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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틴 Sep 14. 2022

이탈리아 소도시를 대중교통으로 여행하면 생기는 일

이탈리아 북부, 그해 여름 손님이 되다_5

이탈리아 북부, 그해 여름 손님이 되다


내 브런치 글 중 조회수가 높고 반응도 좋은 글을 찾으라면 버스로 제주도를 여행한 이야기이다. 제주 토박이들에 비해 부족하겠지만, 꽤 오랜 시간 뚜벅이 여행자였기에 지금도 누가 제주에서 버스 타는 얘기를 하면 이런저런 추천을 해줄 수 있는 정도다. 운전면허를 3년 전에 땄으니 그전까지는 대중교통으로 국내를, 해외를 여행해왔다.


그래서일까. 너무 비싼 렌터카 가격에 결국은 정말 필요한 토스카나 일정 2일만 렌터카를 사용하기로 하고 모든 일정을 대중교통 이용하기로 했다. 팬더믹에, 심지어 자동차량을 구하려 한 덕에 차량 구하기도 힘들었고 러시아 전쟁 때문에 기름값도 비쌌다. 여행 가서 돈 쓰려고 돈 번다하지만, 돌아와서 비행기표값보다 비쌀 렌터카 이용비를 낼 자신도 없었다. 


이탈리아를 기차, 버스로 여행하는 후기들을 찾아봤을 땐 기차는 정시에 오고 버스 티켓은 버스정류장 근처 매점들이나 기차역 안에서 판다고 했다. 뭐, 영국도 기차로 여기저기 다녀본 경험도 있고 해서 국내 뚜벅이 짬빠를 믿고 이탈리아도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오만이었다! 내가 겪은 이탈리아 대중교통은 기차는 정시에 안 오는 게 파다했고 어떤 기차는 출발 20분 전에 모바일 예매도 했는데 취소되기도 했다. (취소될 거였음 판매하지 말던가... 참고로 환불 절차도 복잡하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버스표 판매할만한 곳이 없었다. 물론 로마나 피렌체 같은 큰 도시는 이용이 수월했는데, 크레마나 가르다 호수 주변 같은 지방은 대중교통의 수난이 심했다. 흔히들 이용한다는 우버도 이용 불가능 지역이었다. 


지역마다 콜택시는 있는 듯하니, 콜택시 번호를 미리 알아갖고 가면 유용할 듯하다. 크레마의 경우 호텔 로비에서 알려준다고 한다. 사진은 시르미오네 지역의 콜택시 번호.


콜바넴에서 나온 판디노로 향하던 날은 일요일이었다. 크레마 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되는데 표를 살만한 곳이 없었다. 크레마 역은 무인역인지 4일 내내 직원을 볼 순 없었고, 보통 버스표를 판다는 커피 바는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있었다. 나 말고도 그 버스를 타려는 사람이 두어 명 더 있어서 어물쩡 눈치만 보고 있다가 버스기사가 왔길래 표를 어디서 사는지 물어봤다. 버스기사가 자신에게 사면된다 해서 값을 지불하고 편도 한 장을 사서 판디노로 향했다.



콜바넴 속 판디노는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마음을 용기 있게 표현한 장소이다.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요.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요.."라고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엘리오를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 대로 커져서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거절당해도 좋으니 그 사람의 반응을 봐야 나을 거 같은 사랑의 열병이 생각난다. 그 장면에 마음이 아려온다면 아마도 누군가를 그렇게 진심으로 좋아했던 추억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기에 나는 판디노로 향하며 꽤 설레었다. 


판디노 도착..! 도시라기엔 그냥 크레마 소속의 한 지역.


하지만 일요일답게 영화 촬영지였던 피아베 전투 동상 주변을 중심으로 옆에 판디노 성 광장까지, 피아트 판다 자동차 유저들의 행사가 크게 열리고 있었다. 판디노와 판다가 무슨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탈리아 전국의 판다 유저들이 다 모인 느낌이었다. 판다들 사이사이로 다니며 피아베 전투 동상을 찍고, 나름 영화에 잠시 빠져들며 청승을 떨어 보려 했으나, 디제잉 음악으로 주변은 시끄러웠다. 영화에선 세상 조용한 동네 같더니만, 현실은..


