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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May 28. 2017

테이블을 목에 걸고 여행하는 사람, 필립

in Marrakech


마라케시에서의 마지막 아침, 버스정류장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공항에 가냐며 말을 걸었다. 몇 마디 나눠보니, 독일인 필립은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세비야로 가는 길이었다. 마라케시 닷새 만에 세비야 향수병이 어마어마했던 나는 동향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아아, 노를 저어서라도 가고 싶은 세비야여. 필립은 무언가 엄청 무거워보이는 것을 들고 있길래 뭐냐 물었더니, 테이블이라고 했다. 두껍고 둥그런 돌에 모로칸 스타일의 모자이크 장식을 한 화려한 티 테이블. 지름이 60cm 정도에 언뜻 봐도 10kg은 넘어 보였다. 바닥에 내려둔 검은 봉지도 필립의 것이었는데 그 안에는 모로칸 티 포트_tea pot까지 들어있었다. 보통의 여행자들이 여행지에서 ‘이거 집에 가져가면 정말 좋겠다!’라며 탐을 내지만, 돌아가는 길의 복잡한 여정 때문에 망설이다 포기해버리는 '무겁고 크고 깨지기 쉬운' 것들을 필립은 실제로 사버리는 사람이었다. 87년생, 이 어린 청년의 여권은 수많은 낯선 아프리카 나라들의 비자와 스탬프로 너덜너덜해진 상태. 딱 한 페이지 남은 빈 공간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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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한 장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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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쓱) 그렇다니까.


필립은 자연을 좋아해서 아프리카 곳곳의 산을 찾아가 하이킹을 한다고 했다. 또한 무슬림 문화를 몹시 좋아해서 저번에 모로코를 방문했을 때는 찻잎만 3kg을 사 갔다고. 이제, 티 테이블과 티 포트와 티, 완벽한 티타임을 위한 3박자를 고루 갖췄으니 자기 방에서 매일매일 민트 티를 끓여 마실 거라고 했다. 여기까지라면야, '이 청년이 차를 참 좋아하는구나. 그래, 인생에서 한 가지 정도는 몰두할 것이 필요하지. 그건 중요한 거야.' 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지만 필립은 (역시나 매우 무거워보이는) 배낭을 맨 어깨를 으쓱하며 이 안에는 모로칸 뚝배기인 ‘따진_tagine'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 복잡한 마라케시의 골목시장에서 여행객의 99%가 따진을 파는 가게를 기웃거렸지만 그 중 따진을 직접 사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필립이 샀네. 아, 쇼핑광인가. 무거운 물건 광인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따진. 모로코 요리에 자주 사용되는 뚝배기(이자, 요리 이름 그 자체) 고기와 감자 등을 통으로 넣고 푹 끓여도 타지 않고 부드럽게 요리가 된다고 했다.
바로 이런 느낌. 이것은 치킨 한마리가 통으로 들어간 따진이었다.

대부분의 저가항공사들은 비행기 티켓 값이 싼 대신에, 기내물품 10kg 이하, 가방은 1개 이하라는 엄격한 기준이 있는데 내가 마라케시에서 만난 배낭 여행자들은 이 기준의 두 배 이상을 넘기는 짐을 가지고 있었다. 아냐의 가방은 3개였고, 총 26kg였다. 초저가 항공을 골라 타는 배낭여행자들이 추가 비용을 지불할 리는 없다. 이들이 알려준 통과방법을 공유하자면, 커다란 배낭 한 개에 짐을 10kg까지 쑤셔 넣고, 나머지는 모두 주머니에 넣는다.옷에 붙어있는 주머니. 손 넣고 핸드폰 넣으라고 만든 그 주머니. 마라케시에서 흔히 파는 넉넉한 고무줄 바지에는 커다란 주머니가 달려있는데, 그 바지를 사서 입고 그 주머니에 청바지도 넣고 부츠도 넣는다. 들어간다. 골 때린다. 바지 주머니가 꽉 차면, 점퍼 주머니에도 넣는다. 옷의 주머니란 주머니에 다 쑤셔 넣는다. 가방에 넣고 타면 걸리지만, 몸에 붙은 주머니에는 몇 kg을 넣어도 잡아낼 수 없는 항공사 규정.

바로 이런 바지. 양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허리춤의 끈을 바짝 조여매야 한다.


