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으로 인해 도전을 망설이는 당신에게 (feat. 전직 금융맨)
직장인의 섬 여의도는 특별한 설렘과 동경을 일으킨다. 이곳의 밤은 어두움마저 세련되었다. 여의도 한가운데 늘씬한 오피스텔빌딩 허리에 자리잡은 션(가명)의 오피스는 이 도회적 야경의 일부인 동시에 근사한 전망대였다. 하루의 열기를 토해내고 차분히 식어가고 있는 수많은 빌딩들의 숲, 퇴근을 재촉하는 차들로 붉게 물든 마포대교, 달빛을 받아 넘실대고 있는 한강. 모든 광경이 선명하게 반짝이는 동시에 흐릿하게 추상적이었다.
빳빳하게 다린 하얀 와이셔츠의 가슴팍 포켓 안에 고이 간직된 직장인들의 퇴사의 꿈을 꺼내어 그려보라 하면 그게 바로 션의 새 오피스이지 않을까 상상했다. 적어도 이 광경이 션의 꿈의 모습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가설에 인증 도장이라도 찍듯 회의실의 통유리 너머로 그의 전 직장이 훤히 보였다. 한밤이라 그런지 빌딩 이마에 붙은 회사의 로고가 유난히 선명하고 위압적이었다.
20년간 한국 최고의 금융회사를 다닌 션은 내가 생각하는 쿨하고 똑똑하고 능력 넘치는 여의도 직장인의 표본이었다. 임원으로의 문턱에 들어서기 직전이었고,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첫째를 포함하여 세 명의 아이를 키우는 스윗한 아빠고, 조직 내 그의 직급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인재여서 할일도, 예쁨 받을 일도, 넘쳤다. 그렇게 완벽한 자리에 있어보이는 것만 같았던 그가, 별안간, 지난 여름, 모두에게 유난히 걱정이 많았던 2020년의 중심에서 (그리고 전 직장의 맞은편에서) 스타트업을 런칭한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는 데만 3개월이 걸렸어. 사장실까지 불려가서 퇴사를 재고해보라는 소리를 들었거든."
션이 푸어오버 스타일로 만든 커피를 나에게 건내주며 말했다. 나는 사약 한 사발처럼 진하게 가득 찬 블랙커피 앞에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쭉 들이켰다. 나의 방문이 그의 깊은 야근을 침범한 만큼 카페인을 함께 나누는 게 예의지 싶었다.
밤 9시 반,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새 사무실에는 오로지 설립자 션만이 야근을 강행하고 있다. 그의 모니터에는 아직 현재진행형인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깜빡이고 있었고, 그를 응원이라도 하듯 초록초록한 몇 그루 화분들과 갖가지 작은 운동기구들과 가족사진이 그의 자리 둘레에 서있었다. 하루종일 작업해오던 발표자료를 내가 오기 직전에 홀딱 날려버려서 다시 만드는 중이라고, 션이 부연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아무일 아니었다는 듯 그의 특유의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이다.
션답다 싶었다. 실제로 이 글을 쓰다가 방금 전 소프트웨어 오류로 모든 문장을 날려보고 처음부터 다시 쓰는 심정으로 말하는건데, 흔히 그런 상실을 겪고 나면 바로 너털웃음 지으면서 누구를 초대해서 커피를 나눌 만큼의 여유가 생기질 않는다. 나의 어린시절부터 지켜봐온 션은 늘 그랬다. 션은 나의 사촌오빠다. 어릴적부터 서글서글했고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집안 어른들은 그가 키 값 덩치 값을 한다고 좋아하셨고, 이모는 아들이 여기저기 많이 퍼주다가 손해 볼 것 같다고 걱정하셨다. 꼬마 사촌동생들은 재미있고 사람좋은 오빠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아, 이렇게 긍정적이고 대담한 사람이어야 큰 결정도 내리고 자기사업도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정말이지 그의 얼굴은 쓴 커피로 버티는 야근의 현장이 아니라 마치 일요일 오후 강원도 골프장에서 파란 바람을 맞고 서있는 것만큼 밝고 여유로워 보였다. 위로의 차원에서 이 솔직한 감상을 그대로 전달했다.
션은 말했다.
"나의 여유롭고 낙천적인 성격은 어쩌면 오히려 나한테는 극복해야 했던 과제였던 걸지도 모르겠어. 너는 예민해서 스스로 괴롭다고 느낄때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섬세하게 내면과 세상을 읽고 더 민첩하게 행동을 해올 수 있었지 않았을까? 내 삶에 후회는 없지만 내가 너무 멀리 돌고 돌아서 여기에 다다른 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어."
