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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의 이름으로: 미조구치의 성차 신화 쓰기>

미조구치 겐지, <산쇼다유>, 1954

by 송전탑 Mar 10. 2025

 미조구치의 <산쇼다유>에서 가장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지점은 왜 제목이 다름 아닌 ‘산쇼’를 향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안주와 주시오 남매를 자신의 노예로 복속시킨 호족 ‘산쇼’는 생각보다 스크린의 지분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마치 주시오의 승리를 징표하기 위한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일 만큼이나 필요 이상으로 등장하지 않는 ‘산쇼’와 닮은 인물이 영화에서 한 명 더 존재하는데, 그는 다름 아닌 남매의 아버지인 ‘타이라’다.

 타이라는 귀양을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자신은 절대 (지역과 가족을 동시에 함의하는) 이곳과 헤어지지 않고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는 저주어린 상징적 유언을 남긴다. 이처럼 초반부에서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는 타이라가 영화에서 기능하는 역할은 자신이 사라진 자리에 ‘언어’를 남기는 일, 그것 하나다. 특히 주시오에겐 ‘그 어떤 역경에도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강조하며 집안의 가보였던 불상-남근을 손에 쥐어준다. 이 남근은 훗날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타마키가 주시오를 아들로 인정하게 하는 촉각적 표상을 수행한다. 

 남매의 어머니이자 타이라의 아내인 ‘타마키’는 남편의 뒤를 좇는 길에 오르게 된 남매에게 영화의 14분경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주, 주시오, 우리는 지금 너희의 아버지가 지났던 길을 똑같이 지나고 있어.”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밀란 쿤데라가 설명하듯,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한 가지 방법은 떠난 이의 의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타마키를 비롯한 타이라의 가족들은 친정으로 돌아가서 지내라는 유언을 배신하고, 그의 언어를 가부장적으로 전유해버리고 만다.

 이러한 언어의 가부장적 전유 없이는 <산쇼다유>의 내러티브는 가능할 수 없다. 이는 영화가 남겨진 가족들이 산쇼 세력에 의해 착취되는 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인데, 특히 이름의 상실은 그들에게 암시적으로 이뤄지는 또 다른 영역의 착취다. 산쇼의 아들인 ‘타로’는 대안적 남근의 지위를 표상하며 남매에게 각각 ‘무츠와카’와 ‘시노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사람들은 타마키를 가리키는 ‘나카기미’의 이름을 복수에게 중복적으로 호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조구치 겐지는 영화에서 이러한 성차가 발생하는 이유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미조구치의 성차는 이리가라이의 전제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쇼다유>는 남성의 이름으로 남근의 신화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주시오가 불상-남근을 끝까지 잃지 못한 것처럼, 안주가 타살(산쇼)과 자살(타이라) 사이에서 선택지 바깥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의 영화는 내셔널리즘의 기계적 전회에 그쳐서, 여전한 이항대립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좌절한 것처럼만 보인다.

 영화의 결말은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 두 작가가 시차를 두고 남근-로고스가 정점에 치닫던 양차의 패전을 어떻게 검토해야하는가에 대해 모색했기 때문이다. <산쇼다유>의 주시오는 아버지인 타이라에서부터, 산쇼, 타로, 그리고 관백으로 이어지는 남성의 연쇄적인 계보 속에서 부단히 인정받으려 분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한동안 자신의 주인이었던 산쇼의 언어에 철저히 부응하면서도, 어떤 계기 이후에 산쇼의 아들인 타로의 언어가 담긴 편지를 무기 삼아 자신의 권력을 회복받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반면 <파리, 텍사스>의 트래비스는 이미 언어를 상실한 채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내 영화의 내용은 트래비스의 남동생인 월터가 내내 길을 잃고 방황하던 트래비스를 발견해내곤 그를 다시 가족에게로 돌려보내려는 기획으로 이뤄진다. 영화는 트래비스의 품에 그의 아들인 헌터를 안겨주며 마치 ‘아버지 노릇’을 다시 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제인과의 반쪽짜리 대면을 보여주며 남근적 응시를 폭로한다. 그래서 주시오는 언어의 회복을 통해 타마키를 재회하는 한편, 트래비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와 마찬가지로 제인과 재회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언어를 잃고 방황한다. 각각의 결말부는 두 영화가 가진 태도가 가장 강하게 대비되는 대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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