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취업생들의 불치병 '영어 슬럼프'에 대해서
해외살이중인 한국인들은 정착해나가는 동안 외국어실력의 끊임 없는 Up & Down을 겪는다.
Up의 시기: 어? 나 오늘 영어 쫌 하는데? 영어가 쏙쏙 들어와.. 이정도면 이제 미국에서 문제 없이 살 수 있겠어!
Down의 시기: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거지? 애기가 옹알이 하는 것도 아니고.. 아 스트레스받아 집에서 아는형님이나 볼래ㅠㅠ
Up과 Down 사이: 앙드레김 빙의. 영어도 한국어도 둘다 못함.
Down커브에 들어선 (=우리는 이걸 ‘슬럼프’라고 표현한다) 우리들은 다른 한국 친구들에게 연락해 한국식당에 가서 매운 한국음식을 시켜먹고 한국어를 마구 쏟아뱉으며 어젯밤에 본 한국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한국에 귀국한 듯한 순간을 즐긴다. 이러한 환경에 빠지기 쉬운 뉴욕이나 LA등 대도시에 사는 몇몇 친구들은 이 커브 곡선에 들었다가 영원히 Up으로 회귀하지 못하고 미국 속의 한국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이 슬럼프는 단지 영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의사소통이 수월하지 못하다고 느끼면 일상의 작은 일들, 예를 들면 슈퍼마켓에서 후라이팬용 클리너를 산다던지, 은행에서 잔고증명서를 발급받는 일 조차 버거워지면서 자신감이 바닥을 치게 된다. 글쓰는걸 좋아하고 나름 조리있게 말을 해 어릴때는 ‘여우’라는 별명까지 들어봤던 나로썬 의사소통을 원만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자신감이 최고로 바닥을 쳤을 때는 기력이 쇠한 어른들이 주로 겪는다는 ‘구안와사’까지 겪어봤다. 아무리 활짝 웃으려 해도 마비된 왼쪽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였고, 이는 마치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라는 미국에서 분투하는 나의 심정을 그 반쪽 얼굴이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이 글을 처음 작성한것이 2016년, 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는 아직 롤러코스터 타듯 '업'과 '다운'의 시기를 넘나들고 있다. 슬럼프의 깊이가 얕아지거나 길이가 짧아질 수는 있어도, 영어 슬럼프라는 것은 성인이 되어 영어권국가로 이주한 외국인의 숙명이자 불치병과 같은 것이다. 다만 이제는 슬럼프의 시기를 조금 더 노련하게, 떡볶이와 한국예능의 힘을 받지 않고도 대처하는 노하우가 생겼다. 나와 같은 고충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온누리의 한국인 유학생 및 해외 직장인들에게 나의 요령이 조금이나마 공감 혹은 도움이 되길-
Down의 시기는 사실 영어실력의 저하라기보다는 심신의 피로에서 기인한다. 특히 ‘Social’ ‘Extrovert’ ‘Self-expressive’ ‘Confident’ 같은 사교성을 대표하는 단어들이 덕목으로 취급받는 미국 사회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세일즈하고 어떤 낯선 사람 앞에서라도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암묵적인 사회의 기대수준이다보니, 미국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영어로 완전한 문장을 만드는 문법실력 이외에도 예컨대 다음과 같은 기술들이 필요하다.
<미국 Social Scene에 합류하기 위한 기본 조건들>
✔ 시끌 벅적한 장소에서 공기를 뚫고 나의 목소리를 상대의 귓가에 전달할 수 있을만큼의 굵은 성대
✔ 입가의 경련 없이도 끊임없이 미소지을 수 있는 단련된 얼굴 근육
✔ 상대의 말을 못알아 들어도 다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눈치와
✔ 능동적인 리액션 기술
✔ 그리고 3시간 내내 서서 2잔의 맥주와 1잔의 와인, 1잔의 칵테일을 마셔도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헛소리 하지 않을 수 있는 체력
다시 말해, 그냥 수다떠는 행위 조차 우리 외국인들에게는 엄청난 에너지 소모이다.
특히 이제 막 미국땅을 밟은 열정적인 한국인들은 매일같이 meetup이나 social event에 참가한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의 수나 사교활동에 참가한 시간이 자신의 외국어 실력 향상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피곤한 상태에서 나간 모임에서 다섯명의 친구들 앞에서 ‘영어 버퍼링’현상을 겪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트라우마가 되어 한동안 모임을 회피하게 될 수도 있다. 단어가 생각이 안난다던가, 말이 자꾸 꼬인다던가, 나도 모르게 위축이 드는 것은, 마치 몸이 감기가 걸리기 전 신호를 보내듯 잠재의식의 내 자신이 휴식을 취하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혹은 진짜 감기에 걸렸거나.)
