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디트 Apr 05. 2022

환절기가 시작되었다

  계절과 계절, 특히 겨울과 봄 사이에는 확연하고 강렬하고 진한 선이 그어져 있다. 어릴 때는 어라, 어느 순간 계절이 바뀌어 있네? 하며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 선들이지만 이제는 손에 잡힐듯이 뚜렷해졌다. 그런 반면 어떤 선들은 점차 흐릿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예컨대 봄과 여름 사이, 혹은 가을과 겨울 사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마 그건 경계선이 흐릿해진다기보단 계절 자체가 선처럼 얇아져 가고 있다고 봐야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계절과 계절, 특히 겨울과 봄 사이의 선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차 그 진하기가 더해져 가고 있다. 그 이유가 머리가 커서 계절과 계절을 더 잘 구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런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있다. 이를테면 코가 먹먹해지고 기침이 살살 끓어오르는 식으로 말이다. 몸은 별난 곳들에만 신기한 방식으로 예민해서 계절이 바뀌는 걸 나보다도 빨리 알아채고 재빨리 방어태세를 갖춘다. 그래서, 으엣취! 훌쩍. 하고 나면 코가 꽉 막혀버린다. 내 가슴이 꽉 막히는 건 부가적인 사이드 이펙트. 이렇듯 환절기의 고통이 찾아오고 나서야 나는 아, 또 계절이 바뀌는구나. 내 인생, 몇십 번째의 봄이 다시 찾아왔구나 아련하거나 혹은 아연해지는 것이다.


  환절기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몸이 된 건 전체적으로 절망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좋은 점을 꼽자면 나를, 그리고 나의 고통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나는 그 옛날부터 환절기가 되면 코가 막혔을 것이다. 적어도 막히는 기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고통들을 무시해 왔다. 사실을 무시하는 방법을 긴 세월에 걸쳐서 체화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뻔히 있는 고통들을 무시하는 일. 그것들이 내 몸 곳곳에 습관처럼 베여있었다.


  하지만 여러 날을 지나오면서, 나의 몸이 변화하고 생각이 변화하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나는 이런저런 고통들이, 아 고통이구나. 실은 고통이었구나. 하고 고통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 둘 알아나갔다. 환절기의 고통이 그랬고, 두통의 고통이 그랬다. 두통의 고통에 대한 사족을 달아보자면, 나는 머리가 멍하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가 두통이라는 걸 여러 해 동안 알지 못했다. 머리가 물리적으로 아프지 않으니까 이건 두통이 아니다.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느껴왔던 그 사소한 불편함들이 두통의 일환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모르던 문제가 깔끔하게 풀렸을 때의 환희와 비슷한 걸 느꼈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성장이란 모르던 문제가 깔끔하게 풀리는 형태로 수많은 고통들을 인지하고 고통이라는 범주 안으로 분류하는 작업 전체를 통틀어서 일컫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요 몇 년간 참 많이 성장한 것일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화창하고 맑은 날씨 아래서 코를 훌쩍이면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장 전통적인 직업의 형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