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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연 Sep 13. 2018

어떤 마음에서 서는 거야?

여성의 성욕은 생존과 맞설 뿐

*이 글은 안희정 재판 즈음에 썼습니다.


나는 죽었다.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지만, 시민으로서는 죽었다. 단지 여성으로 태어난 탓에. '젠장! 안희정 무죄 판결한 조병구 판사 내가 죽인다! 어차피 노래방 화장실에만 가도, 걸어다니기만 해도 , 애인과 헤어지기만 해도 죽는데, 그러느니 너 죽이고 천당이든 지옥이든 어디든 가겠다' 싶은 마음으로 분노에 휩싸여서, 그러나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어제 오늘을 꾸역꾸역 잘 버텼다. (관련 기사: 권김현영, [세상 읽기] 안희정과 재판부가 유죄다, 한겨레신문, 2018.08.14)


애인은 나의 분노를 먼저 알아채주었고,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한 나절 일찍 만났다. 잠시 분노하다가 맛있는 음식을 포장해와서 심신안정을 도와주는 가족주의 디즈니 영화 <코코>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만화영화의 주인공 아이는 금지된 영역을 탐했고, 반대하는 어른들에 맞서 자신을 찾아갔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는 감미로웠다. 에어컨을 열대야 모드에 맞추고 이불 위에 누웠다. 오랜만이었다. 애인 옆에 누워 잠을 자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


등을 맞대거나 애인 배에 손을 올리거나 애인의 팔을 껴안고 상대의 들숨과 날숨을 느낀다. 안전하게 잠든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분위기가 섹스로 흘러가면 안전한 느낌은 저 멀리, 오묘한 자기혐오에 휩싸인다. 섹스가 싫은 건 아닌데, 내가 느끼는 성욕에 자꾸만 다른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이를 테면 김지은 씨가 정조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느껴야만 했을 복잡한 감정 같은 것.


내가 무성욕자인가? 라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애초에 누군가를 먼저 열렬히 좋아한 적도 없거니와 좋아하더라도 성욕을 느끼지 못했다. 대놓고 섹스 어필하는, 웃통을 벗고 팬티를 치골에 걸친 남성 모델의 화보를 보아도 성적 판타지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가 잘록하고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한 여성 연예인을 보며 섹시하다고 느꼈다. 이처럼 여성이 남성적 시선에서 여성에게 욕망을 느끼는 상황을 요즘 말로 '없던 것도 서겠네'라고 표현하는데, 처음 듣고는 '이거다!' 싶었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통찰이 담겼기 때문. 생물학적으로는 없어도 사회적으로 요구된 페니스(가부장적 질서에 따른 욕망)가 나에게 심어져 있던 것이다.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본 적 없으니, 남성의 시선을 빌려야만 비로소 욕망할 수 있었다.


그 심각성을 깨달은 사건이 있다. 페미니즘을 접하고 처음으로 여성을 위한 자위 안내서를 읽을 때였다. 자신이 성욕을 느끼는 상황을 상상하라는 말에 내가 어떤 때 성욕을 느끼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청소년기에 뇨기를 느끼거나 꽉 끼는 옷을 입어 유사 자위로 이어질 때(굳이 돌려 말하는 이유는 그때 난 그것이 자위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떠올린 건 강간 당하는 장면이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시선에 길들여졌기에 자신이 강간 당하는 장면에서 성욕을 느낀단 말인가. 명예 남성 나 자신이 너무 속상하고 부끄럽고 가여워서 펑펑 울었다. (지금은 강간 당하는, 또는 유사한 장면을 보거나 상상하기만 해도 숨이 막하고, 실질적인 공포를 느낀다.)


보수적인 가정환경은 페미니즘이라는 빨간 약을 먹은 후에도 스스로의 성욕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 첫 애인을 사귀자 엄마는 하루에 너다섯번씩 너 자고 다니지 말라 말했다. (거의 '퀴어'하면 항문섹스를 제일 먼저 떠올리는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약속 있다며 밖에 나갈 때마다 이런 얘기를 했다.) 하루는 내가 엄마 때문에 섹스할 때 천장에서 엄마 얼굴이 보일 것 같다고 발악하자 엄마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반문했다. 물론 너 그래서, 자고 다니는 거야?란 질문이 이어졌고, 물론 나는 자고 다녔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라며 얼버무렸다. 하하! 다행히 이런 죄책감은 건강하게 사랑할 줄 아는 애인을 만나며 점점 옅어졌고, 내가 무성욕자라고 생각한 옛 고민을 우습다고 생각할 수 있는 오늘에 이르렀다.


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같은 날에는 내 성욕이 그렇게도 싫은 거다. 피해자다움과 정조가 내 피해사실의 심정적 근거가 되는 세상에서, 여성의 성욕은 생존과 맞설 뿐이니까. 나는 남성의 섹스가 정말 궁금하다. 어떤 마음으로 페니스가 서는 겁니까? 아무 마음도 아닙니까? 본능인가요? 그렇다면 저의 본능은 왜 학습하며 깨어날 수 있었을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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