그는 야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내심, 심지어 회춘의 비결은 사실 지금 막 샘솟고 있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라 말했다. 그는 전 직장을 그만두고 잠깐의 짬이 생겼을 때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난 자신의 또래들을 많이 만났다. 기술쪽으로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옛 동료는 이제 E-commerce사업으로 포스트코로나 사회에서 활어처럼 뛰고 있었고, MBA까지 나온 친구는 방역사업을 시작해서 방역복을 입고 건물을 청소하러 다닌다 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은 적은 없으나 올해 만큼 가시적인 변화가 많았던 적도 드물었기에, 카멜레온처럼 변신하고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헤쳐가는 사람들이 더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션 자신 또한 약 1년 전부터 지인과 함께 준비한 이 사업도 마치 코로나를 예견한 마냥 헬스테크를 다루고 있고 그래서 개업이 무섭게 많은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게 되었다. 어느덧 의학 리포트를 한밤 중에 공부하고, 새벽에 골프미팅을 나가고, 대학생 인턴들과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흠뻑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나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변화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뜻할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변화의 세상 속에서 현상 유지는 더이상 안정의 보장이 아니라 오히려 고위험을 내포하는 선택 자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퇴사를 하고 창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선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션은 그것이 특별히 위험하거나 남다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흐름에 따른 것 뿐이었다. 그가 보여준 호기심과 행복한 얼굴은, 그래서 사업의 성공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변화된 시대에 발을 들인 것에 대한 설렘에 가까웠다.
션의 마음이 궁금했다. 수많은 야근과 출장, 부데끼는 회식들을 20년 넘는 세월동안 견뎌내면서도,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유연하고 순수한 마음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었는지.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 직장인 생활의 일명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임원직을 눈앞에 보장해놓고도, 회사의 3개월간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걸어나올만큼의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5년 전, 20대의 앨리슨은 자신이 남편도, 자식도, 대출이자도 없기 때문에 홀연한 마음으로 잘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굳건하게 3년의 공백을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곧 50대를 앞둔 션은 어린 앨리슨이 생각하던 '퇴사를 하지 못할만한 상황' 그 자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아내와 세명의 어린 자녀를 둔, 그리고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한 무수한 비용을 감당하는 가장이었다.
션은 바로 그 책임감이 용기의 원천이자 꿈의 시작이었다고 고백한다. 세 아이를 키움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세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변화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3년 전 귀하게 얻은 늦둥이 딸의 맑은 눈을 통해 미래를 조금 더 먼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수능 공부를 시작한 고등학생 아들과, 진로탐색에 한창인 20대 딸의 고민섞인 한숨을 통해 어떻게 하면 인생선배로서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으며,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응원해주는 아내의 사랑을 통해 그 사랑에 보답해줄 더 성숙한 사랑의 표현의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다. 그가 말하는 책임감의 구체적 얼굴은 꼿꼿이 서서 회색빛으로 무게를 버티는 집안의 기둥이라기 보다는, 희망의 빛과 더 넓은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집안으로 불어넣어줄 수 있는 맑고 탁트인 창문에 가까웠다.
우리는 미디어에 묘사되는 인물들의 특정 모습을 통해 자연스레 성공의 정의를 학습해왔다. 미디어 속 성공신화는 마치 탄탄하게 짜여진 영화 스토리와 같다. 영감을 얻은 시작이 있었고, 과정에 위기와 고난이 있었지만, 그것을 성장의 기회로 삼아 성공을 하고 경제적 사회적 부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 반복되는 서사의 구조다. 마치, '그 후로 왕자님과 소녀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라고 어린 왕자와 소녀의 남은 인생 전체를 '해피엔딩'으로 압축하여 강제 종료해버리는 구전동화처럼, 커리어 성공신화는 성공 뒤의 새옹지마와, 인생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사회적 개인적 변화가 커리어 트랙 위에 만들어내는 수많은 변주곡과, 성공 신화라는 타이틀을 따기까지의 희생과 어두운 면을 관찰하지 않는다.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을 이루기 위해, 혹은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 앓아야 하는 영속적인 긴장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첫사랑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 된다는 보장이 없듯,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훗날에 존재할지도, 새로운 길로 향할지도 모르는 법인데, 우리는 20대 내내 자아실현은 물론 사회적 성공까지 모두 가져다줄 단 하나의 평생 커리어를 찾아 헤맸고 그래서 더 고통스러워 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래 걸어온 길을 떠나 정상을 통과해 새로운 길로 이제 막 접어든 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는 커리어 탐색이 인생 전체에 걸친 여정이며, 인생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변화를 읽어내고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활동이며, 호기심을 잃지 않는 자세라고, 나에게, 그리고 그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선택을 통해 몸소 가르쳐주고 있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마치 커리어 탐색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처럼 20대를 조급하게 살았고, 30대 문턱을 넘자마자 지치고 말았다. 지난 날의 치열함에 후회는 없으나, 지금까지 커리어를 다뤄온 태도는 마치 저효율엔진처럼 연료만 많이 먹고 멀리 나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 변화를 꾀하던 도중 션을 만났다. 아니 그랬기 때문에 내가 션을 더 만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삶의 큰 변화를 자축하는 션의 생생한 에너지에 용기를 얻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편히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끊임없이 다음의 것을 쫓는 일도, 누군가가 써놓은 자격요건에 나 스스로를 꾸겨 넣는 것도, 이제 너무 지쳐서 회사를 내려놓았노라고. 얼마동안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되찾은 이 시간만큼은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 쫓는 사람이 아니라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그것이 "번아웃"이라는 마음 불편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단어 아래 숨겨온 나의 퇴사의 진심 어린 이유 였노라고.
그는 나의 "얼마동안일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조건부를 쓱쓱 지우며 조언했다. 시작하라고. 너의 민감한 눈으로 세상을 자유롭게 공부해보고 얼마든지 표현해보라고.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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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image: Ethan Brooke@seoulinspi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