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있는 육아공식

나를 위한 유난도 가끔은

by 일리


처음 내가 생각했던 육아 공식은 이랬다.


아기 ÷ (아빠 참여도+엄마 체력지수) = 육아 난이도

아기 : 100~1000 (순둥~까칠)

아빠 : 1~10 (구경꾼~슈퍼맨)

엄마 : 1~10 (종이인형~여전사)


호은이는 다행히 적당히 잘 먹고, 통잠도 일찍 잤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이 정도면 셋째까지 낳으라"라며 기막혀할 정도.(기질 점수: 500) 나는 운동을 좋아해 별명이 태릉인이었고 (체력지수: 8), 남편은 꽤 섬세해 아이를 씻기고 먹이는 것도 곧잘 했다. (참여도: 7)

= 난이도 33


*할만하다 : ~40

*힘들다 : 40~



나쁘지 않은 상황에도 왜 이렇게 버거웠을까.

종일 딸랑이를 흔들고 동요를 부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기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것도. 재우고 난 후엔 다음날 호은이가 안전하게 굴러다닐 수 있게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갔다. 집에서 종종걸음으로 다닐 만큼 마음은 언제나 쫓겼다. 매일 쓰러져 자니 꿈도 못 꾼 지도 오래였다.

삶의 흐름이 바뀌어갔다. 점점 팍팍하게.


내 하루에 나를 위한 낭만 한 방울이 필요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본 게 언제였나.

가끔 에어팟을 들으며 달밤체조. 와인잔에 사과주스를 채워 기분 내는 거 말고는 달리 혼자 즐기는 시간이 없었다. 동네 친구들 만나서 웃어도 아이들을 매개로 만났으니 다녀오면 공허했다. 나를 위해 뭐든 해봐야겠다 생각했다.


기억하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 읽었다

초등학생 때 엄마는 내 일기를 몰래 보고 놀렸다. 열쇠 달린 다이어리, 비밀번호 다이어리도사 보았는데 언젠가 누군가 볼 것 같아 진짜 솔직하게 쓰지 않게 되더라. 그 이후로 나는 어딘가에 마음을 남기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임신했을 때부터 맞닥뜨리는 새로운 경험들이 아쉬워서 쓰기 시작했다. 메모장에, 나 챗방에, 종이 공책이든 어디든.

글의 힘은 대단했다. 몇줄만 적어도 집에 와 세수를 마치고 거울 볼 때처럼 오늘을 견뎌낸 나를 토닥이며 위로 해주었다.

쓰다 보니 잘 쓰고 싶어 져서 다른 사람 글들도 들춰봤다. 일찍 재운날은 거실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었다. 육아서 말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동요 말고 내가 듣고 싶은 잔나비 노래를 들으며.


하루 한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날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었다.



우리 집에 프라이빗 스파룸이!

매일 어깨 등 무릎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나이 많은 엄마의 설움이란...

황토방을 구르며 땀을 쫙 빼고 싶었지만 모유수유가 나를 붙잡았다. 할 수 있는 건 탕목욕뿐.

아이를 재우는 동안 남편한테 물을 받아달라고 했는데, 화장실 전체가 자욱한 수증기로 가득 차 호화스러운 스파로 변신했다. 문을 닫고 샤워기를 높게 걸어두었다는 생색을 들으며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근다. 얼음을 넣은 스파클링 사과주스와 샤인머스킷도 옆에 두고. 그야말로 완벽하다. 줄리아로버츠의 프리티우먼처럼.



립스틱과 브로우바

립스틱을 선물 받았다. 외출도 잘 안 하고 집에만 있는데 웬 립스틱? 했었는데, 나를 거울로 이끌었다. 출산 전에는 퇴근하고 집에 와 화장을 지우며 스트레스를 닦아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었는데. 이제 먼지가 앉은 화장대에 앉아 수유복에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을 찾고 립라인에 맞춰 립스틱도 바르는 나. 힐링도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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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남편의 쓸모는 육아를 할 때 필수적이다. 나를 케어할 때도. 남편은 1~2주에 한 번씩 눈썹을 다듬어줬다. 힉- 임꺽정 눈썹이네! 하는 날엔 브로우바가 열린다. 무릎을 베고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사각사각 소리와 이마를 스치는 손의 온기에 잠이 솔솔 온다.



작디작은 일에 행복해하고
부족한 시간 속에서 낭만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공식보단 이런 공식도 가능할 것 같다.


아기 기질 ÷ (아빠 참여도+엄마 체력+낭만지수)

낭만지수 : 일주일 동안 육아, 회사, 집안일 외 온전히 나를 위해 쓴 시간 (1시간 = 1)



체력에만 의존하다간 정신까지 고갈될 테니, 부지런히 혼자만의 낭만을 만들어보자. 낭만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 공식이자, 장기 육아전에서 버티기 위한 나를 위한 유난이 아닐까. 평생 아이와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의연하게 품는 엄마가 될 수 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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