알고 있었습니다.


   태현, 태성은 아직 글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채로 피난 길을 걸었습니다. 부산과 제주 등을 돌 땐 겨우 주먹밥을 먹었습니다. 이 일마저 힘들 땐 근처 바닷가에서 게와 조개류를 건져 먹었습니다. '배가 부르다'는 감정을 잊은 채 점점 왜소해집니다. 이들은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냈습니다. 태현, 태성은 밝은 기질을 잘 지켜냅니다.


이중섭, <그리운 제주도 풍경>, 종이에 잉크, 35 x 24.5cm


   이중섭이 당시 아이들을 보고 만든 그림을 볼까요. 게가 모래사장 같은 곳을 뛰어다닙니다. 벌거벗은 아이들은 자기만한 녀석들을 끌어당깁니다. 까르륵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멀리선 바다가 보입니다. 구름 한 점 없고, 파도 한 줄기 없이 고요합니다. 종이 귀퉁이에 있는 이중섭과 마사코는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의 작품 '그리운 제주도 풍경'입니다.


   이중섭은 마사코를 일본으로 보낼 때 아이들도 딸려 보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그녀와 함께 있어야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해질 것을 알았습니다. 중견기업을 이끈 아내 집안의 든든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는 반면 그 당시로는 불안정한 환쟁이일 뿐이었습니다.


   이중섭은 아이들을 홀로 떠맡을 자신도 없었습니다. 이중섭은 천성적으로 유약(柔弱)했습니다. 마사코가 되레 억척스러웠습니다. 


   한편 두 사람은 태현을 낳기 전 물새 같은 첫 아들을 얻었지만, 이 아이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돼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중섭은 이때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가 힘이 빠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아이를 위한 천도복숭아만 수백점을 그릴 정도였습니다. 그의 품에서 태현·태성이 또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강을 건넌다면, 그는 결코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일본으로 간 태현, 태성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단 1주일 뿐이었습니다.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41x71cm, 1951


   돌아오지 않는 강의 세 번째 줄기, 고향.


   전반적인 이중섭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어릴 때 더 행복했을 것입니다. 북한 평원에서 기반을 다진 그의 집안은 대대로 풍족했습니다. 애초 펜 대신 붓을 먼저 잡은 이중섭은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소 그림을 좋아한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사(牛舍)를 나돌았습니다. 집안은 더욱 부유해집니다. 사업 수완이 좋은 이중섭의 형 광석은 원산에 큰 백화점을 짓습니다. 온 가족은 평생 돈을 벌지 않아도 될 만큼 큰 재산을 축적합니다. 


   장남도 아닌 이중섭이 오산학교를 가고, 한반도가 총성에 뒤덮이기 전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것 또한 이런 배경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원본)>, 종이에 유채, 29.5 x 64.5cm, 1954, 개인소장

   문제는 6·25 전쟁이었습니다. 이중섭의 형은 공산당원들에 의해 지주, 자본가란 이유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살해당한 것입니다. 돈과 땅, 건물은 모두 물거품이 돼 사라졌습니다. 


   이중섭과 마사코가 월남을 결단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한사코 떠나길 거부합니다. 너희 형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내가 이 집을 지키면서 기다리겠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실의에 빠진 채 죽음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중섭은 설득을 포기하고,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떠나갑니다. 먼 산만 보는 어머니의 손에 자신이 여태 그린 그림 한 다발을 쥐어주고서요.


   그러고는, 그는 단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게 된 것 또한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의 호(號)는 대향(大鄕). 어머니가 붙인 아명(兒名)을 그대로 따와 평생을 쓴 것입니다.



이중섭,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 x 41.5cm, 1954, 호암미술관


   돌아오지 않는 강의 마지막 줄기, 삶.


   이중섭의 끝은 비참했습니다.


   그는 가족과의 생이별을 재료 삼아 필생의 걸작을 그립니다.


   그는 1955년, 미도파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갖습니다. 잘 되면 다시 일본으로 가 마사코를 볼 수 있다, 태성, 태현에게 자전거도 사줄 수 있다…. 그는 부푼 꿈을 안고 온 힘을 쏟아냅니다.


   전시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의 은종이 그림(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에 춘화(春畵)란 딱지가 붙었을 때부터 발생했습니다. 전시는 기간을 다 못 채웁니다. 그가 북한 출신이란 게 알려진 뒤부터는 평론가들마저 악평을 퍼붓습니다. 상처 받은 그는 눈에 띄게 쇠약해집니다.


   그나마 팔린 그림 값은 모두 떼입니다. 


   중개무역 사업을 말한 오산학교 후배는 이중섭의 등골만 빼먹곤 도망쳤습니다. 그에게 남은 건 빚 뿐이었습니다. 가난에서 발버둥칠수록 더욱 깊은 가난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중섭, <싸우는 소>, 종이에 유채, 17 x 39cm, 1954
이중섭, <싸우는 소>,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7.5 x 39.5cm, 1955, 개인소장


   그의 '싸우는 소'(1954)를 보면 죽을 힘을 다해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가 보입니다. 1년 후 다시 그린 '싸우는 소'(1955)는요. 분노, 좌절, 체념만이 읽힙니다. 말년의 이중섭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일본으로 편지조차 쓰지 않습니다. 그는 마사코가 보낸 편지를 벽에 붙이고선 멍하니 앉아있습니다. 매 하루를 방 안에서 실실 웃고, 실실 울면서 보냈습니다.


   이중섭은 1956년 간염과 영양실조로 고통 받다 죽습니다. 


   그의 은지화가 뉴욕에서 호평받던 시기였습니다. 드디어 천재성을 공공연히 인정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소식도 못 들은 채 오직 돌아오지 않는 강의 줄기들만 그리다가 눈을 감은 것입니다.


이전 29화 슬픔이여 안녕, 안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