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의 설렘과 두려움 사이에서
나는 회사의 스낵바 코너의 창 너머로 건너편 빌딩에 위치한 블루보틀 커피를 바라보고 있다. 바닥에서부터 높은 천장까지 뻗은 탁트인 창이 매력적인 이 카페는 커피를 벗삼아 아침을 시작하는 다운타운의 직장인들로 분주하다. 불과 두 달 전, 나는 저기 창가 자리에 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조의 피드백을 듣고 있었다. 조는 석사 전공 시절 사용자경험 디자인 User Experience (UX) Design을 나에게 처음 가르쳐준 교수님이자, 나를 회사 UX 리서처 포지션에 추천해준 서비스 디자이너였다.
"채용 프로세스가 워낙 느려서 미안해. 큰 회사들이 원래 좀 그래. 최종 의사 결정자는 내 보스이자 매니저인 크리스라 아직 내가 결과를 장담해주긴 어려울 것 같애.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너가 굉장히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봐 줘."
조는 신중했지만 희망적이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동안 회사에서 면접을 둘러싸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를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누군가가 어떤 회사의 채용에 합격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 본인만의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거기에는 굉장히 많은 운과 타이밍과 회사 내부의 사정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사실 조와 그 자리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한 회사에서 서류면접과 전화 스크리닝 인터뷰 (30여 분 간의 짧은 통화로 후보의 자격을 판단하는 필터링)와 챌린지 인터뷰 (회사에서 미리 과제를 주고 면접에서 과제를 발표하는 형식)를 넘어 그 다음 단계를 기다리고 있다는 자체가 나에겐 거의 기적처럼 느껴졌다. 대학원에서 광고를 전공하면서 오히려 광고가 아닌 UX를 업으로 삼고 싶다는 깨달음을 얻고 많은 곳에 회사에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막상 UX계로의 커리어 전환은 쉽지 않았다. 특히 UX 리서처의 경우 사용자 경험 분야의 중심지라 불리우는 실리콘 밸리일지라도 대부분의 회사들이 UX 리서처를 고용하지 않는데다 (많은 경우 UX 디자이너들이 리서치까지 겸한다) 심리학이나 인간 컴퓨터 상호작용 Human Computer Interaction (HCI) 등의 석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을 리서처로 선호하다보니, UX 쪽에 뚜렷한 경험이 없었던 광고 석사 출신인 나에게 주어질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처음 조에게 UX 리서처가 되고싶다는 희망을 밝혔을 때 그가 나에게 해준 조언 역시 더 기회가 많고 이전 경력에 관대한 UX 디자이너 직에 도전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조의 추천서는 내가 그 자리에 완벽한 후보일 것이라는 그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교수님이 한 필사적인 외국인 학생에게 선사해주는 경험 제공(예.면접 준비 및 연습)정도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회사와 나의 인연은 나나 조의 생각보다도 강했다. 조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채용 주관자이자 팀의 보스인 크리스는 UX 리서치에 대해 남들보다 더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나의 마케팅 관련 경력을 높이 샀다 한다. 면접 과제 발표에서 보여준 나의 리서치 플랜 방식은 다른 후보들에 비해 이론적인 바탕은 부족했을지라도 실용적이고 디테일해서 디자이너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본래 시니어 급을 뽑는 자리였기에 나의 경력기간이 다른 후보들이 비해 짧아 탈락이 될 수 있었으나, 당시 미드레벨 Mid-level로 있던 리서처가 퇴사를 결정하면서 나를 채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의사결정의 다이나믹함과 회사 내부의 변화들이 채용과정을 길어지게 하는 이유였다. 조와의 대화로부터 한달 후, 나는 정식 오퍼레터를 받았다.
"어떤 회사랑 인연이라면 모든 과정이 희한스러울 만큼 착착 맞아 떨어지게 되있어."
