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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병우 Jun 28. 2024

가을이와의 첫 만남

가을이는 나와 함께 사는 강아지다. 소위 반려견. 강아지를 데리고 온 후 가족 내에서 이름을 공모했는데 우리 딸이 가을의 문턱에 데리고 왔으니 가을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당첨된 이름이다.


2021년 12월 21일 서울에서 기차로 황간을 내려왔다. 그해 2월 우리 산에 산불이 나서 6~7ha의 면적이 불에 탔다. 우리 산에서 송이버섯이 난다는 소나무 숲에도 불이 나서 송이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은 한번 내려오면 1~2주를 머무는데 마침 연말이라서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영동산림조합에서 산불피해지역 조림을 지원해 준다는 연락을 받고 당일치기로 다녀오게 되었다. 


영동에서 산림조합 방문을 마친 뒤 사발이(2003년식 4륜구동 봉고프런티어)로 4번 국도를 진입하기 위해 좌회전을 하는데 웬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트럭 앞으로 달려들었다. 마침 신호를 받아 좌회전하던 중이라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다행히 강아지를 피해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어쩐 일인지 그날따라 주머니 속에는 강아지 간식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큰댁 마당 뜬장에 갇혀 지내던 강아지에게 주려고 가지고 있던 강아지 간식이 우연히 주머니 속에 있었나 보다. 교차로 한편에 차를 세우고 주머니 속의 간식을 꺼내 들고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키는 2~30cm에 갈색 털이 어지럽게 떡진 갈색 강아지였다. 


낯선 사람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집 나온 강아지들의 습성일 텐데, 뜻밖에 이 녀석은 나에게 다가와서 내 손에 있는 간식을 덥석 받아먹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고모님 댁에 머물고 있는 중에 이 녀석을 만났으면 고모님 댁으로 데리고 가서 임시보호라도 할 텐데, 그날은 볼 일만 보고 올라가려고 왔던 것이어서 서울행 기차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영동군청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여기 교차로에서 위험하게 강아지가 배회하고 있으니 와서 데려가 달라고.. 그랬더니 지금 당장 구조하러 갈 수는 없고 나중에 포획틀을 설치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차량 통행도 비교적 많고, 차들이 시속 80km로 달리는 국도변인데 이대로 뒀다가는 지금처럼 지나가는 차에 달려들어 로드킬 당하기 십상이었다. 


포인핸드 앱을 찾아보니 영동군의 유기동물보호센터는 최종주동물병원이라고 나와 있길래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유기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잡아서 그리로 데려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전화를 받은 아저씨는 위치를 알려주며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주변을 맴돌던 녀석에게 간식을 또 보여줬더니 경계심이 별로 없던 이 녀석이 손쉽게 내 손에 잡혔다. 


그놈을 일단 사발이 조수석 발치에 올려놓고 반대편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차를 출발시키려는 순간 바닥에 있던 강아지가 폴짝 뛰어올라 조수석 의자 위로 올라오더니 운전석에 앉아있는 내 무릎으로 와서 떡 하니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꽤나 오랜 시간 집 밖을 돌아다녔는지 털은 길고 떡진 데다가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개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동물병원까지 가는 10여분 내내 강아지는 그 냄새를 풍기며 내 무릎 위에서 균형을 잡고 여유롭게 앞을 내다보며 드라이브를 즐겼다. 이 녀석이 차를 한두 번 타 본 솜씨가 아니었다. 운전하는 주인의 무릎에 앉아서 많이 돌아다녀 본 놈인 듯했다. 


동물병원 앞에 차를 세우니 안경 쓴 아저씨가 밖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나를 맞이한다. 알고 보니 이 분이 수의사선생님이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유기견으로 등록할 사진을 한 컷 찍은 후에 강아지를 맡기고 나는 나의 일정대로 서울로 돌아왔다.


<사진 1> 2021년 12월 21일 스쳐 지나간 인연

그 녀석을 유기견보호센터에 맡기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 녀석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가족들에게 이러저러하게 길에서 강아지를 만나 유기견보호센터에 맡기고 왔는데 그 녀석이 계속 눈에 밟혀서 얘를 데려다가 키웠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집사람은 내가 시골에서 키우겠다고 하면 말리지 않겠다고 했다. 아들의 반응은 잘 기억나지 않고, 딸은 갈색 푸들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나를 응원했다. 사실상 이때 이미 나는 이 녀석을 입양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내 맘대로 '써니'라고 이름까지 지었다. 


연말에는 11월에 돌아가신 장모님 49재를 지내고, 2022년 새해 차례도 지내고, 내 생일까지 지낸 후, 1월 4일 다시 시골로 내려오는 길에 입양을 최종 결정하기 전, 한번 더 써니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영동 동물병원에 들렀다. 갈색 푸들을 데리고 왔던 사람인데 잘 있는지 한번 보고 싶다고 했더니 수의사선생님은 봐서 좋을 것이 없다며 딱 잘라 거절해서 그날은 얼굴도 못 보고 돌아 나왔다.


당시 내가 시골에서 머물던 곳은 우리 고모님 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모님의 시부모님이 사시던, 즉 고모님의 시댁이었다. 시부모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고 빈집 상태였지만, 그 집을 내가 차지하고 있으니 고모님도 시댁 조카들에게 눈치가 보이는 상황인 듯하여 나도 조만간 우리 산 밑에 농막이라도 하나 지어서 거처를 옮길 계획이었다. 


