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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worker Dec 16. 2024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말하기 전에

냉소를 뛰어넘는 집회의 가치 

귀에는 들리지 않고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깃발 하나를 두고, 집회 참여자들을 “민주시민인 척”하네 마네 하는 포스팅을 보았다. 그 얘기를 듣자니 묘하게도 귀밑선이 시큰하다. 심드렁해진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게 있다. 시위나 집회는 패션쇼 무대처럼 하나의 원칙 아래 모든 룩이 통일되는 자리가 아니다. 매 시즌 디자이너들이 저마다의 콘셉트를 펼쳐놓듯, 집회장도 갖가지 색깔과 생각이 뒤섞인 광장이다. 그 중심엔 선동인지, 신념인지, 혹은 그저 구경꾼인지 모를 다양한 이들이 윙윙댄다.


그런데도 “집회 = 무비판적 선동, 그저 목소리 키우는 군중”으로 가볍게 단정 지어도 되는 걸까? ‘유행’이란 이름 아래 자칫 심심한 평범함을 밀어내는 패션계처럼, 정치도 숱한 목소리가 얼룩덜룩하게 뒤섞여야 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딱 잘라 말하기도 힘들지만, 설령 과격하거나 불편해 보이는 주장도 필요한 자리에선 존재감을 펼쳐야 민주주의가 돌돌 굴러간다.


‘윤석열이 잘못 많다, 하지만 반대편은 더 경계해야 한다?’—이 말이 가지런히 정리돼 보이긴 한다. 당연히 어떤 누군가에게는 대통령 비판이 성급한 노이즈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곪아터진 현상에 대한 피가 묻은 창 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쪽도 쉽게 “선동당했다”라고 몰아가기엔, 이게 바로 사실상 우리의 민주 정치판이다. 폭넓게 의견이 교차하고 서로 부딪히는 이 ‘잡음’ 자체가 가끔은 건전한 증거가 된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면 그건 이미 죽어버린 사회다.


물론 우리나라 정치인들 대다수가 그물에 걸린 고기들처럼 공약을 먹다가도 권력 유지를 위해 이합집산하는 모습, “이판사판, 저판사판” 하는 꼬라지를 지켜보면 회의감이 드는 건 충분히 이해된다. 신기한 건 그렇게나 욕먹어도 정치판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시민이던, 샤넬 재킷에 흑백 논리를 두른 사람이건 간에, 결국 투표하러 간다는 점에서다. 패션도 유행이 돌고 돌 듯, 정치에 대한 시선도 돌고 돈다. 냉소와 환멸 뒤에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선거와 투표, 그러니까 ‘시민의 선택’이라는 주사위를 굴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과거 성군’이라 불리는 왕들과 현대 정치인을 나란히 늘어놓는 건, 런웨이의 턱시도를 그대로 출근룩으로 입고 가도 좋겠다는 식의 이상론 아닐까. 정조와 세종은 말 그대로 절대 권력을 쥔 ‘왕’이었다. 오늘날 지도자는 헌법 위에 선 왕이 아니라, 선거와 의회, 시민단체 등 고만고만한 이해관계 속에서 표류하는 배의 선장에 가깝다. 절대군주 시대의 애민정신이 현대라고 왜 없겠나. 조금 더 복잡해졌을 뿐, 모든 지도자가 “권력만 탐한다!”라고 치부하기엔 아직 우리 민주주의는 숙성되지 않은 면도 동시에 있다.


모든 걸 흑과 백, 이거나 저거나로 보지 말자고 하면서도, 정작 현장에 뛰어든 수많은 목소리를 “선동된 민주시민 코스프레”로 몰아가는 건 난센스다. 민주주의는 니트 스웨터처럼 쫙 늘어나서 다양한 몸을 감싸야 한다. 한 치수 작은 옷으로 사람들을 죄어놓으면 결국 옷은 터지기 마련이다. 집회든 SNS든, 세상의 잡다한 의견과 에너지가 모이는 데서 민주의 근육이 자란다.


냉소는 번쩍일 수 있지만, 오래 빛나긴 힘들다. 정치인을 향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더라도, 끝내 우리가 바꾸고 싶다면 발품 팔아야 한다. 비판도 토론도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나 각자 좁쌀만 한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세상이지만, 그 좁쌀들이 뭉쳐 폭넓은 민주주의를 이룬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냉소 대신, 우린 뭐든 불합리하고 답답하다 싶으면 아우성을 치고, 참여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결국 민주시민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건 ‘앉아서 훈계하기’가 아니라 ‘발로 뛰는 참여’다.


그러니까 집회 깃발에 새겨진 누군가의 진의가 껄끄럽다면, 그걸 언론이 덜 다룬다는 이유로 집회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스스로 다른 목소리를 내보는 건 어떨까. 괜히 냉소가 멋져 보인다고 입에 물고만 있으면 주인공은 언제나 남이 된다. 패션은 어떤 옷을 입느냐가 아니라, 그 옷을 어떻게 ‘내 식으로’ 소화하느냐가 관건이다. 정치도 마찬가지. 비판적 사고를 진짜 무기로 삼고 싶다면, 내가 주장하고픈 내용을 제대로 발화해야 한다. 그래야 이 혼돈의 민주주의 무대에서 각자의 메시지가 서로 공존하면서, 조금씩이나마 발전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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