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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틴 Sep 16. 2022

크레마의 '그해 여름 손님'이 되어보다.

이탈리아 북부, 그해 여름 손님이 되다_6


이탈리아 북부, 그해 여름 손님이 되다



요즘 인터넷을 보다 보면 심심치 않게 MBTI 얘기가 보인다. 나는 계획적(J)인 사람과 즉흥적(P)인 사람의 여행 일정 짜기를 보며 많이 공감했었다. 20대의 나는 분명 J형 여행자였는데 지금은 P형 여행자이다. 뚜벅이로 전국을 다녀보겠다고 하던 시절, 차가 없어도 다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1분 1초를 버리지 않고 투어 가이드처럼 일정을 짜서 다녔다. 버스를 놓치면 기차도 놓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걸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라는 목표가 강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여행기는 네이버 블로그에 남아있다. https://blog.naver.com/bass83


'지금은 왜 P형의 여행을 하게 되었지?' 생각해보니 여행을 가면 갈수록 비행기표, 숙소 등 미리 해놔야는 것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천천히 알아보는 걸로 바뀌어 간 것 같다. 식당도 미리 알아가는 건 그 지역 전통, 유명 요리 정도만 알아가고 현지에서 지나가는 근처의 평점 좋은, 먹고 싶은 요리를 찾아가는 편이고. 언제부터 이렇게 맘 가는 대로 다녔나 생각해보니 아마도 아프리카 여행에서 이런저런 고초를 겪은 후부터(모든 걸 예약하고 갔지만, 여행사에서 비자 문서 잘 못줘서 입국을 못한 게 1절 1 단락.. 할 말은 4절까지 있다) 입출국 서류, 잘 곳, 장거리 교통편 외엔 상황의 흐름에 맞게 여행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도 그랬다. 원래 처음에는 크레마에서만 7일 있을까 했었는데, 간 김에 토스카나도.. 간 김에 돌로미티도.. 하다 보니 보통 하루 정도 비워두고 일정을 짜는데 이번엔 꽉 찬 일정이 됐다. 크레마에서는 3박을 에어비앤비로 묵으며 그해 여름 손님처럼 느릿느릿~유유자적하게 보내고 싶었지만 무더위와 제멋대로인 대중교통 덕에 일정은 빠듯했다. 덕분에 3박을 했어도 못 가본 콜바넴 촬영지가 여러 군데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밀라노 위쪽에 있는 도시, 베르가모였다.


트레 빌리지 오역에서 베르가모행 열차로 갈아탔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탈 없을 줄 알았지


베르가모를 가긴 갔었다. 기차로 베르가모를 향할 때까지만 해도 생각을 못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크레마로 돌아오는 막차 시간이었다. 해가 길어서 저녁 8시도 훤하니 열차도 늦게까지 다닐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크레마 자체가 작은 동네라 그런지 베르가모에서 크레마로 향하는 기차의 막차는 저녁 7시 20분이었고 그걸 저녁 6시에 베르가모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알게 됐다. 콜바넴을 촬영한 장소는 베르가 모역에서 택시로 10여분 거리의 언덕에 있는 올드타운이었다.


저녁 6시 30분에 베르가모역에서 내린 나는 멀리 보이는 올드타운을 쳐다보다 7시 20분의 막차를 타러 다시 역으로 들어갔다. 저 위 올드타운에서 보는 노을이 그렇게 이쁘다던데ㅜ