콜바넴 속에도 엘리오 아빠의 차가 피아트 판다로 등장한다. 이탈리안들은 에어컨도 안나오는 이 수동차를 지금도 많이타는 듯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피아트 판다 여기 다 있는듯. 아니 그리고 죄다 팬더 인형으로 데코한건 뭔데...아 피아베 전투 동상이 안보이잖아요...
정신승리로 찍은 콜바넴 속 명소. 실제 피아베 전투의 동상은 아니라고 한다. 
판디노 성. 이안도 피아트 판다가..(어질)


옆의 판디노 성을 슬쩍 둘러보고는 정류장 시간표상으로는 한 시간 남짓 남은 버스를 기다리며 근처 교회 앞에 앉아 근처 카페에서 산 머핀과 슬러시로 약간의 요기를 하며 영상을 찍으며 시간을 때웠다. 버스 정류장 주변으로는 버스표를 살만한 곳이 없어서 '또 버스에서 사면되겠지'하고 기다렸다. 버스 정류장에 적힌 도착시간과 상관없이 근 30분을 기다리니 도착했다. 아까 탄 차가 회차해서 온 건지 버스 기사가 아까와 같은 사람이었다. 버스표를 사겠다고 하니 돌려받은 대답은 조금 황당했다. "나는 이제 그 업무를 안 해, 아까 끝났어."


이 주변에 버스표 살만한 데가 없다고 하니 쓱 둘러보니 동의하는 눈치였다. 나는 크레마로 가야 하고 거기서 기차를 꼭 타야 한다고 하니 그럼 우선은 타라고 했다. 대신 나중에 검표에 걸리면 기본요금에 50배에 달하는 금액을 내 얀다고 했다. 다른 교통편을 찾을 수 없었고 차로 30분 거리를 이 더위에 걸을 수도 없었기에, 우선은 알겠다 하고 버스를 탔다. 생각할수록 100유로 정도 되는 돈을 내야 하는 상황이 억울했다. 그렇게 표 파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버스표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모르는 관광객에게 미리 말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버스를 타고 크레마로 들어오다 보니,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지나다니던 길목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내릴 때 그 무리에 섞여서 종점인 크레마 역 전에 내렸다. 티켓을 안 사고 싶어서 안 산 것도 아닌데, 아깐 팔고 지금은 안 팔고 하는 태도도 그렇고. "이탈리안들 원래 그래. 자기 일 외적인 건 딱 선을 그어"- 지금은 겪어서 이탈리아 가면 무임승차할 일은 없겠지만, 그때는 몰랐으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 후론 버스표 살 때 미리 몇 장 사서 다녔다. 지역마다 버스 티켓 디자인도 다르니 모으는 재미는 있긴 한데, 버스정류장에 키오스크 있으면 좋겠다. 사진은 피렌체 버스 티켓.


크레마 역을 오가는 기차는 완행열차라 한 시간 간격 정도로 일정하게 동일한 노선을 다니는 열차들이 많았다. 보통 30분 정도 거리의 트레 빌리 지오(Treviligio)에서 크레모나(Cremona)를 오가는 열차였다. 정기적인 열차지만 이 역시 제대로 시간을 맞춰 오는 경우는 드물었고, 이유는 모르게(안내해주지만 이탈리아어..) 엄청 지연되거나 운행 중 철도에 서있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늦어지면 환승해야 하는 다음 열차를 못 탈 수도 있을 것 같아 예매할 때도 2~30분 정도 텀을 두고 예약해야만 했다. 


트랜이탈리아 홈페이지에서 열차 탑승 15분 전까지는 예매가 가능하다. 지정좌석이거나 장거리 일정이 아닌 이상, 특히 환승이 있을 경우엔 상황 봐가며 실시간으로 예약하는 것이 좋겠다


Sorgiva Quarantina, 혹은 Fontanile Quarantina라고 불리는 이 촬영지는 작은 연못인데, 영화 속에서는 엘리오가 올리버를 데려와 자신의 공간이라고 말한 곳이다. 크레마 역에서 완행열차로 두 정거장 거리의 카프랄바(Capralba) 역에 내려서 20여분 정도 걸으면 갈 수 있었다. 큰 나무 가로수가 있어서 그늘로 다니면 안 덥겠거니 했지만 걷다 보니 그늘 없는 구간을 더 많았다. 우산 겸용 양산을 챙겨 갖고 나온 터라(철저한 뚜벅이) 자체 그늘을 만들어 걸으니 한결 나았다. 편도 20분이라지만 이탈리아 시골의 경치와 잘 꾸며 놓은 정원과 창가에 화분이 놓인 집들을 구경하다 보니 재촉해도 편도 30분은 걸은 것 같다. 


점차 사라지는 그늘에 꺼내든 우산..
표지판이 보이면 쭉 따라 들어가면 된다. 여기는 정말 그늘 없다. 마지막 사진이 촬영지 입구. 닫혀있지만 들어갈 순 있다.


차를 갖고 왔어도 Fontanile Quarantina라는 간판이 보이는 곳부터는 걸어 들어가야 한다. 비포장 도로이기 때문에 자전거를 탄다 해도 그리 속도를 낼 순 없을 것 같은 길을 10분 남짓 걸어 들어가다 작은 울타리 형식의 문을 지나 연못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청량한 느낌을 주던 엘리오의 공간은 영화 속과 똑같이 실제로도 적당한 나무 숲 안에 둘러 쌓인 작은 연못이었다. 근처 사시는 분들인지 개를 데리고 피크닉을 온 분들도 계셨고, 개를 데리고 산책 나와서 개와 함께 발만 물에 담그고 가는 분들도 계신, 나름 이 지역에서는 마실 장소인 것 같았다.


