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송 Mar 24. 2021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다루는 <규칙>.

킬링 디어(2017)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최근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감독들 중 한 명이다. 2009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위어드 웨이브의 대표주자이기도 한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2009년 칸 영화제에서 <송곳니>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거머쥔 뒤, 가장 최근에는 2018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스 위어드 웨이브는 초저예산 독립영화들이 주를 차지하고 있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도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다. 그의 영화 서사에서도 인물들을 둘러싼 수많은 제약들과 규칙들은 그런 그리스 영화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 위어드 웨이브 작품들은 그들의 찬란하고 혼란스러운 신화를 닮은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영화인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작품들은 이질감과 위화감이 느껴지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을 지녔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킬링 디어>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어쩌면 불쾌할 정도로 개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며, 그가 어떻게 관객들을 자신의 신화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작품이다.



  

  <킬링 디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작품의 원제가 <The Killing of a Sacred Deer(신성한 사슴 죽이기)>임을 알아야 한다. 사슴을 죽이긴 죽이는데, 그 사슴이 신성하다는 것이다. 감독은 신이 아끼는 사슴을 실수로 죽인 아가멤논이 가족의 파멸을 맞는다는 내용의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누가 그 신성한 사슴을 죽였는지, 누가 그들을 응징하는 신의 역할인지, 그리고 누가 희생되는 신성한 사슴이었는지가 해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힌트일 뿐, 두 이야기를 동일시해서 누가 진짜 <킬링 디어>의 신성한 사슴이었는지를 확정 지어 다양한 해석을 막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아닌 <킬링 디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므로, 신화가 주가 되는 비평은 최대한 자제하고자 한다.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그 비극의 무엇을 닮았는지다.

  내가 규칙을 주제로 삼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킬링 디어>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작가의 통제가 강조되는 부조리극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고,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극 중의 절대적인 규칙을 상징하거나 그 규칙에 철저히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로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대부분의 영화들과는 다른 접근을 요하는데, 상당히 건조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듯한 형식을 갖춘 연기도 일종의 감독이 세운 규칙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함이다.

  의사인 스티븐은 수술 도중 사망한 환자의 아들인 마틴에 죄책감을 지닌 인물이다. 스티븐의 불찰로 인해 환자가 사망까지 이르렀는지는 영화는 대답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태도에서 스스로 떳떳하진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사라는 권위에서 오는 오만에 취해 있던 스티븐은 저항할 수 없는 마틴의 규칙 앞에서 죄책감만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에 좌절한다. 오만한 인물을 응징하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구조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절대적 존재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없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권선이 없고 징악만 남은 신화에서는 희망 대신 인간사에 대한 통찰만 강조한다.

  마틴의 가족 한 명을 희생시키라는 명령은 정작 당사자인 스티븐이 아닌 그의 가족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의문을 가진 스티븐의 아내, 애나는 마틴을 찾아가 묻는다. 마틴은 그런 애나에게 스파게티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의 아버지가 스파게티를 먹는 방법을 몰랐음에도 자신이 그의 먹는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유전을 넘어 연좌제처럼 보이는 그의 사고방식은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류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자연에게는 공정이 없지만, 어쩌면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이에게만 보복하는 마틴의 방식이 비교적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틴이 어떻게 누군가의 몸을 망가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규칙에 무릎 꿇는 인간의 모습이지 그 개연성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는 왜 비극인가? 오만한 자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극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작품이 비극인 이유는 신이 벌을 취소했음에도 죄를 지은 아가멤논의 가족들이 서로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마틴이 어쩌면 벌을 이미 취소했거나, 끝내 누군가가 죽지 않았다면 벌을 내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다. 스티븐의 손으로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애나와 킴, 그리고 밥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스티븐의 애정을 사려 노력한다.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하는 노력이 다른 가족의 희생으로 이어질 수 있음에도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은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게 마틴이 그들에게 내린 벌의 완성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닮아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들은 규칙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억압된 이들의 저항과 고찰을 독특한 규칙으로 작동하는 세계 속에 담으며 현실을 이끌어내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영화라는 규칙도 함께 말이다.

이전 04화 마틴 스콜세지가 다루는 <몰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