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봄동이 나온다는 것은, 기나긴 추위가 끝나고 드디어 푸릇한 봄이 온다는 신호였다. 이름부터가 '봄' 동 이라니, 어감과 제철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생김새가 소똥모양이라 '봄똥'이라는 어원을 듣고는 많이 웃었지만, 그래도 봄동은 나에겐 봄이었다. 그래서 요리는 잘 못해도 봄동이 나오면 조금이라도 사와 겉절이를 해 먹었다. 맛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봄동이 주는 그 봄의 신호가 그저 좋았다. 나는 그렇게 봄동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꼈다.
여름만 있을 것 같은 두바이에도 겨울이 왔다. 비록 6개월이 넘는 헬썸머를 지나왔지만,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빼고는 더운기가 싹 가신 22도의 아침이 드디어 왔다. 한국의 초가을을 닮은 두바이의 겨울이 괜스레 반갑다.
두바이 겨울 하늘
한국에서야 뚜렷한 사계절덕에 환절기마다 계절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이 무의식적으로라도 느껴졌지만, 두바이에서는 달랐다.
하루하루는 참 더디게 가는데, 아이고 덥다 하다가 이제 좀 살만한 계절이 왔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이미 1년의 거의 끝 11월이 되어있었다. 더 덥거나, 혹은 덜 더운 계절만이 존재하는 두바이에서는 이렇게 겨울이 되어서야 계절의 변화가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아이들 감기만 아니라면, 항상 무언가 리셋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환절기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참 아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두바이에서 나만의 계절감을 찾는다. 바로 두바이 제철식품에서.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것도 아니면서 무슨 제철 식품인가 싶겠지만, 이곳에도 제철 과일과 제철 채소가 있다. 비록 모두 수입산이지만, 북반구의 여름과 겨울, 남반구의 여름과 겨울의 과일들이 각각의 제철에서 잘 여물어 이곳에 온다. 그리고 나는 세계 각지의 제철 과일들에서 두바이식 계절을 느낀다.
11월이 되자, 한 여름동안 꽤 맛있었던 미국산 여름 복숭아 맛이 이제 덜하다. 그렇게 한국의 백도를 닮은 미국산 여름 복숭아의 계절이 갔다. 대신 등장한, 명절에 숟가락 하나 들고 퍼먹던 홍시를 떠올리게 하는 스페인산 단감에 맛이 들었다는 것은 온전히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고작 기온 몇 도 내려갔다고, 소파에서 담요 덮고 무한도전 보며 끊임없이 까먹던 제주도 귤이 생각나는지 남아프리카 귤에 자꾸 손이 간다. 한동안 꽤 시더니 이제 좀 달아졌다. 그리고 드디어 마트에서 미국산 딸기의 가격이 내려갔다. 겨울이 왔다는 신호다.
즙이 뚝뚝 떨어지는 설향 딸기는 없지만, 근육 딸기라고 우리끼리 부르는 단단한 이 딸기도, 1년 내내 매대에서 밍밍한 맛을 내다, 겨울에는 맛이 꽤 딸기맛답다. 나는 봄동을 보며 봄을 느끼던 한국에서의 나처럼, 두바이에서도 계절을 느끼며 살고 있다.
더운 날 반, 따뜻한 날 반인 두바이에서 이렇게 계절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매일 멈추어있는 것 같은 두바이의 시간이 꽤 빠르게 느껴진다.지금쯤 한국에서도 맛있는 감이 아주 잘 익었겠다.겨울딸기가 아직은 꽤 비쌀 테지만, 딸기 생크림케이크가 곧 온 매장에 가득할 그날이 곧이겠지. 생각만 해도 그 하얗고, 코끝을 스치던 한국 12월의 한기가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제철 과일들을 보며, 한국의 시간과 두바이의 시간을 빗대어가며 셀프로 환절기를 즐긴다.그것이 내가 시간을 세어나가는 법이다.참 부질없다. 살면서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 조차도, 비행기로 몇 시간 떠나왔다고 이리 소중해지다니. 당연한 것 같았던 사계절마저도 말이다.
아쉽지만 한국 제철식품은 두바이에서 가격이 아주 높아,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아 스페인 단감으로 대신한다. 하지만 봄동이 한번 등장해 준다면, 한국의 봄을 추억하며, 가격이 얼마든 조금은 사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