여긴 하루 더주면 또 가고싶은 곳이었다. 아늑하고 조용하고 물이 너무 시원했다. 


연못은 무릎과 허벅지 중간쯤 닿을 정도의 얕은 수심이었는데, 피크닉 오신 남자분은 상의 탈의하시고 목욕탕에 앉아있듯 더위를 식히기도 했었다. 올리버가 freez 하다 말한 것처럼 실제로도 연못은 상당히 차가웠다. 엘리오 말대로 물이 알프스에서 오는지 몰라도, 우리나라로 치면 지하수 물처럼 정말 차가워서 땡볕에 걸어온 이 여행자에게 시원함을 선사해줬다. 원래 쓱 둘러보고만 오려다 너무 시원해서, 수영복 갖고 오지 않을 걸 후회하며 다리를 담그고 팔을 물에 적시며 더위를 식히다 왔다. 발만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금세 온몸이 서늘해졌는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더위에 지친 여행자를 달래주는 듯했다. 


오가며 본 아기자기한 이쁜 집들. 햇빛이 쨍하니 벽 색들이 더욱더 또렷하다. 다들 식물 관리 어떻게 하는지 공유좀...(식집사)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걸어 나왔는데, 연못에서 너무 지체한 탓인지 재촉하며 걸어도 기차 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물며 한 5분만 걸으면 될 거 같은 거리에서 멀리 기차가 오는 게 보여서 하는 수 없이 뛰었는데, 조용한 시골길을 지나가던 한 봉고트럭이 내 옆에 멈추더니, 운전기사분이 나보다 더 다급한 표정으로 "Go train! Go train!" 하며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급한 마음에 우선 탔는데 "Need speed!"하며 씩 웃어줬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던 젊은 남자였지만, 딱 봐도 이 동네 사람이 아닌 관광객이 기차역을 향해 뛰는 게 안쓰러웠나 보다. 사실 뛰면서도 '아 차만 있었어도..'라는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고마운 마음에 "You're my angel!! 하며 땡큐! 땡큐를 연신 말했다. 이탈리아어 몇 마디 할 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아쉬운 마음도 함께 들었다. 뛰었으면 기차를 놓치고 또 한 시간을 허송세월을 보냈을 텐데 그의 친절함 덕에 시간을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 짧은 순간에 길게 남을 친절을 받았다. 



대중교통을 타고 외국을 여행해서 좋은 것은 무엇보다 현지인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행을 하는 이유와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나는 관광 위주보다는 현지 사람들의 일상을 가까이서 보고 그 사회의 일원인 것처럼 있는 걸 좋아한다. 그런 이유에서 한편으론 반갑게 대중교통으로 이탈리아 소도시를 여행하는 걸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대중교통 이용은 항상 예측한 것과 달랐다. 그 지체 덕에 눈에 담긴 건 이탈리안들의 일상들-방학을 맞이해서 물놀이를 온 , 주말이라고 한껏 꾸며 입고 놀러 가는, 그늘에서 반려견과 함께 쉬다가는 그 일상들이 한국에서의 나의 일상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상도 늘 좋고 나쁜 일의 연속 아니던가.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으니 이탈리아 일상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겠냐 생각하니, 처음 온 나라에서 내가 사는 곳과 다른 시스템에 적응 안 되는 건 당연하다 싶었다. 


팬데믹 이전에 지하철역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지하철표를 사는 걸 몇 번 도와준 적이 있었다. 파리 지하철에서 아무 말 없이 무거운 내 짐을 들어준 파리지앵, 기차표를 들고 핸드폰으로 검색하며 불안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리자 먼저 말을 걸며 도와준 영국 할아버지, 캠핑 중 비가 와서 꺼진 불을 피우는데 기꺼이 성냥을 찾아와 준 나미비아의 청소부... 외국으로 여행 다니며 현지인들에게 도움받았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람을 돕는 것만큼 뒤돌아봐도 가슴 벅차며, 도움을 준 사람에게도 받은 사람에게도 오랫동안 아름답게 남은 순간이 또 있을까. 이탈리아 소도시를 대중교통으로 다니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일이었다. 






2022년 6월 16일 밀라노로 향해 26일 로마에서 돌아온 이탈리아 여행기입니다.

현재 5편을 보셨습니다.

북부/ 밀라노크레마, 베르가모(스쳤음), 시르미오네(대중교통)

돌로미티/ 오르티세이, 볼차노(대중교통)

토스카나/ 피렌체, 산지미냐뇨, 시에나, 몬테풀차노, 안세도니아(렌트)

로마/ 산타 세베라, 반나절 속성 관광(영업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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