차편이 많지 않았던 교통문제도 있었지만, 부지런히 이동을 못한 이유는 기후변화로 인한 이른 무더위. 조금만 움직여도 익숙하지 않은 뜨거움에 금방 지쳤다. 베르가모도 그다음 날 다시 가려고 표까지 끊었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다시 숙소로 돌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위기를 기회로!'라며 전환을 해보니, 말 그대로 휴가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여행 전에 회사일에 이리저리 치여 지쳐서 왔던 내게 한낮의 무더위를 피하는 것은 힐링의 시간이었다. 콜바넴 속 올리버가 그러했듯, 오전에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한낮엔 더위를 피해 시원하게 보내다가 저녁엔 또 돌아다니는 그런 '여름 손님'의 삶을 즐겼다. 점심 전후부터 늦은 오후까지 숙소에 에어컨을 시원하게 틀어놓고, 역 근처 마트에서 사 온 재료들로 파스타, 샐러드를 해 먹고 후식으로 유럽에만 있다는 납작 복숭아도 배불리 먹었다. 그렇게 먹고 나서는 에어컨 아래서 찍은 사진을 보거나 다음 여행할 걸 좀 알아보다가 졸리면 낮잠도 자고. 그러다가 오후 5시쯤 되면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크레마 시내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노을이 지면 숙소로 들어와 느지막이 숙소에서 저녁을 해 먹었다. 여행 와서 늘 밖을 부지런히 다녔던 사람이라, 숙소에서 쉬고 있는 게 '유죄' 같은 기분이었지만, 불가피한 상황이니 꽤 '합법적'으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에어컨 빵빵 틀고 얼음 넣고 코크랑 스프라이트 마시는 거 국 룰.. 아니 글로벌 룰 합시다. 청량 그 잡채


콜바넴 찍은 그동네에서 콜바넴 보고있는 나 실화인가! 이 상황 자체를 몇번 감탄했다.
자기가 음식을 해먹을 수 있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객지에서 꽤 오래 버틸 수 있다.

     -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중


크레마에서 해먹은 요리들.


원래부터 간단한 파스타는 해먹을 줄 알았지만, 사실 파스타는 재료와 올리브 오일, 치즈 같은 기본 재료들을 어떻게 조합하냐에 따라 달려있는데 약 3년간의 주중 자취와 식재료에 대한 이해를 요리학원에서 깨닫게 된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ABC 쿠킹스튜디오에 감사드립니다. 자주 못 가서 죄송해요) 그전에도 여행 가서 간단한 스낵 정도는 해 먹었지만, 조리를 한 요리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맛의 고장(?) 이탈리아에서 신선한 식재료로 요리한 게 너무 만족스러웠다. 이제부터 여행 다니면 취사되는 숙소 찾아서 '요리' '조리' 해야지!


어느 나라를 가도 마트가 보이면 꼭 들어가서 구경하고 이용해 보는 편인데, 크레마 역 근처의 마트는 큰 편이었다. 이탈리아답게 올리브, 치즈, 토마토 등 이탈리아 요리의 기본이 되는 재료가 뭘 골라하나 고민하게 할 만큼 종류가 다양했다. 한국에서는 다양하지 않아서 고민할 것도 없었는데 넘쳐나는 재료들을 보며 언젠가는 이탈리아 각 지역 특산물로 밥 해 먹는 여행하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 먹는 거다 보니 싸면서도 양 적은 거 위주로 골랐어도 맛은 다 좋았다. 팩 와인도 맛있서 놀랬고.

 

이렇게 주렁주렁 달린 토마토 여기서 첨 봤음. 맛도 좋았다.
알이 큰 올리브, 유럽에만 있는 납작복숭아, 다양한 종류의 프레슈토 얹은 로마식 까르보나라를 가능하게 해준 이탈리아 마트 넘 좋고요. 덕분에 냉장고 채움!
기본적으로 요리하기 딱좋았던 로베르토 아저씨의 에어비앤비. 크리스마스에 여기에 다시 묵고 싶다. 오븐도 있었는데 이스트 챙겨가서 빵 만들래요..!

배불리 먹고 한숨 자고 나면 슬렁슬렁 다시 나와서 크레마 시내 곳곳을 다녔다. 크레마 시내에도 콜바넴 촬영지가 있어서 찾으러 다니느라 좀 돌아다녔는데, 대부분 촬영지가 고개만 돌리면 보일 정도로 가깝다. 특히, 크레마엔 콜바넴 팬들 취향 저격하게 관광 안내소가 잘 되어있다. 영화 속 배우들이 탔던 자전거와 앉았던 의자 등 소품들이 있고 관련 굿즈도 팔고 있다. 내가 지나칠 때마다 문이 닫혀있어서 주말엔 안 하나 싶었는데, 점심시간에 길게 쉬는 듯했다.


셀프영상 찍으며 거리 돌아다니는데 우연찮게 관광소 직원분 만나서 로케지 안내책자도 받았다. 이미 다 다녀온 상태에서...ㅋㅋ
아는 사람들은 알만한 영화 속 그 장소들. 세계에서 찾은 영화팬들의 낙서가 인상 깊은데 한국어는 없다!
콜바넴 팬이라면 재밌어할 인포센터. 다들 영어 잘하신다..! 내가 영어 젤로 못했어!
인포센터에 방명록 같은 벽이 있는데 한국어로 다들 티모시를 노리고 있구만.


