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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틴 Jul 31. 2022

이탈리아, 크레마의 저녁이 준 선물  

이탈리아 북부, 그해 여름 손님이 되다_3

이탈리아 북부, 그해 여름 손님이 되다



대중교통으로 길 찾기를 했을 때, 자신이 잘 아는 지역이라면 종종 가보지 않아도 일정 부분 말이 안 되는 노선으로 안내하는 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서울로 치자면 잠실역의 2, 8호선 환승 구간이 긴 걸 고려하지 않고 5분 뒤 열차로 환승하라고 안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밀라노 람브레테(Milano Lambrate) 지하철역과 기차역이 그랬기 때문이다. 한 시간에 한번 꼴로 람브레테에서 크레마로 향하는 직통 완행열차를 타려 했다. 구글 지도 길 찾기를 보니 8분 후의 기차를 타면 될 일이었다. 람브레테 역에서는 밀라노 기준 동남쪽으로 향하는 열차가 많이 출발하는 것 같아서 에스칼레이터나 엘리베이터로 연결 잘 되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람브레테 역의 기차 승강장은 야외로 약 10개 정도가 넘게 있었는데,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기차역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고 다시 지하로 들어가 10개 이상의 승강장을 지나야 1번 출구 옆에 있는 매표소로 갈 수 있었다. 이 모든 길이 에스칼레이터가 없는 계단이었다. 그리고 나는 표를 사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중에서야 안 거지만, 트랜이탈리아 홈페이지에서 쉽게 표를 살 수 있었다.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기차역 이용 후기는 검색으로 찾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 경험을 좀 기록해보려고 한다.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길 바라며.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5분 만에 매표소까지 오긴 했지만, 매표 기계는 망가진 상태였고 인편으로 사는 곳엔 줄을 서야 했다. 가까스로 표를 사고 5번 플랫폼으로 급하게 갔지만, 승강장으로 올라오자마자 문이 닫힌 기차는 그대로 출발했다. 눈앞에서 놓쳐서 너무 아쉬웠지만, 1시간 정도는 좀 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싶었다. 역 밖으로 나가서 작은 커피 바에서 35도 더위에 얼음 없는 오렌지주스 마시며 기다리다가 열차 출발시간 10분 전에 다시 8번 플랫폼으로 갔다.


내가 타야 하는 승강장에 낯선 열차가 서있다. 타야 하는 시간이 지나도 시동이 꺼진 이 열차가 승강장에 계속 있었다.


승강장 계단으로 올라가기 전에 기차 정보를 보는 모니터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타야 하는 열차 정보가 뜨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번호의 2층 기차가 시동이 꺼진 상태로 5번 플랫폼에 있었다. 매표소로 가서 큰 화면을 보니 5번은 맞는데 연착이나 도착한다는 어떠한 표시가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5번 승강장 아래서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다른 열차를 타고 나보다 먼저 갔다.


대부분 사람이 떠났을 때쯤 캐리어를 들고 승강장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지칠 때쯤, 드디어 승강장 화면과 계단 아래 모니터에 30분 연착이라고 떴다. 이미 30분이 다돼가는 상황이었는데, 결국은 원래 시간보다 50분이 넘은 시간에 출발했다. 이 사단을 겪고 나니, 김영하 작가의 시칠리아 여행기에서 쓴 구절이 생각났다.


이탈리아의 기차들은 시간표에 따라가는 것이 니라 스스로 가고 싶을  가는 것이었다.”

-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이탈리아를 기차로 여행할 계획을 짠다면 이 책의 56쪽부터 읽어보고 마음 가짐을 하고 가길 바란다. 그리고 충분하게 여유시간을 두고 일정을 짜는 걸 추천한다. 지정 좌석을 정할 수 있는 큰 도시 간의 기차들은 제시간에 출발했지만 30분~1시간에 1번 꼴로 있는 완행열차들은 연착이 잦았다.


