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찬 CP와의 점심 식사 시간은 매우 지루했다. 창사 30주년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는 뻔했다. 회당 40억이 들어가는, OTT 오리지널을 제외하면 전무후무한 제작비와 모든 주·조연 배우들이 톱스타라는 것, 그리고 그런 상황 때문에 사공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가령 주연을 맡은 배우의 소속사가 공동 제작사를 겸하는데, 그 제작사가 대본에 너무 많은 수정을 가하려고 압박해서 걱정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작가가 신인이라서 더 걱정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큰 프로젝트에 신인 작가를 쓰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영근은 적당히 반문했지만, 해찬은 경험이 많은 작가는 프로듀서가 제시하는 의견을 너무 무시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프로듀서가 그렇게 작품의 방향에 확신이 있으면 본인이 각본을 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영근은 기자로서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즉 생각으로만 남겨야 할 말을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 맛있는 일본식 가정식 도시락과 지루한 대사가 함께하는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영근은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때에 해찬이 영근의 눈이 반짝일만한 소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영근씨는 정연 피디를 어떻게 알아요?
드라마 관련해서 조사하다 보니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대중들한테는 안 알려졌지만, 이 업계 사람들은 다 알지. 난 사람이야. 프로듀서라는 분야가 이렇게 저평가만 안 되어 있어도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드라마 감독들보다도 더 알려졌어야 하는 후배예요, 연출했어도 진짜 잘했을 후배야.
그렇군요.
독한 후배였어요. 한 10년 전 때부터 그 친구는 싹수가 달랐어요. 드라마 조연출 하다 보면 진짜 시간이 없거든요?
아, 네.
촬영장 팔로우하면서 감독 수발들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나중에 후반 작업할 때는 CG 담당, DI, 그니까 DI는 뭐냐면.
색보정 말씀하시는 거죠?
오, 아시는구나. 그렇죠. DI, 믹싱, 음악감독하고 연락해서 수많은 의견을 조율하고, 일정 맞추고 하는 건 다 조연출이에요. 게다가 사공이 한둘이에요? CP하고 감독 의견이 다르면 둘 의견을 다 수렴하는 결과물을 내야하고, 만약에 그 둘이 의견이 맞아도 본부장이 종편본 보면서 이거 편집이 이상하지 않아? 라고 한마디를 하면 그걸 감독한테 전해야 하는 건 또 조연출 몫이에요. 돌아버리지. 그 와중에 티저 영상 4개에 매주 예고편도 만들어야지. 그래서 드라마 피디들이 3년 차에 많이 그만둬요.
아, 그렇군요. 그건 전혀 몰랐습니다.
영근이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연 피디는 한 번도 트러블을 일으킨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걔가 티저나 예고 편집해서 오는 건 진짜 기가 막혀. 우리끼리 진짜 답 없다고 생각한 회차도 걔가 예고 편집해서 오면 이게 그 회차야? 싶을 정도였어요.
대단한데요.
포스터나 홍보 방향성 논의 회의 때는 그 없는 시간을 쪼개서 비슷한 영화나 드라마를 모조리 다 보고 분석을 해와. 그래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새끈한 의견을 내. 그 와중에 최신 드라마를 다 보고 공부하는 거지. 영화 시사회장에도 항상 있어. 가끔 하루 이틀 회사에서 안 보이는 날이 있으면 영화제에 가서 영화를 하루에 네다섯 편씩 보고 와. 진짜 대단하지. HBC에서 드라마 만드는 데 AI를 처음 썼지? 이제 막 걸음마 수준으로 쓰기 시작한 런웨이나 소라 같은 영상 제작 AI도 우리가 그게 뭐야? 할 때 이미 다 알고 쓸 준비가 다 되어 있었어. 우리는 보면서 정말 헤르미온느가 현실에 있다면 이 친구다 했지. 5년 차에 HBC CP로 스카우트 되었다 했을 때, 우리 후배로 더 못 써먹어서 아깝다는 것 말고는 아무도 그 파격적인 스카우트에 불평불만을 못 했을 정도야. 그런데, HBC에 들어간 이후에 내가 한 가지 소문을 들었어.
무슨 소문이요?
해찬은 영근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새로 입사한 후배로 여겨서 더 많은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근은 눈을 반짝이면서 경청했다.
진짜 유능한 조연출을 뽑았다는 거야. 그래서 그 친구한테 자기 일을 맡기면서 정연 피디가 더 많은 드라마를 프로듀싱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어. 우리 방송국 사람들 다 땅을 치면서 후회했지. 왜 정연이를 우리 공채 PD 뽑을 때 면접관으로 안 썼을까…. 근데 면접관 하라고 할 시간에 자기들 드라마 예고편 좀 봐달라고, 대본 좀 만져달라고 부탁하기 바빴으니 뭐. 별수 있나.
