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부부로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당신에게 (feat.벽지디자이너)
금요일 월차를 낸 새내기 직장인에게는 사실 회사 밖 어디든 그곳이 행복이고 여유였다. 커다란 창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이 주말의 어느 오후 햇살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고, 티 한잔과 아몬드 크로아상은 출근길에 매일같이 주문하는 아침 메뉴임에도 근사한 브런치 맛이 났고, 카페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랩탑 스크린 위의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손님들은 저마다 근사한 일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휴식이 의미있는 이유는 바쁨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금요일이 신나는 이유는 우리가 월,화,수,목요일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이 금요일이 그저 달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직접 쟁취한 전리품처럼 느껴져 더 뿌듯하고 감사했다.
지금 이 작은 카페에서 내 곁을 함께하고 있는 언니는 3개월의 안식기간, 그리고 형부는 5일의 휴가로 각각 길이는 다르지만 같은 빛깔로 이 “휴식”의 맛을 작은 아몬드 크로아상과 함께 공유하고 있다.
결혼 5년차인 이 부부가 함께하는 휴식은 개기월식 만큼이나 드물고 귀했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두 전문직에 있어 이 젊은 부부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충실한 자세로 임했고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했다. 비록 그것이 살을 부대끼며 보내는 젊은 시절과 달콤한 신혼생활을 희생을 요구할 지라도 말이다.
한국의 한 벽지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해온 언니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서울 외곽에 있는 공장에서 수시로 기숙사 생활을 해가며 벽지 디자인 및 생산을 감독해왔다. 처음에는 열정과 오기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관성처럼 앞만 보고 달려와보니, 어느새 수석 디자이너이자 거대한 디자인팀을 관리하는 차장이 되어 있었다. 회사는 언니의 10년 근속을 축하하며 순금 열쇠를 보내왔지만, 언니의 몸에서는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다. 언니는 회사의 스케줄에 무리가 갈까 걱정되어 몇 달이고 수술 날짜를 미루고 또 미뤘다. 다행히 수술은 심각하지 않았고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생애 첫 마취까지 해야했던 수술을 하고 난 뒤 회복실에서 몇 일 동안 시간의 공백을 마주하게 되면서, 더 이상 회사의 스케줄이 아닌 30대 중반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인생을, 누군가와의 인생의 파트너로서의 미래를, 그리고 오랫동안 묵묵하게 버텨주었던 자신의 몸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다.
언니가 병원의 작은 회복실에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형부는 캐나다 알베르타주의 깊은 숲 속에 위치한 베이스 캠프에서 인도출신 엔지니어가 현장으로부터 보내온 공장 설계 도면 위의 전기 회로 스케치를 수정하고 있었다. 10개월을 약속받고 파견온 캐나다 공장 건설 프로젝트가 어느새 1년을 훌쩍 넘긴 시점이었다. 대기업 건설회사의 전기 엔지니어인 형부는 언니와의 연애시절부터 이미 6개월이 1년이 되고, 1년이 2년이 되는 해외 파견 근무를 여러 해 겪었다. 그러한 해외 경험들을 통해 형부는 어느덧 영어도 유창하고 특수한 전문 분야에 정통한 한국의 몇 안되는 전기 엔지니어가 되었다. 하지만 결혼식 직전까지 묵묵하게 장거리연애를 참아주었던 아내를 홀로 두고 또 다시 해외에 나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캐나다의 혹독한 겨울을 이미 한번 거치면서 피부는 상하고 입술은 갈라져 피가 맺힐 만큼 건조해졌었다. 그 다음 겨울이 오기 전 한국에 돌아갈줄로 알았건만, 캐나다의 겨울은 다시 눈 앞에 성큼 다가왔다. 그 겨울을 마주하기 전, 형부는 늘 봄날씨로 머물러있는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이고 싶었다 했다.
서로에게 정답게 사진을 찍어주면서 따뜻한 커피를 즐기고 있는 언니와 형부를 바라보며, 10년간 한 분야를 파고 든다는 것, 혹은 한 회사에 오랫동안 몸담는 다는 것의 무게를 감히 상상해보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부부의 모습이 어쩌면 10년 후의 나와 내 남편의 모습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일곱살 차이나는 언니는 늘 나보다 한두발자국 앞서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대 나온 동기들이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못한 채 “취직”을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시작할 때 (혹은 “취집”을 택할 때) 언니는 순수 미술의 기술과 감각을 벽지디자인으로 승화시켰었다. 회사를 열심히 다니던 친구들이 결혼 때문에, 출산 때문에, 혹은 남편의 해외발령 때문에 퇴직을 할때에도 언니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지키며 승진을 거듭해왔다.
그렇게 나에겐 영웅이자 영감과도 같은 언니가 입원을 했을 때에도, 사표를 냈을 때에도 정작 그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회사에서 사표 수락 대신 휴직을 제안했다고, 보류되고나니 다시 고민을 하게 된다고 말하는 언니의 전화를 받았을 때, 주저없이 언니를 샌프란시스코로 초대하였다.
우리집 작은 침대방에 보금자리를 튼 언니는 매일 나의 출근길에 “돈 많이 벌어와”라는 인사를 보내고 저녁에는 보글보글 찌개를 끓여주었다. 눈코뜰새없이 바삐 움직이던 언니의 시계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같이 살적에 언니에게 상냥한 아침인사를 한 적도, 맛있는 음식도 잘 해준 적 없지만, 매일 바쁘게 돈벌러가는 나의 모습과 느린 하루를 보내고 있는 언니의 모습이 마치 주객전도 된듯 어색하게 느껴졌다.
