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go Dec 11. 2023

행복은 됐으니 조용하기나 했으면 좋겠다(1)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양극성 장애 환자가 된 이후로 행복하길 바란 적은 없다.

다만 그냥 무탈한 날들이 지속되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날이라도 좋으니 나를 그냥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사실 나는 행복이란 개념을 잊으려고 한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길 바라지만, 정작 그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행복을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복이 어떤 것이라고 정의한 후에는 그 이외의 모든 상황은 행복이 아닌 것, 불행이 되버리니까.

그래서 나는 행복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애초에 무의미한 개념이라고 생각할 뿐.


양극성 장애와의 동거를 시작하면서 지난 9년 동안 배운 게 많다.

세상에는 긍정이나 희망 따위로 넘을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

포기 또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

인생의 상당 부분은 운이라는 것.


이외에도 자기 관리하는 방법 등 여러모로 배운 게 많지만 그중에서 '포기' 혹은 '체념'이 사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양극성 장애 환자가 된다는 것은 삶의 일부분을 상실하고, 이전의 삶을 포기한다는 뜻이니까.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양극성 장애가 발병한 후에는 절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거의 모든 환자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심리학을 전공했던 나조차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정신과에서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은 날 쓴 일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앞으로 나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흐를 것이다.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내가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들에 대해 포기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이전 04화 이별의 기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