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북부, 그해 여름 손님이 되다_4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시작은 영화 <Call me by your name> 때문이었기 때문에 그 영화를 촬영한 크레마 여행의 중심은 당연히 콜바넴이었다. 처음에 여행을 계획할 때는 차 렌트로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치솟은 렌트 가격에 렌트 일정은 토스카나로만 축소시킨 바람에, 크레마에서의 3박 4일도 시간적으로 빠듯했다.
크레마는 도시라고 하기엔 좀 많이 작다. 시내 끝과 끝을 도보로 20분 내로 갈 수 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읍내 정도 되는 규모이다. 기차역에서 직원을 본 적은 없다.(주말이라 일을 안 하는 건지 무인역인지..) 차량이 별로 없어 자전거 타고 시내 이곳저곳이나 크레마 기차역까지 나가거나 근처 마트를 가기에는 좋았다.
여행 내내 입버릇처럼 "이건 망한 여행이야.."라고 읊조렸는데 그 중심은 생각지도 않은 폭염이었다. 아마도 내가 갔을 때가 이번 폭염의 시작 즈음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너무 뜨겁고 더우니 판단력도 흐려졌던 기억이 난다. 요즘 워낙 뉴스에 47도까지 육박하는 유럽의 폭염 소식이 들려오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분명 이탈리아 북부의 6월은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며 여행하기 좋다고 했었는데.
이글의 제목은 영화 속 낭만을 떠오르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여름 시즌에 크레마로 자전거를 여행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해가 뜨는 5시쯤 일어나 9시 전에 일정을 마무리하지 않는 이상 뜨거운 햇살 아래 그대로 노출되니 말이다.
엘리오와 올리버처럼 자전거로 여름 시골길을 따라 여행하는 것은 이론적으론 상당히 운치 있으나, 기억하자. 이 영화의 배경은 1983년이며 우리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평년대비 극심한 기후를 마주하고 있다. 1983년 여름과는 다른 날씨이다.
이 모든 것을 알았지만, 이토록 더울 줄도 몰랐으며 이미 이곳에 와있는 나는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6시쯤 일어나서 식사 등 나갈 준비를 하고 7시 전후로 나가려고 노력했다. 대중교통 없이 몸을 움직이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그나마 지면이 덜 달궈졌을 시간이 덜 더울 테니 말이다.
영화 속 엘리오의 아버지, 펄먼 씨의 빌라(Palazzo Albergoni)로 자전거를 타고 크레마를 서서히 빠져나갔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자전거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만큼 골목골목이 조용했다. 크레마를 빠져나가며 이 작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다운타운을 벗어나니 고급 맨션 같은 느낌의 건물도 있었고 집을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이탈리안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작은 정원들도 보였다. 한국에서도 내 집 마련은 힘들지만, 한 번쯤은 이런 동네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거운 햇빛을 받는 주거지역은 따뜻한 느낌이었다.
대도시였으면 관광객 중심으로 도시의 시간도 흘러가지만 소도시는 현지인들의 시간으로 흐른다. 현지 사람들의 삶에 조용히 들어왔다 조용히 나가는 관찰자로서의 포지션이 좋아서 여행을 다니면서 큰 도시보다는 작은 도시를 선호하는 편이다.
다행히도 아침 8시 반 정도까지는 햇빛은 쎄도 서늘한 바람이 살랑 불어서 덥지는 않았다. 시내 지역을 지나 외곽 도로를 건너 논밭이 펼쳐진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리니 상쾌함 그 자체였다. 들판을 보느라 오른쪽을 둘러보니 머리는 질끈 묶고 선글라스를 끼고 자전거를 타는 내 그림자가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진을 찍어둘걸, 달리는 재미가 너무 좋아서 멈추기 싫어서 그냥 달렸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된 것처럼 더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는 내게 꽤 특별하다. 20대의 어느 날, 자동차 살 돈은 없지만 자전거 살 돈은 되는 거 같아서 자전거를 샀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두발로 디뎠다 땠다하며 그렇게 스스로 자전거를 익혔다. 30분 만에 바퀴 펑크로 끝났지만 해외로 자전거 여행도 도전해봤고, 자전거 대회도 나가봤고, 자전거를 도난당한 적도 있고.. 자전거와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나로서는 자전거로 이탈리아 북부 어딘가를 달리고 있는 자체가 행복을 주었다. 내 앞 저 멀리 자전거를 탄 중년의 부부가 서로 같은 속도를 맞춰가며 가는 것이 눈에 뜨였는데 그조차도 나를 위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크레마에서 출발한 지 40분 정도 넘어서 모스카짜노(Moscazzano) 마을로 들어왔다. 여긴 정말 작은 마을인데, 읍면동 중 동 정도 규모 되겠다.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광경이 또 언뜻 영화에서 본 거 같은 느낌이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맞았다.
엘리오의 집은 이곳에서 아주 멀지 않았는데, 영화에서는 뭔가 숲 속에 깊게 있을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마을의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집은 사유지인데 주인이 공개를 따로 안 해서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한다. 여행 후기 찾아볼 때 보니 집주인이 집을 팔려고 내놨다나 어쨌다나. 에어비앤비 같은 거 하면 잘될 텐데, 아님 박물관같이 꾸며도 좋고. 영화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소가 이 집인데 영화팬들이 꾸준히 크레마를 방문하고 있는데도 방치돼있는 게 아깝다.
이 마을에서 또 10분 정도 자전거로 가면 모토디네(Motodine)이라는 마을을 갈 수 있다. 영화에선 엘리오와 올리버가 베르가모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버스를 타는 그 버스정류장인 곳이다. 크레마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올 수는 있는데 기차만큼이나 버스도 제시간에 안 오니 참고하시길.