사람들을 덜 만나라는 말은 한마디로 에너지 재충전을 위한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만약 입에 단내나도록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마치 머리가 포맷되어 미국 도착 Day 1으로 영어실력이 초기화 되는 느낌을 받거나 수많은 한국 티비스트리밍 웹사이트 세계에 하루종일 온몸을 담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친한 친구와의 잠깐의 커피 한잔이나 점심식사는 적당히 나의 에너지를 유지하면서 암흑의 세계로의 입장을 방지하는 좋은 방법이다. 나같은 경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외국인 친구들을 만날 때 많이 위로받는 편이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안정적인 영어를 구사한다. 결국 그들도 모두 내가 겪는 고충을 다 겪어오며 눈치와 인내를 발달시켰기 때문에 어린아이 수준으로 회귀한 내 영어를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그들에게 아직은 강한 억양이 남아있기도 하고, 가끔은 마땅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하지만, 나와 같은 격정의 롤러코스터는 더이상 겪지 않는 듯 하다. 그런 친구들을 만나 차분히 일대일로 얘기하다보면 나도 어느새 발음이나 속도에 대한 걱정은 버리고 한국인의 억양을 듬뿍담아 즐겁게 얘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덜 만나는 에너지 충전 시간에 가장 좋은 것은 책을 읽는 것이다. 앞서 말한 ‘영어 잘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어떻게 영어를 배웠느냐 물어보면 하나같이 ‘책을 많이 읽었다‘라고 답한다. 나는 이 대답을 정말 싫어했다. 가뜩이나 모국어로 쓰여진 책도 난독증 환자처럼 더듬거리며 읽는 나로썬 영어로 쓰여진 책 한권을 끝내는 것이 무척 괴로웠다. 책을 펼친 지 10분이 지나서야 어제 읽던 것과 같은 부분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를 찾기 위해 사전을 옆에 두고 책을 읽다보면 한참 후에는 내가 사전을 읽고 있는 건지 책을 읽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실로 이쯤 되면 그 어떤 책도 한국어로만 쓰여져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에 빠진다.
그렇게 지난 한 해 수많은 책들을 (끝내지 못한채) 거치면서 분명히 깨달은 것은, 확실히 ‘읽는 행위’는 외국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문장의 구조를 눈으로 읽어내게 되고, 그것이 어느새 머리속에 각인되기 때문에 훗날에 내가 입으로 문장을 만들어 낼 때 훨씬 더 수월한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Tina Fey의 Bossypants이나 Lena Dunhamm의 Not That Kind of Girl 같은 자서전 느낌의 에세이는 쉬운 언어로 쓰여있어 내용을 쉽게 따라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 작가인 그들의 재치있는 필체까지 배울 수 있게 된다.
한 미국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도쿄에 사는 백인들이 모여 외국살이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한 금발의 영국미녀가 말했다. ‘이 곳에서 1년쯤 지내다보니 내 머리가 흑발이었으면 좋겠고, 코는 조금 더 작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내 얼굴은 너무 하얀것 같아…’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격하게 공감하기 시작했단다.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낯선 문화에 적응하며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그 사회의 규율과 기대수준에 맞춰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적응’ 하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나를 잠시 잃어버리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샌프란시스코는 아시안 인구 비중이 높아 도쿄의 금발미녀처럼 내가 어느새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싶다거나 코를 높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오래 산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말하고 사교적으로 행동하려는 나의 바람 역시 그녀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 나와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있는 친구들과 연락을 하는 것은 잠시동안 잊고 있던 나의 뿌리,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 내가 잘 했던 것, 그리고 미국을 떠날 때 나의 다짐을 상기시켜주는 시간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내가 정말 존경하던 차장님께서 나에게 당부해주신 말씀이 있었다.
그 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되 너 자신의 가치와 장점을 그것들과 타협하려 하지 말아라. 그리고 너만의 것을 만들어내라.
나는 어쩌면 평생 영어의 롤러코스터를 겪으며 살게되서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랑 같이 영어로 옹알이를 하다가 몇 년이 지나 여전히 혀는 짧아 발음은 못하지만 나보다 더 유창해진 영어실력으로 ‘엄마, 뭐라는건지 모르겠어’ 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의 아기 앞에서 여전히 좌절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장면은 내가 상상하는 인생의 최악의 악몽 중 하나이다.
평생 따라잡을지 모를지도 모르는 현지인의 영어실력을 목표로 하며 늘 좌절감을 겪느니 ‘나만의 무언가’를 찾아내어 그것 덕분에 사람들이 어색한 제스쳐와 함께 쏟아내는 나의 옹알이 영어 마저도 귀쫑긋하며 열심히 들을 수 있게 만드는게 진짜 현실적인 목표가 아닐까 싶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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