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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May 08. 2017

영원히 젊은 사람, 에디나

in Barcelona


반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고 간 첫 번째 도시는 바르셀로나였다. 한 달 동안 마르 벨라_MarBella라는 바다 근처의 동네, 포블레누_Poblenou의 아파트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집주인은 브라질 출신의 멋쟁이였다. 수십 년 전에 바르셀로나로 이주해 온 에디나는 과거엔 댄서였고 현재는 채식주의자이고 '롤라'라는 늙은 개를 키웠다. 아침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부츠를 신고 슈퍼에 가서 자신을 위한 바게트 한 덩이와 롤라를 위한 닭 가슴살을 사 왔다. 후라이팬에 꼼꼼하게 구워진 닭 가슴살이 롤라의 밥상에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에디나와 아침을 함께 먹었다. 에디나는 동양인인 나를 배려하기 위해 커피 대신 차를 우려 내주고 바게트를 뚝 잘라서 나눠주며 먹는 법도 가르쳐줬다. 바게트 반쪽을 한 손에 쥐고 핫도그처럼 가운데를 칼로 갈라 그 사이에 올리브유를 듬뿍 뿌리고 토마토 슬라이스를 몇 개 넣으면 이상할 정도로 맛있는 아침밥이 됐다.

에디나는 영어를 거의 못했고 나는 스페인어를 거의 못해서 우리의 대화는 스무 개 남짓 단어의 나열. 내가 떠듬떠듬 문장을 만들면 에디나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해놓고는 내가 눈을 끔뻑거리다 웃음을 터뜨리면 따라서 폭소했다.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아니, 내가 알아들은 말은)


-

구아빠! 구아빠! (Guapa! Guapa!)


무엇을 이야기해도 그것들이 다 예쁘다(구아빠!)고 말했다. 에디나가 가장 이해 못하는 것은 집에 있는 것. 오늘은 더 이상 못 돌아다니겠다 싶을 정도로 지쳐서 10시쯤 집에 들어오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

노난, 무슨 일 있니? 아프니? 파티 갈 시간이잖아?


라고 물을 때면 '나 지금 이 도시와 내 청춘을 낭비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마음이 들었다. 에디나의 기대를 져버릴 수가 없어서 다시 지친 육신을 질질 끌고 나가서 바에 다녀온 날도 있었다.

사실은 내가 머물고 싶었던 곳, 나의 작은 방
에디나의 젊은 시절이 담긴 벽
베란다에서 보이던 멋진 건물. 건축가의 이름은 들었으나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이런 노력도 이 열정적인 브라질리안을 만족시키지 못했는지 어느 날 아침엔 에디나가 파티에 함께 가자고 했다. 아주 흥분한 목소리로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항구’ ‘브라질’ ‘피에스타’ ‘배’ 이런 단어들이 들렸다. 예쁜 옷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에디나는 2주 동안 다이어트를 할 거라고 했다. 술을 잔뜩 마시고 밤새도록 춤을 출거라고 했다.

그로부터 2주 뒤, 스페인어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집 앞 공터에는 에디나가 올 블랙 차림에 반짝반짝 비즈로 온몸을 감고 롤라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새빨간 립스틱. 찰랑찰랑 귀걸이. 구아빠! 를 삼창 했다. 부인들이 한껏 꾸몄을 때 풍기는 우아함이나 고급스러움이 아니라 에디나는 아가씨처럼 화려하게 예뻤다. 나를 보자마자 한 바퀴 빙글 돌아 보인 에디나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말한 거 같다)


-

빨리 올라가서 옷 입고 화장해!

한 시간 뒤가 피에스타잖아! 피에스타!


에디나를 만족시키고 싶어서, 야심 차게 구입한 원피스를 입고 아이라인을 굵직하게 그렸다. (할 줄 아는 유일한 화장이다) 그래 봤자 드레스와 하이힐로 한껏 멋을 부린 에디나와 그 친구들 앞에서는 풀 같은, 밭 같은 차림새였다.