지금은 회사 동료이자 현재 내가 공부한 대학원 과정에서 콘텐트 전략Content Strategy를 가르치고 있는 맷 역시 채용 과정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적 있다. 나는 그의 묘사만큼 완벽하게 나의 면접과정을 표현할 다른 길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수십 장의 커버레터를 써왔지만, 정작 이 회사를 위해서는 커버레터를 쓰지 않았다. 전화 인터뷰는 물론이고 어떤 종류의 전화 통화도 무척 어색해하는 나이지만, 크리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는 신들린듯 마케팅 리서치가 어떻게 UX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온 이래로 지난 몇 년간 꿈꾸고 바라보던 그 목적지에 순풍의 도움으로 도착한 기분이었다.
한참 감상에 젖어있을 때 한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회사 동료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인삿말에 엉겹결에 반응을 했고, 그 짧은 대화의 끝에서 거울 속에서 너무나 낯설게 웃고있는 나를 발견했다. 입사를 했다는 그 성취감은 샌프란시스코의 새벽 안개처럼 출근길 위에서 잠시 피어올랐다 사라질뿐, 어색함, 자기회의, 걱정, 불안감 등이 이 신입 리서처의 하루를 지배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테크회사 답게 특이한 테마로 층층마다 꾸며진 커다란 오피스, 내가 그토록 바랐던 타이틀, 직장의 안정감, 그리고 친절한 동료들과 자유로운 분위기, 그 모든 것들이 보기엔 멋지지만 내 몸에는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것들을 가지면 마치 만화 속 영웅들처럼 순식간에 커다랗고 강인하게 변신하여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막상 나는 여전히 작고 어색하고 두려움이 많은 소녀였다.
출근길에 두 손 안에 따뜻한 블루보틀의 카푸치노 한잔을 품는 것을 상상했지만, 결국 회사 스낵바에서 민트티 한 잔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에 없던 위경련을 앓기 시작한 이래로 커피를 입에 못댄지 2주째이다.
"행복해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졸업과 취업 모두 축하할 기쁜 일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몸에 무리를 줘요. 그러니 명상도 많이 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져봐요."
위장약을 처방해줄줄 알았던 의사선생님은 오히려 덕담에 가까운 정신상담을 해줬다.
"내 말을 못알아 들으면 어떡하지."
"내가 그들의 말을 못알아 들으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내가 모르는 UX Research에 대한 질문을 하면 뭐라 대답하지."
"추천해준 조의 얼굴에 먹칠을 하면 어떡하지."
"나를 믿고 뽑아준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어떡하지."
자리로 돌아와 다이어리를 펴고 머리 속을 거침없이 뛰노는 원숭이처럼 내 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가감없이 적어내려갔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아침의식 같은 것이었다. 외국인으로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부담감(특히나 리서처는 대화를 주요 무기 삼는 직업이다)과 마케팅 전략가가 아닌 UX 리서처라는 새로운 타이틀에 걸맞는 퍼포먼스를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이 걱정의 단어들 사이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력을 안한 것도 아닌데, 단지 채용과정에서 기대치 않은 순풍을 맞았다는 이유로 나는 스스로의 자격을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처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려가 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셰릴 샌드버그는 그녀의 책 『린 인 Lean In』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더 강렬히 가면증후군을 겪는지 이야기 한다. 나는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을 비롯한 유색 인종 또한 가면 증후군을 더 심하게 겪고 있으리라 상상해본다. 가면증후군은 편견이나 제도등으로 인해 넘어야할 사회의 벽이 더 높은 이들이 개인의 성취에 안도하지 못하고 사회의 기대치와 잣대를 내재화하기에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머릿 속 원숭이가 바쁘게 뛰어다니며 만들어낸 걱정의 리스트 아래에 아래의 문장을 추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버벅거리고, 엉뚱한 말을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짓고, 땀을 삐짓삐짓 흘리고, 새로운 동료의 이름을 떠올리려 몇번이고 미간을 찌뿌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까지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많은 것을 배울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낯선 땅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성공을 이루고 있으니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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