그래서 필립은 10kg짜리 테이블을 커다란 에코 백 같은 가방에 넣어 목에 걸고 그 위에 재킷을 입었다. 일종의 목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안 무겁냐고 물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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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클럽에 있다고 생각하면 돼.


흔들리는 버스, 내 옆자리에 앉아있지만 동시에 헬스클럽에 있기도 한 필립이 향후 일정을 말해줬다. 마라케시에서 세비야로 간 후, 세비야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다시 세비야 공항으로 가서 바르셀로나 근처 도시인 지로나_Girona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지로나 공항에 다시 가서, 프랑크푸르트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홈 인 하는 일정. 목에 테이블 목걸이를 걸고 이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여정을 하는 거다. 내 일 아니라 남 일이라서 일단 웃음부터 나길래, "도대체 왜 그런 일정을 잡은 거니?"라고 물어봤더니 이 모든 일정이 라이언 에어의 저가 항공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했다. 내가 세비야에서 마라케시에 오게 된 것처럼 필립도 초특가 항공권을 검색하고 검색해서 그런 표들을 사서 연결연결했더니 이런 여정이 나왔다고.

마라케시에서 세 번 비행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데 총 11유로(110유로가 아니다)가 들었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80km 떨어진 자기네 집에까지 가는데 드는 비용은 130유로. 독일의 물가는 미친 듯이 높다며 무표정하게 욕했다. 그렇게 욕하길래 당연히 130유로를 내고 버스를 타는 줄 알았는데 필립은 엉뚱 맞게도 자전거를 탈 거라 했다. 여행을 시작할 때 이미 그렇게 공항에 왔기 때문에 공항에 자기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고.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마라톤 여정에 듣는 내가 숨이 가쁘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땅에는 눈이 소복히 쌓인 프랑크푸르트의 고속도로 위를, 등에는 뚝배기가 든 10kg 배낭을 메고, 자전거 왼쪽에 붙은 가방엔 10kg 돌 테이블을 넣고 5시간을 달릴 것이라 했다. 나는 잠시 그 장면을 상상했다. 왼쪽으로 45도쯤 기울어져 달리겠군. 입고 있는 재킷이 얇길래 안 춥겠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페달 밟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춥지 않을 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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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마, 이 세상을 너의 헬스클럽화 시키지 마!


하지만 한참 웃었다. 청춘의 호기로움과 건강함에 감동했다. 목에 돌을 건 필립이 당당하게 짐 검사를 통과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한 시간 연착된 비행기를 함께 타고 세비야로 왔다. 그 무엇에도 당황하지 않던 필립이 세비야 공항에 락커가 없다는 사실에 무표정을 해제하고 당황하길래, 그리운 나의 노란 집에 어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필립의 남은 여정이 고작 코인 락커의 부재로 어긋나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집에 데리고 가서 배낭과 테이블을 던져두고 반나절 세비야 투어를 시켜줬다.

오후 3시의 세비야. 햇빛이 내리쬐는 고요하고 다정한 나의 도시. 아침부터 계속 굶었으니 양이 많은 메뉴 델 디아_menu of the day를 먹자고 하자 필립은 메뉴 델 세마나_menu of the week도 다 먹을 수 있다며 독일 농담으로 대답했지만 190cm 장신의 젊은이는 결국 닭고기 몇 점을 남겼다. 메뉴 델 디아의 위력이 이 정도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 자연을 좋아하고 경제적인 스쿠터를 타는 반듯한 청년, 필립의 직업은 교회의 파이프오르간 연주자. 모로칸의 폐쇄적 문화에 대해 말하다가 독일에서는 자식이 결혼을 하든 말든, 몇 번을 하든, 게이든 말든, 뭘 해 먹고살든 부모는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하길래 세계에게 가장 독립적인 인간이야말로 독일인 같다고 말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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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란드가 있잖아.


아, 히딩크의 홀란드가 독립국이었구나. 언젠가 지리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필립은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처럼 지도 한번 본 것으로 세비야 도착 30분 만에 세비야 지리에 나보다 능숙해져 사거리에서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망설이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홀로 공항버스를 타러 나섰다. 끝까지 대단하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나는 문득문득 필립이 지금은 어디쯤을 가고 있을까 상상하며 혼자 키득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민트 티를 마실 때마다 필립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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