그 조연출도 대단한가 보네요.
나도 한 번 봤는데. 눈빛이 둘이 비슷하더라고. 죽이 잘 맞겠다 싶었어. 이름이 이경수…. 였나? 그랬던 거 같은데.
이경수.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영근은 역시 기자는 모든 상황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하여튼, 그 친구 집안 사정이나 학력이 공채로 뽑기에는 조금 어려워서, 계속 프리랜서로 계약해서 하고 있다고 들었어.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공채 시스템 같은 거 이제 다 없어져야 되나 싶어.
혹시 이경수라는 분 연락처는 아세요?
왜? 연락처 필요해?
네. 정연 피디 만날 때 전화로라도 한 번 연락드려보게요.
알아봐줄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선배. 괜찮을 거에요.
이럴 때만 선배라 하지 말고, 대체 왜.
할 일이 있어요.
너무 위험해. 신진리교가 보복하면 어떡해.
경수는 정연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연은 구루를 제외하고 자신의 과거를 대부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경수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든든한 지지자였다. 신진리교에 속해 있다는 말을 처음 꺼낼 때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방송국 사람들이 더해,
대수롭지 않게 한 마디 말할 뿐이었다. 경수는 지금이 정연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라고 느꼈다.
언니, 저한테는 따라다니는 한 사람이 있어요. 벌거벗은 채 온몸이 물에 젖어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제가 어떤 일을 하든 항상 나타나요. 편집실에서 드라마 예고 만들 때도, 현장에서 촬영 진행할 때도, 드라마 종합편집하고 시사할 때도. 심지어 지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나타나요. 배우 얼굴이 그 사람으로 바뀌어 있고, 밥을 먹을 때 제 앞의 의자에 앉아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해요. 언니랑 말을 할 때도 가끔은 언니의 얼굴이 그 남자로 바뀌어 있어요. 사실 지금도 그래요.
남자는 경수에게, 메롱이라고 말하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일평생을 따라다니고 있어요.
하….
그 남자는 제 틈을 계속 노리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그냥 정신적인 문제라고 느끼실 수 있는데, 진짜 현실의 문제에요. 그 남자는 귀신이 아니에요. 하나의 거대한 세계에요.
그래서, 신진리교를 탈출하는 거하고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나타날 거 아니야.
환경이 바뀌면 무언가 변할 것 같아요.
경수는 정연의 눈을 피한 채 대답했다.
너, 신진리교 들어간 거 그 남자 때문인 거 맞지?
...네...
그러면 신진리교는 되레 그 남자와 완전히 대척점인 세계 아니야? 그러면 오히려 더 자주 나타나는 거 아니야?
경수는 역시 정연을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경수는 다른 진실 하나를 더 공개해야 했다.
그래도 확신이 있어요. 이 선택을 하면 남자가 더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요.
이해가 안 돼.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 남자 때문만은 아닌 거 같은데?
침묵을 깨는 건 이번에도 정연이었다.
언니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라는 게임 알아요?
알아. 직접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게임에서는 선택에 따라서 그 이후 상황이 계속해서 바뀌잖아요. 그런데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는 제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데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때도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올 때가 있어요. 파국이라는 걸 알아도 해야 하는 선택이에요.
흠….
그런 상황이에요. 제가 하기 싫어도, 그 남자가 더 자주 나타날 수 있어도, 이 선택은 필수에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라….
경수는 게임을 잠시 떠올렸다. 이내 바로 정연은 핵심에 도달했다.
혹시 네가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거야?
네…. 맞아요.
왜 바로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않은 거야? 나를 아직도 못 믿나, 참….
정연은 발코니 쪽으로 다가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 하는 소리 이후에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미안해요, 언니. 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이 선택을 하면 진짜로 남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요.
왜? 그리고 남자가 나타나지 않게 하는 거랑 걔를 구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건 설명이 어려워요. 그냥 느낌이라. 그 애를 구하면 더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뭐, 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네가 신진리교에게 계속해서 쫓기고 위협받을 정도로 그 애가 소중해?
네.
진짜?
네. 소중해요.
그건 좀 질투 나는데.
경수의 화난 표정이 흥미로움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어떻게 탈출할 건데?
그 아이랑 영화를 찍어야 해요.
무슨 영화?
그 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 해요.
그 아이의 이야기가 뭔데?
벽장 속에서 보는 여러 가지 세계 이야기에요. 벽장 안에 들어가면 미래를 볼 수 있거든요.
엥?
진짜예요.
미래를 본다고?
미래를 보기도 하고, 완전히 현실과 다른 세계를 보기도 해요.
호오….
정연은 경수의 말이라면 지금같이 다소 허무맹랑한 말도 믿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굳건했다.
내가 도와줄게.
네?
내가 도와준다고. 그 영화, 우리 방송국에서 틀자.