버스를 타고 PORT VELL이라는 곳,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로 갔다. 파티는 어디에서 열리는 걸까 하고 두리번대고 있는데 에디나의 헌팅이 시작됐다. 에디나는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브라질리안 관광객들, 그러니까 젊은 남자 브라질리안들을 기가 막히게 꼽아내며 말을 걸었다.


-

브라질에서 왔지? 리우에서?

피에스타 안 갈래? 가자? 오늘 재밌을 거야. 응?
가자? 먹을 것도 많고, 춤도 추고 응?

가자? 바로 코 앞인데 가자? 응?
나도 춤출 거야. 이렇게! 피에스타!!! 가자 응?


에디나의 나이는 추정하건대 육십 정도. 하지만 나보다도 젊고 그 거리의 누구보다 생기 넘쳤다. 반복되는 에디나의 호객을 통해 나도 드디어 이 파티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브라질 해군들이 바르셀로나에 정박을 하는데 마침 그 날이 브라질의 국경일 같은 날이라서 바르셀로나의 브라질 이민자들을 모두 초대해서 큰 파티를 여는 것.

도착한 항구에는 커다란 배가 있었다. 네이비 색의 세일러복을 멋지게 입은 장교들이 인사를 했다. 럼에 흑설탕과 라임을 잔뜩 넣은 브라질 식 칵테일인 까이피리냐_Caipirina를 계속 갖다 줬다. 이때 처음 마셔본 이 칵테일은 지금까지도 좋아한다. 에디나는 신나게 춤을 추고 무대 앞을 뛰어올라가 플라멩코를 추고 신나게 자기 나라말로 떠들면서도 영어를 할 줄 아는 해군들을 하나씩 내 앞에 데려다줬다. 브라질 인들이 노는 모습은 도저히 따라 할 엄두도 나지 않는 쾌활함과 자연스러움과 리듬과 그루브. 뭐 그런 뜨거운 무엇이라 나는 흉내를 낼 시도도 하지 않고 구경을 했다. 내 앞에 있던 한 해군한테 다음에는 어디를 가냐고 묻자 이런 질문 수백 번 받아본 자연스러움으로, 그러나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쾌활하게 양 어깨를 으쓱, 모른다고 답했다.


-

해군으로 일하는 것이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오늘은 바르셀로나지만 내일은 어느 바다에 있을지 모르고

그다음 날은 어디에 정박할지 모른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즐기는 거야.


와. 진짜 폼난다. 그래서 다들 저렇게 열심히 노는구나. 내일은 어떤 바다에 있을지

모르니까!

잠시 정신을 차릴 겸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손목에 있어야 될 카메라가 없었다. ‘아. 아까 화장실 문에 걸어뒀었지.’ 싶어서 다시 가보니 카메라가 없다. 두리번대고 있자 에디나가 와서 무슨 일이 있냐 묻길래 카메라를 잃어버렸다고 답했더니 홍조를 띤 얼굴이 불같이 화를 냈다.


-

분명히 브라질인 일거야!!

카메라 가져가는 놈들은 브라질인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던 에디나가 조국을 욕했다. 여자 해군을 불러서 화장실에 같이 가서 현장검증까지 했는데도 없자,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래서 괜찮았다. 손목에 카메라가 없으니 관광객 같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의 사진이 하나도 없다. 인생에 다시없을 이벤트였는데 사진이 없네.

한참을 더 그렇게 춤을 추고 떠들고 불꽃을 쐈었나. 깜깜한 바다랑 하늘을 보다가 자정이 훨씬 지나서 파티가 끝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서로에게 볼 뽀뽀를 하고 난 브라질 사람들이 하나 같이 이렇게 말했다.


-

다음엔, 리우_Rio de Janeiro에서 만납시다.


에디나도 그렇게 말했고, 나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

다음엔, 리우에서 만납시다.


화려하고 신나고 모두가 취하고 춤추는 파티에 멋있는 해군들도 잔뜩 이었지만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일 아침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나는 해군들과 오랜만에 동포를 만난 이민자들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작별의 인사.


그날 밤, 에디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이 아프다며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걸었고 길에서 춤을 한 번 더 췄고 집에 다 와서는 토했다. 과음으로 오바이트 하는 육십 대 여성을 나는 처음 봤다.

에디나. 다음엔, 리우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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