크레마에서 모스카짜노로 가는 길은 시골길이 대부분이었지만, 모토디네에서 크레마로 가는 길은 2차선의 국도를 달려야 했다. 헬멧이 없는 상태라 모스카짜노로 돌아가서 시골길로 갈까 했지만 햇빛이 너무 뜨거웠고 나는 10분이라도 자전거를 덜 타고 싶었기에 결국 국도에 올라탔다. 다행스럽게 국도 옆으로 자전거길로 활용 가능한 갓길들이 부분 부분 있었다. 가급적 그 길로 달리고 그 길이 사라지면 국도로 달렸다. 이탈리안들 자전거 좋아해서 그런지 주말 아침답게 싸이클링 족도 몇몇 보였는데 대부분 운전자들이 감속을 하고 지나가는 등 배려가 있기도 했다. (물론 쌩~하고 위협하며 지나가는 차도 있었다) 포장된 도로로 달려서 크레마에 30분 정도 지나서 들어올 수 있었다.
모스카짜노처럼 비포장도로를 타거나 국도를 타는 것과 달리, 자전거로 가장 수월하게 갈 수 있는 영화 촬영지는 리첸고(Ricengo)의 호수, Laghetto dei Riflessi다. 한국말로 '반사의 호수'라는 뜻을 지닌 이곳은 엘리오와 올리버가 새벽 수영을 갔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호수 옆에 피크닉 테이블이 마련되어있고 쓰레기통도 있는 것 보면 실제로도 동네 주민들이 수영을 즐기거나 나들이를 오는 곳이었던 것 같다.
크레마 역 기준으로 자전거로 20분 정도 소요되는데 가는 길의 3분의 2 이상 마을을 지나서 간다. 이 말인즉슨, 드문드문 건물 그늘로 갈 수 있으며 자전거 길도 포장도로로 마련되어있다는 소리다. 다만, 그런 마을 구역을 지나 본격적으로 리첸고로 들어오면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의 폭의 작은 길이라 차와 마주치게 되면 멈춰 서야 했다.
구글맵에서는 길이 없는데 한참을 들어가야 호수가 있다고 되어있고 표지판은 없어서 입구를 찾느라 좀 헤맨 끝에 에메랄드 빛을 자랑하는 '반사의 호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낮 12시, 햇볕을 쨍하게 받는 에메랄드 빛 호수는 사진기에 제대로 이 색들이 담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호수 한가운데 수영을 하고 계신 분이 있어서 살짝 발만 담겄었는데 상당히 미지근해서 왜 수영하고 있는지는 이해는 안 됐다.(물도 그리 깨끗하지 않았습니다만) 한낮에는 이렇게 미지근하니까 엘리오도 새벽이나 밤에 수영하러 이곳에 왔었나 싶었다.
콜바넴은 정말로 현지인들의 이탈리아 북부의 여름 생활을 생생하게 담아놨다. 사실 영화 보면서 쟤네는 한낮 게 계속 놀기만 하냐..라는 생각을 했는데, 직접 이 여름을 겪어보니 이해가 됐다. 영화 속에서 캐릭터들은 한낮에는 햇살이 너무 뜨거우니 오전 내로 할 일을 끝내버리고 점심 이후로는 거의 수영하거나 일광욕을 즐기며 쉰다. 일몰이 저녁 9시니 그때부터 시원해지니까 저녁 식사 시간은 더더 길어지고 말이다. 여름에 여기오니 이해가 된다. 한낮엔 너무 뜨거우니 움직이는 것보다 쉬는 게 나을 날씨다.
그래서 여름에 크레마를 오면 여행길이 고생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인상 깊게 본 영화 여행지를 주인공들처럼 자전거로 누비고 있는 것 자체로도 이 여행의 모든 것이 완성된 기분이었다.
간단히 지도 속 영화 장면을 엘리오의 대사로 정리하자면,
① Pandino "Because I wanted you to know." -엘리오가 올리버한테 마음을 내비친 장소. 피아베 전투 동상이 있는 곳.
② Sorgiva Quarantina "This is my spot. All mine." - 알프스에서 오는 지하수로 차가운 엘리오만의 장소
③ Laghetto dei Riflessi "Let’s go swimming." - 그날 밤(?) 후 새벽에 둘이 수영하러 간 곳
④ Palazzo Albergoni 엘리오의 집 - 펄먼 씨의 빌라
⑤ Montodine 버스정류장 - 베르가모로 향하는 버스가 출발한 곳. 버스 출발과 함께 이 영화의 주제가 <Mystery of Love>가 흘러나온다.
⑥ Corte Palasio "Thirsty?" -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엘리오와 올리버가 물을 얻어마시는 곳
⑦ Campagnola Cremasca ⑧ Capralba 영화 속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길목
⑨ Via Caprotti "Please could you come pick me up?" - 올리버가 떠난 후 엘리오가 엄마 차를 얻어 타고 오며 지나오는 길
영화 촬영 장소 참고 링크 https://almostginger.com/call-me-by-your-name-locations
2022년 6월 16일 밀라노로 향해 26일 로마에서 돌아온 이탈리아 여행기입니다.
현재 4편을 보셨습니다.
북부/ 밀라노, 크레마, 베르가모(스쳤음), 시르미오네(대중교통)
돌로미티/ 오르티세이, 볼차노(대중교통)
토스카나/ 피렌체, 산지미냐뇨, 시에나, 몬테풀차노, 안세도니아(렌트)
로마/ 산타 세베라, 반나절 속성 관광(영업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