경수는 중학교 3학년 때 자신의 유일한 친족인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죽은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하연에게 입양되었다. 하연은 이미 이 년의 수행을 겪고 완전히 귀의한 상태였다. 종교계가 들썩였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목사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교회 담임목사의 유일한 자식이 사이비라고 불리는 종교에 완전히 귀의한 신도에게 입양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연의 입양을 막으려는 온갖 시도가 이어졌다. 특히 경수의 아버지가 속해 있던 감리교에서 경수를 끈질기게 회유했다. 하지만 신진리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종교였고, 신도 수도 삼백 명을 조금 넘을 뿐이었다. 교리는 불교와 일본의 진언밀교와 닮아 있었고, 수행의 과정으로 내세우는 샤크리파트 역시 인도의 종교에 이미 제시된 개념이었다. 수행의 과정이자 결과 중 하나로 내세우는 다르두리싯디(darduri-siddihi)도 인도의 요가에서 이미 설명하는 현상이었다. 당시에는 교주도 스스로 여러 명의 구루 중 한 명이라고 말하며, 구루라는 존재는 현실의 그림자에 있는 사람들을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자일뿐이라며 자세를 낮췄다. 물론 나중에는 구루 그 자체가 신의 경지에 이른 자로 교묘히 개념을 바꾸었지만, 그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세력이 나름 확장되고 난 이후였다.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심지어는 교회의 장로이기도 한 국회의원은 법률로 경수가 입양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종교계는 미온적이었다. 마치 일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다시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영국과 프랑스처럼, 그들은 신진리교가 경기도 절반가량의 토지를 구매하고 이백만 명에 가까운 신도를 거느리는 신흥 종교, 그들에게는 척결 대상인 대한민국 제 1의 사이비 종교로 거듭날 거라고는 꾸지 못했다. 더불어 한 언론에서 경수의 단독 인터뷰를 공개했다. 경수는 그 인터뷰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위하고 신경 쓰는 하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하연이 지금 힘든 나의 유일한 버팀목인데, 그러지 못한다면 너무 삶이 힘들 것 같다고 울먹였다. 제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눈물 섞인 호소로 인터뷰는 끝이 났다.
순식간에 여론은 반전되었다. ‘개독교가 또 개독교하네’라는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렸다. 결국 기독교계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연의 입양 신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인되었다. 경수는 자연스럽게 신진리교 교인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바쁘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에서 한 소녀에 관한 관심은 빠르게 식었고, 서서히 경수는 사회에서 희미해졌다.
경수가 신진리교의 신도가 된 첫날, 예배당에는 여성 신도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모두 나체인 상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경수와 함께 맨 뒷자리에 자리한 하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속옷까지 모든 옷을 벗어서 가지런히 갰다. 옆에 서 있는 신도들 앞에도 옷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무릎을 꿇은 하연은 경수에게 옷을 벗으라고 눈짓했고, 경수는 옷을 벗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으니 자신의 성기에 난 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경수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하연은 어느새 눈을 감고 기도 중이었다. 백 명이 넘는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예배당에서 나체로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고 기괴했다. 심지어 경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경수를 제외한 모두는 이를 전혀 기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손을 경건하게 모은 채 구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경수 앞에 나타난 남자는 파안대소하며 경수를 비웃었다.
고작 네가 오고자 한 세계가 여기야? 참 너답다.
구루가 등장하자, 기도하고 있던 모든 여자들은 기립했다. 구루의 긴 머리와 건장한 체격은 검은 도포 때문에 더 부각되어 보였다. 구루를 보는 여자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마치 그들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존재인 것처럼, 눈에 조금이라도 그를 더 선명하게 담고자 했다. 구루는 벌거벗고 있는 여자들을 보고 한마디만 한 채 사라졌다.
더 나은 세계와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해라.
구루가 사라지자, 다들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방언이 온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넓은 예배당이 많은 사람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소리로 건물이 무너질 수 있다면 애초에 무너질 만큼 크고 어지러웠다. 남자도 방언만큼이나 큰 목소리로 경수를 비웃었다.
가관이다, 가관이야!
편두통이 온 경수는 나가려고 했지만, 이내 하연에게 제지당했다. 그때, 구루가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왔다. 구루는 경수에게 다가왔다. 구루는 경수에게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너를 해하고자 하는 세계로부터 이제는 안전할 것이다.
경수에게 이 말을 남긴 구루는 다른 신도들에게 이제 예배당을 떠나 각자에게 주어진 수행을 계속하라고 명하고 자리를 떴다. 이내 사람들은 곧바로 방언을 멈췄다. 마치 방언을 한 번도 안 했던 것처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옷을 입고 하나둘 예배당을 떠났다. 예배당을 떠나는 그들의 시선은 경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연은 경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는 선택받은 거야.
경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의 말이 구루와의 성관계를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