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min Jan 13. 2023

쭈의 하루와 이기적인 민민


오전 8시, 항상 일어나던 그 시간에 눈을 떴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눈에 붙은 눈곱을 떼고 있는데 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랑 같이 있자-”


자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불을 내려놓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생각했는데 사라진 온기를 느꼈나 보다. 거실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박하를 지나 다시 침실(항상 이불이 깔려 있는 자는 방)로 갔더니 아기는 눈도 뜨지 않고 이불에 파묻혀 있다. 대충 분위기를 보고 다시 나가려고 한 발 떼자 쭈는 이불을 획 들추며,


“가지 마-”


쪼르륵 잔발로 다가가 쭈 옆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엄마 이제 준비 다했어. 나가서 인사하자!”

“싫어, 더 있을 거야”


같은 대화를 서너 번 반복한 끝에 우린느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박하가 잘라놓은 베이글을 씹었다. 씹으면서 아침뉴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어젯밤에 봤던 뉴스가 나왔다.


“저 뉴스, 어제 본 거랑 똑같네-”

“그러네, 그러네”

“아빠 엄마 가면 내가 보고 싶은 거 봐도 돼?”

“네가 보고 싶은 게 뭔데?”

“티니핑! 내가 티니핑 노래 틀어줄까?”

“아니… 그래”



쭈는 볼 거 다 보고 느지막하게 어린이집에 간다. 오늘은 킥보드 말고 자전거를 타야 한단다. 쭈는 딱 봐도 가기 싫은 눈치지만, 가기 싫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척한다. 아이가 가야 나도 나의 세계로 갈 수 있다. 이것까지 못하면 아이의 마음을 볼 여유를 가질 수 없으니까. 이 정도는 이기적이어도 되지 않나? 이 일을 두고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이의 행복을 희생시키려 하냐’고 따질 수 있을까?,라고 합리화한다. 그래도 조금 미안할 때가 있다. 쭈에겐 그렇고 그런 날들 중 하루로 기억되겠지만, 날 쳐다보던 쭈의 눈을 기억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겨우 만으로 2년을 꽉 채워 살았을 그때부터 가기 싫어하는 눈빛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땐 어린이집 앞에서 안 들어가겠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면 나는 저 작은 아이에게 화가 나는 것인지 내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화가 나는 것인지 분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원인 모를 화를 아이의 옆에서 뿜내기도 했다. 신기한 건 그런 날엔 쭈의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병원을 찾는 날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정말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 가기 싫은 마음이 커져서 몸이 안 좋아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우연이 반복되다 보니 저 아이는 별 이유 없이 떼쓰는 아이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가끔은 ‘내일은 꼭 가야 한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내가 세 살 때는 어땠었나, 겨우 세 살 아이가 그럴 수 있는 일인가, 돌아보게 된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도 장소, 상태 등은 보이지만, 그때의 앞뒤 상황은 생각나지 않는다. 추억이란 게 다 그렇지 뭐. 그런데 세 살 때 있었던 일을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기억이라고 해야 하나? 추억이라면 그리운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쭈는 지금 킥보드와 자전거를 번갈아 타며, 가기 싫은 어린이집에 꾸역꾸역 가서는, 가기 싫었던 마음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왜 하는지 알 수 없는 놀이에 빠져 있을 것이다. 오후 4시가 되면 어린이집에서 나와 여태 함께 놀았던 친구들과 또다시 놀이터를 뛰어다닐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연필을 들고 글자 공부를 한다며 책상을 펴고 앉을 것이다. 쭈의 지금은 돌아가고 싶은 추억으로 남을까? 아니면 그리움 없는 기억으로만 남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미용실 예수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