관광안내소뿐만 아니라 한낮의 시간엔 대부분의 상점들은 쉬는 분위기였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지쳐서 돌아와서 바로 숙소로 갔다가 밥 먹고 한숨 자고 나오면 그제야 다시 문이 열려있거나 했고, 6시가 넘으면 얄짤없이 문 닫는 가게도 많았다. 다른 계절엔 어떨지 모르겠는데 더워서 쉬시는 건지 아님 점심시간을 길게 갖는 건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여행 가면 기념으로 쇼핑 좀 하는 내 돈을 아끼게는 해줬는데 그래도 크레마의 흔적을 내 일상으로 갖고 오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시내의 메인 거리에는 생활용품이나 의류, 젤라토 가게가 있었고 골목골목 다니면 크레마 지방 전통방식으로 만든 프로슈토나 치즈 파는 상점도 있었다. 이 상점은 주말엔 문을 닫는지 구경을 못한 게 아쉽다.


크레마의 크고 작은 광장들. 저녁이 되면 이런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거나 저녁을 즐기거나.
크레마 골목골목 다니기. 영화가 아니었으면 와보지 않았을 곳. 좋은 콘텐츠가 많이 만나 나를 세상 여러 곳으로 안내해줬으면..!


내가 크레마에 머물던 3박은 불금과 주말이 포함되어있었는데 덕분에 매일 저녁 크레마 현지인들의 불타는 주말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한껏 들뜬 표정으로 주말 저녁을 즐기러 가는 표정들인데 어디들을 가나 싶어 걷는 행렬에 섞어 걸어봤지만, 어디 그럴싸하게 파티가 열리거나 북적거리거나 하는 곳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금요일 저녁부터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맘 맞는 사람들 만나 밥 한 끼 먹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니 이들도 그러나 보다 싶었다. 중학생 정도 보이는 여자아이가 짧은 바지에 나시 크롭탑 입고 아빠가 태워준 차로 놀러 나오는 거 보면 조용한 것 같은 이 작은 도시 사람들도 맘 편히 먹고 떠드는 주말 저녁에 진심인 것이다.


서양요리 말고 말끔한 동양요리..생각나면 추천..맛은 그저 그랬고 파스타보다 비쌌음!


현지의 분위기에 맞춰 크레마의 마지막 저녁은 크레마 시내 끝자락에 있는 일본 퓨전 레스토랑에서 외식으로 즐겨봤다. 4일을 더위에 시달렸더니 기력 보충을 할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서 동양 음식을 찾았는데 마침 미소된장국을 팔고 있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BPM 높은 댄스음악을 틀어놓은 젊은 느낌의 식당이었고 메뉴판도 QR코드를 찍어 볼 수 있었다. 동양의 요리를 팔지만 키친 안의 요리사 외엔 홀에 있는 동양인은 나 하나인 게 재밌었다. 살펴보니 식당에 있는 서양인들 젓가락질이 어설펐는데, 뭔가 젓가락질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보여주고 싶었다. (젓가락질 부심) 나 역시 젓가락질을 못했는데 고3 때(공부 빼고 다 열심히 하고 싶은 그 시절)  바닥에 콩 뿌려 놓고 열심히 교정해서 지금은 잘해서 갑자기 젓가락질 부심이 솟구쳤다. 크레마의 마지막 밤을 캘리포니아롤과 해초무침을 현란한 젓가락질로 집어대며 서양인들 틈에서 혼자 뿌듯함을 느끼던 여름 손님이었다. 







2022년 6월 16일 밀라노로 향해 26일 로마에서 돌아온 이탈리아 여행기입니다.

현재 6편을 보셨습니다.

북부/ 밀라노, 크레마, 베르가모(스쳤음), 시르미오네(대중교통)

돌로미티/ 오르티세이, 볼차노(대중교통)

토스카나/ 피렌체, 산지미냐뇨, 시에나, 몬테풀차노, 안세도니아(렌트)

로마/ 산타 세베라, 반나절 속성 관광(영업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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