이미 40분이 넘어가는 시점에 30분 연착이라고 떴다. 5시  35분 출발 열차는 그렇게 6시가 다돼서 출발했다


이후 여행기에서도 종종 말할 거 같지만, 1~2분 연착이라 쓰고 10분 가까이 연착되는 것도 빈번했다. 사면서 역으로 향했는데 취소된 적도 있었다.(그럼 표를 팔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당시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자포자기하고 다녔지만, 요즘 유럽 뉴스를 보면 폭염으로 열차 선로가 휜다고도 하니 아마도 6월에 갑작스러운 폭염이 시작되어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됐다.


지금이야 관대한 마음으로 말하지만, 그 순간마다 차 렌트 가격 알아보고 심각하게 렌터카 고민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걸려 어렵게 온 여행을 기차 연착 때문에 망치는 건 누구든 겪고 싶지 않은 일 아닐까. 이런 과정도 여행의 일부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기엔 한국 직장인의 휴가는 너무 짧고(일주일 이상 자리를 비울 때 눈치 보인다) 횟수도 1년에 한 번 정도라 이런 연착엔 너그러워지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콜바넴 팬들이라면 설레어할 크레마에 도착. 1983년 그 여름 손님처럼 클래시컬하게 꼭 기차를 타고 크레마에 도착하고 싶었다.


크레마의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곳이었다. 집주인이 수차례 에어비앤비 앱을 통해 내게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앱이 문제가 있었는지 메시지 알람이 온 적이 없었다. 열차 연착을 알려주려고 앱을 켜고서야 그 메시지들을 보게 됐다. 너무 미안하다, 메시지 이제 봤다, 근데 열차가 많이 연착돼서 첨에 말한 시간보다 늦게 갈 거 같다 말했더니, 연착이 종종 있는 일인지 집주인인 로베르토 아저씨는 개의치 않아했다. 오히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도 된다며, 로베르토 아저씨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다. 크레마에 도착했을 때는 기차역까지 차로 마중 나와 집 문 앞까지 데려다줬는데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수차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지쳤던 내게 이런 호의는 너무 고마웠다.


고마운 마음에 어떻게든 소통하고 싶어서 차 타고 가며 이거 저거 말했는데, 대부분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다. 아저씨 영어 잘하시던데 , 내 영어 문장 만드는 실력이 역시.. 영국문화원 어학원 수강 5년 차인데 늘은 건 자신감과 능청뿐.. 이럴 때마다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보고 싶다. 한국에서 한국인들과 영어로 대화 해봤자 주고 받는 말이 너무 한국적이기도 해서 실전에서 약하다. 그렇게 차 안에서 허둥지둥거리다 만 후로는 간단한 감탄 표현만 했는데 나중에 에어비앤비 후기 보니 나보고 귀여운 아가씨라고 써 놓으셨더라.(귀엽다는 칭찬 좋아함)


숙소는 주변에 비해 비싼 편이었지만 4일 동안 알차게 이용해서 가성비가 좋았다. 위치도 크레마 다운타운 중간에 위치해서 점심까지 해 먹고 무더운 시간엔 에어컨을 부담 없이 켜고 낮잠도 잤다. 영화 팬들의 수요도 잘 아셔서 콜바넴 DVD도 마련되어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을 빨 수 있는 세탁기도 있어 대부분의 옷을 한번 빨고 갈 수 있어서 남은 여행 때 뽀송뽀송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크레마 다운타운에 위치했지만 파티오 안쪽에 위치해 조용하게 쉴 수 있었던 에어비앤비 숙소. 넓고 깔끔하고 좋았다.깔끔한 숙소만큼 로베르토 아저씨 부부도 옷잘입는 멋쟁이셨다.