1개월 반을 함께 지냈지만, 나는 아직도 언니가 왜 보류된 사표를 두고 그리도 고민하는지 알지 못했다. 퇴근 후에 머리를 맞대먹고 먹는 저녁 상 위에서 묻고 싶었다. 지난 10년간 착실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쌓아온 그 커리어가 이제는 여자로서, 결혼한 여자로서, 며느리, 아내, 그리고 미래의 아기엄마로서 하나의 “부담”이 되는건지. 그리고 그런 무게를 나도 언니 나이쯤에 느끼게 될런지. 하지만 그 질문 직접 하는 대신, 회사 새내기이자 신혼생활 중인, 여러모로 서투른 역할을 맡고 있는 나의 일상의 푸념과 투정을 털어놓았고, 언니는 반은 귀엽다는 미소로, 반쯤 가엽다는 표정으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3개월 가까운 시간을 보냈으면 지금쯤이면 마음 정리가 됐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고민이 많다 하길래 걱정이 많았어. 무엇이 그렇게 고민이 될까?”
내가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을 때, 형부는 특유의 다정한 말투로 언니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수줍음 때문인지, 속이 너무 깊어서인지. 언니는 또 그렇게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말투로 에둘러 대답을 했다.
“글쎄.. 내가 생각하기엔 ... 내가 그렇게 열정이 많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
언니가 마침내 속내를 드러낸 것은 몇 모금의 아메리카노와, 몇 갈래의 삼천포 및 말장난과,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은 후였다.
3개월 전, 회복실에 누워있던 언니는 자신의 그 10년의 여정이 마침내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판단했다. 한 때 자신을 강하게, 그리고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 길이었지만, 그 길 끝에 남은 것은 남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친 몸과 외로운 마음, 그리고 더 나은 매니저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울타리를 벗어나와 보니 마치 칠흑같은 줄 알았던 깜깜한 밤 하늘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많은 별들이 보이듯, 휴식의 나날들을 하루하루 보낼때마다 자신의 앞에 놓인 무수한 갈래길들을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했다. 심지어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던 회사와의 인연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가능성들에 견주어보아도 자신의 열정의 크기가 훨씬 작은 것 같아서, 자신의 역량이 그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에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두렵다고 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마음 크게 안도하였다.
언니의 망설임이나 걱정이 “여자라서” 하는 고민이 아니라서.
그리고 언니가 “막다른 길”이 아닌 “수많은 길”들 위에서 고민중이라서.
형부 잠깐의 머뭇거림 후 말했다.
“내가 어떤식으로든 의견을 표현하면 결정에 영향을 줄까봐 그동안 그냥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생각을 조금 이야기해볼게. 이 회사가 되었건, 다른 회사건, 아니면 심지어 봉사활동이건, 어디에서건 나는 내 아내가 행복하고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동안 열심히 일했고 정말 잘해왔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용기를 내보도록 해봐.”
나는 그 짧고 약간은 서툴었던 형부의 고백 속에서 한 인생의 파트너가 보내는 강한 응원과 지지를, 또 하나의 직장인으로서 보내는 존경을, 그리고 여자라서 하기 쉬운 고민들이 아내의 결심을 저해하지 않길 바라는 노파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언니는 그 응원이 맘에 들었는지 살짝 웃더니 형부에게 말했다.
“남편, 고마운데 난 내가 뭐하고 싶은지 아직 잘 모르겠어. 남편 작가 되고 싶다며. 내가 뒷바라지 해줄테니까 힘든 일 그만 두고 작가생활 시작해.”
“작가아-?”
평소 전형적인 공돌이 아저씨로만 형부를 생각했던 나는 엉겁결에 그렇게 외쳤고, 형부는 멋쩍은 웃음으로 나에게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요즘 글쓰는 재미에 좀 빠졌어. 작가로 살면서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도움을 준다면 참 보람차겠다, 그런 생각들을 요즘 종종 해봐.”
형부의 글쓰는 재미는 캐나다에서 시작되었다 했다. 해외라서 더 빛을 발하고, 해외라서 더 배울 수 있는 지식과 경험들이 쌓이고 있었다. 하지만 형부는 그것이 조금은 두렵다고 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뾰족하게 만들어진 전문성에 의해서 앞으로의 커리어가 정해질까봐서. 혹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그 모든 것들이 잊혀질까봐서. 음주도 허락되지 않는 춥고 낯선 캐나다의 숲 속에서, 두려움과 걱정을 잊고자 매일매일의 배움과 경험을 담은 일기를 쓰기 시작한게 어느새 100장을 넘어 이제 책 한권을 낼 수 있는 분량이라 했다.
언니는 그런 형부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부부는 이제 인생은 단거리 경주도, 마라톤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단지 사회인이 되기 위해 분주히 자격요건을 맞추고 회사의 문을 두드리는 20대의 치열한 취업 경쟁과, 실망과 성취감을 사이를 오고가는 매일매일의 직장생활에서 흔들림을 보듬어가며 성장해 나가는 30대 시절의 인내를 묘사하기 위한 임시적 미사여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각자의 일터에서 몇 천 마일씩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의 한 낯선 동네에서 인생의 파트너와 함께 보내는 게으른 늦은 아침은, 인생은 사실 그 어떤 달리기 경주처럼 잘 닦여진 길이 있는 것도, “피니쉬라인” 이라 쓰여진 팻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그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오히려 인생은 우리 앞에 놓여진 수많은 갈랫길을 보여주며 결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혹은 정반대로 막다른 길로 들어섰다 우리를 인도해서 없는 길을 새로 만들어내야 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리고 또 그렇게, 몇발자국 뒤에서 언니의 새로운 여정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여정이 언니 혼자가 아닌 언니의 곁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동반자와 함께하는 것이기에 더 기대가 된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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