내 집도 아닌데 내가 개까지 데리고 고모님 댁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써니를 입양하려면 빨리 농막을 지어야겠기에 근처의 컨테이너 하우스 제작 업체, 농막 판매 업체, 농막 제작 업체 등등을 방문하면서 농막 건축 상담을 진행했다. 몇 군데 알아보니 농막정도는 한 달이면 충분히 지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드디어 1월 10일 써니를 입양하기로 결심하고 동물병원을 찾아가서 본격적인 입양 상담을 했다. 수의사선생님은 푸들이라는 견종이 머리도 좋고 사람을 잘 따르기 때문에 기르기 어렵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며, 입양을 결정하기 전에 건강검진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써니를 데리고 나와서 피를 뽑아 검사를 했다.


잠시 후 피검사 결과를 놓고 선생님께서는 어두운 얼굴로 이 아이는 심장사상충에 감염되어 있고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심장사상충은 혈액 속에 기생하는 기생충으로, 치료를 한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치료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수의사로서 강아지의 입양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당황한 나는 써니의 입양을 포기하고 동물병원을 황급히 빠져나왔다.


몇 주 후 포인핸드 유기견 공고 써니의 페이지에는 국화꽃 아이콘과 함께 '자연사'라는 표시가 떴다. 


그로부터 계절이 두 번 바뀌어 7월 초에 시작한 농막 공사가 끝나고 드디어 8월 15일 농막에 입주한 첫날, 동네 하나로마트에 갔다가 경동건축 김사장님을 우연히 만났다. 김사장님은 고모님 댁에 살던 시절 이곳저곳 집을 손 볼 때 도움을 많이 주셨던 분이다. 농막 지을 때는 정화조 공사를 부탁드렸었다. 정화조 공사를 할 때 농막을 다 짓고 나면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다 키울까 한다고 내가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화북에 있는 처갓집에서 키우는 사냥개가 새끼를 낳았으니 한 마리 데려가려면 지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그 길로 김사장님을 따라나섰다. 


차로 1시간 남짓 걸려서 속리산 자락의 김사장님 처갓댁에 도착해서 보니, 처갓댁에서는 '여연'이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새끼를 낳은 사냥개는 하운드종으로 부모견은 키가 5~60cm에 체중은 2~30kg이 족히 되어 보이는 대형견이었다. 새끼들이 지금은 작고 귀엽지만 불과 몇 개월만 지나면 저 정도 크기에 펄펄 날아다니는 사냥개가 될 텐데 저질 체력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될 것 같았다. 


다른 개도 여러 마리가 있으니 보고 데려가라고 하셔서 둘러보다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꾀죄죄한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짖지도 않고 별 경계심 없이 다가와서 꼬리를 흔들었다. '그래. 이 놈으로 하자.' 당시에 나는 내가 가을이를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혹시 이 녀석이 나를 집사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진 2> 비닐하우스 안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나의 선택을 받은 가을이

카페여연의 사장님 말씀이 얘가 지금은 이래 보여도 2살가량 된 수컷 비숑인데 당신이 대구에서 애견미용실을 할 때 실습견으로 데리고 있던 아이라고 했다. 사람을 잘 따르고 식성도 까다롭지 않아 아무거나 잘 먹는데, 다만 묶여 있을 때 빙글빙글 도는 습성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그놈을 데리고 농막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김사장님을 갑자기 따라나선 것이어서 농막에는 강아지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단 뭔가를 먹여야 하겠기에 돌아오는 길에 하나로마트에 들러서 사료를 한 봉지 사서 줬지만 낯선 환경에 긴장했는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일단 농막 밖 한쪽 모서리에 말뚝을 박고 녀석을 묶어 두었다. 그렇게 하루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잠자리에 들려고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벽 1시쯤이었을까,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농막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족히 시간당 3~40mm는 될 법한 엄청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때는 달랑 농막만 완성되어 있던 터라 문을 열고 나가면 임시로 만든 발판이 놓여있고, 발판을 내려가면 바로 흙바닥이었다. 


당시에 나는 '사람은 집에, 개는 마당에'라는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개집도 준비되지 않았기에 밖에 묶어둔 이놈은 이 장대비를 그냥 맞고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그냥 쌩으로 비를 맞게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산을 들고 밖에 나가 보니, 가을이는 기초석과 농막 바닥 사이 좁은 틈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딱 오늘 하루만 실내 취침을 허용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녀석을 농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일단 수건으로 젖은 털을 대충 닦아주고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자리를 잡아 줬다. 사고를 치면 바로 제지할 수 있게 화장실 문은 반쯤 열어 놨다. 하지만 밖으로는 나오지는 못하게 대충 박스로 문 앞을 막아 놓고 잠이 들었다.


농막에서의 첫날밤을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주 잘 잤다. 일어나자마 강아지부터 살폈다. 화장실 안에 얌전히 엎드려 자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어디를 물어뜯거나 어질러 놓은 것도 없이 얌전히 잘 잔 듯하여 안심이 되었다. 내가 화장실 앞으로 다가가니 빨딱 일어나서 화장실 문 앞에 앉는다.


<사진 3> 화장실에서 자는 가을이

이렇게 가을이와 나의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진 4> 카페 여연의 인스타그램을 뒤져서 찾은 가을이의 화양연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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