이탈리아의 6월에는 해가 지는 시간이 저녁 9시쯤이었다. 저녁 8시면 한국의 6시쯤의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해 뜨는 시간은 아침 5시쯤이었고 9시면 한국의 12시쯤 되는 햇빛을 자랑했다. 그만큼 낮시간이 길고 지면이 오래 달궈져서 오후 12~4시는 정말 그늘이 없으면 돌아다니기 힘든 날씨였다. 그래서 크레마에선 보통 그 시간엔 숙소에서 쉬고 해가 기니 저녁시간에 돌아다니기 좋았다. 대부분 식당들도 오후 11시나 자정까지 하는 곳도 많았다. 크레마에 첫 도착하고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간 시간도 저녁 9시가 다 되어갈 때쯤이었다. 석양이 지고 있어서 조용한 작은 마을 크레마의 하늘은 점차 푸른빛으로 물들고 건물들은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8시가 넘어가자 확실히 선선한 공기가 가득해졌다.


거리에는 여행객보단 한낮의 더위를 지나 마실 나온 동네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 같은 곳에선 영어도 잘 통하고 교통도 다양해 관광이 중심이라면, 크레마는 도시라고 말하기도 작은, 그냥 작은 마을이다. 영화 덕에 관광을 하러 온 외지인들이 있는 곳이지만 전체적으론 영화의 인기로 득을 보려는 느낌이 드는 곳은 아닌 듯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여러 곳을 여행 다니며 알게 된 건 내가 외향적인 성격이어도 북적거리는 지역은 싫어한다는 것. 나는 적당한 북적거림을 좋아하더라.


다운타운이라 해도 로마나 피렌체의 골목길 같은 크레마. 저녁 8시가 넘어 식당을 제외한 상점들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저녁을 먹으러 찾아간 식당은 알베르토 아저씨가 추천해서 간 곳이었다. 메뉴판이 이탈리아어라 하나하나 검색해서 보고 있었는데, 옆자리 커플의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도와줄까요? 이탈리아어 모르죠? 어떤 걸 먹고 싶어요? 하며 재료부터 어떤 조리로 만들어진 요리인지 영어로 설명해 줬다. 덕분에 맛있는 생면 파스타를 즐길 수 있었다. 이름이라도 묻고 스몰 토킹이라도 하며 감사함을 전할 걸. 로베르토 아저씨도, 크레마 식당의 옆자리 여자분도, 추후에 만난 버스 트럭 청년까지, 크레마에선 선물 같은 친절함을 참 많이 받았다.


딱새우같은 새우가 들어간 생면파스타. 오른쪽은 로베르토 아저씨 핸드폰 그대로 찍어서 다녀온 곳. 크레마 메인스트리트 끝쪽에 위치해있다.


하루를 잘 보낸 사람들이 저녁을 즐기러 나온 이 일상의 안정감 또한 이탈리아가 내게 주는 선물 같았다. 월요일부터 새벽부터 12시간 동안 일을 하다가 쉬지도 못하고 비행기를 타서 그런지, 하루빨리 이 동네의 일부가 되어 이탈리아 여행을 온전히 즐기고 싶어졌다. 설렘이 가득해지자 새삼 자신이 사는 마을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졌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이탈리아를, 이런 소도시까지 와서 이런 감정을 느끼진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해가 진 후 밤 9시 반쯤의 크레마의 저녁. 알차게 1일 1젤라또를 실천하기 위해 후식은 젤라또.


알베르토 아저씨가 푸틴 때문에 전기세 비싸다고 했지만, 에어컨 켜고 못 자는 나는 그날 밤만은 에어컨 빵빵 틀고 더위를 맘껏 식히며 잠들었다.



2022년 6월 16일 밀라노로 향해 26일 로마에서 돌아온 이탈리아 여행기입니다.

현재 3편을 보셨습니다.

북부/ 밀라노, 크레마, 베르가모(스쳤음), 시르미오네(대중교통)

돌로미티/ 오르티세이, 볼차노(대중교통)

토스카나/ 피렌체, 산지미냐뇨, 시에나, 몬테풀차노, 안세도니아(렌트)

로마/ 산타 세베라, 반나절 속성관광(영업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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