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욕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세상에서 만나는 냉랭한 공기는 익숙합니다. 내가 걸어 나온 세상에서 만나는 나의 감정들은 시대에서 요구하는 '이성'이라는 말로 늘 뒤편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불쑥 찾아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지요. 그래도 자주 할 수 있을 만큼 부지런하지는 않아요. 내 욕망이 몸에 힘을 힘껏 불어넣을 때면 대책 없이 들이대는 부류가 맞을 겁니다. 새삼스레 '우정'을 들먹이게 된 것은 대체로 우리 사회에 잘 풀어내지 못하는 말, 우정에 관하여 열렬하게 이야기를 나눈 열여덟 소년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친애(親愛)'는 권위의 냄새가 다소 풍기는 말 입니다만 우리말로 바꾸기가 참으로 어려워서 적절한 말을 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우정(友情)'이란 말로 표현되곤 하지만 이 말에는 한정적인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뤼시스』에서 '필리아( Philia)'로 설명했는데 '에로스(Eros)'와 구분 지어 진정한 우정을 위한 관계로 합리성을 전제하여 구분하고 있더군요. 억지로 꿰어 '벗 사랑'이라 할까요. '벗'은 '친(親)'으로, '사랑'은 '애(愛)'이니까요.
우정의 시작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시키는 일을 행위로 움직일 때 갑자기 불쑥 찾아가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정은 꼭 어린 시절에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십 대에 경험했던 우정이란 감정을 생각해보면 그 힘이 오래가는 경우보다는 추억의 한 장면으로 박제되어 있지요. 하지만 십 대 겪었던 우정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꽤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것 같거든요.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우정을 경험할 기회를 빼앗아간 교육환경은 너무도 슬픈 21세기 우리 사회의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마다 일반화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의 우정이 있기에 세상은 그만큼의 조화로움이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조선 시대에서 전해지는 깊은 우정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연암 박지원과 백동수의 이야기부터 박제가와 김정희의 우정, 저 또한 잃어버린 우정과 새로 얻어 품은 우정의 힘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지요. 하지만 부조리한 사회 현상들과 상식의 결여, 부재와 결핍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편견이 앞서기에 우정이란 말은 완전하게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우리 사회에 부재중인 '우정'의 모습은 다른 말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정이란 이름으로 지속하는 ‘이해관계’이겠지요. 나의 욕망에서 출발하는 그 시작의 순수성이 사회를 향한 욕망으로 확대되어 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는 나의 욕망의 순수함이 사회에서 만들어 각인시키는 허위 욕망으로 잘못된 길을 따르게 되거나 인간을 향한 순수한 욕망이 변질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한 대상을 향한 순수한 욕망은 친구나 부모에 의해, 학교 또는 한 집단과 사회의 체제에 의해, 서서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학교폭력과 소외, 학생과 교사들과의 반목, 선후배 간의 갈등들, 우정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너무 많은 우리의 환경에서 실종된 우정은 당연히 꽃을 피우기가 어렵습니다. 우정은 실종되었거나 잃어버린 감정인 것입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몇 해 전 겨울, 우리를 들쑤시게 했던 젊은이들의 '안녕들 하십니까'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면 그 대자보에 담긴 이 사회를 향한 날 선 아우성들에 가슴이 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우정의 힘도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공동체로 느껴질 연대의 힘도 찾아보기 어려운 저들만의 아픔이 있으니까요. 홀로 주체로서 소리 내는 것도 이 사회에서는 큰 용기일 수 있습니다.
우정의 이어짐은 좀 더 깊어진 나의 욕망에서 가능합니다. 이십 대에 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그 친구의 학교로 가서 막연히 정문 가까이 있는, 시멘트로 만든 관중석에 앉아 있었지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대상을 막연히 기다리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 또한 행운아였기에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었고, 우린 그저 교정을 거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헤어졌습니다. 그런 시간이 아주 오랜 시간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해 왔던 것입니다. 여전히 내 마음이 부르는 벗으로 있으니 말입니다.
나만을 위한 욕망이 채워지고 지속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대상의 마음도 역시 필요합니다. 그 대상의 마음을 얻기까지 관계를 위한 나의 공들이기가 시작되어야 하는 거지요. 대상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나의 마음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때로 스스로 만든 치명적인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만큼의 대상을 향한 시간의 흐름과 귀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시간을 그 대상을 위해 얼만큼이나 쏟아부었는가에 따라 가능성은 달라지곤 하지요.
우정은 반드시 나의 것을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것을 지키게 해 주는 것을 뜻하기도 하죠. 일상에서 누린 자신의 시간을 털어놓고 귀 기울여 주는 내 앞의 대상을 통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은 아닐까 싶답니다. 나의 '있음'을 내 앞의 대상의 눈빛에서, 끄덕임의 작은 몸짓에서, 희미하게 웃는 입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을 건네는데 의심 따위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나를 드러낼 때 우정은 실존이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우정'은 또래만의 특정된 대상을 의미하고 있기에 더욱더 우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마음들을 놓아 버리게 하지요. 외국동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등장하는 여섯 살 된 꼬마 제제와 마흔이 넘은 뽀루뚜가 아저씨와의 우정을 우리의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권위를 강요하는 사회, 서열로 선후배를 나누는 문화 속에서 제제와 뽀루뚜가는 그저 동화일 뿐이지요.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에서 우정이란 참으로 담기 어려운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리적 나이라는 그 숫자는 우리를 늘 따라다니고, 대화를 이어가기는커녕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을 마음껏 드러낼 수도 없게 합니다. 나이가 많은 대상 앞에서 제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면 이런 말을 듣는 현실이니까요.
너 지금 어른에게 말대꾸하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어른이라는, 나이가 많다는, 사회적 위치가 강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듣고만 있거나 반박을 할 수 없게 합니다. 설사 그 대상의 말이 옳지 않거나 다른 생각을 가졌다 해도 이럴 땐 그저 '침묵이 금이다.'라는 격언을 곱씹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해 온 아이들에게 말도 제대로 못 한다고 하거나 소통이 안 되는 이 사회를 한탄하는 이 현실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정은 아주 경이로운 관계를 맺게 해 줍니다. 나이와 성별, 사회적 관계, 인종과 국경,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마음이기도 하니까요. 관계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들이 자리 잡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회는 훨씬 유연하게 작동될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 그 사람으로 맺어지는 관계망 속에서 사회는 건강한 나무들로 숲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 숲의 그늘에서 공동체는 선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지요.
우정의 갈등은 공들이고 인정하면서 굳어집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서로에게 갈등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들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질 수 없거나,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때도 있으니까요. 아주 소소한 일들에서도 우린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갈등은 관계를 더 공고히 하는 계기를 주기도 하지만 영원히 결별하는 순간을 만들어 놓기도 하지요.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대상을 함부로 대하거나 약속 지키기를 얕잡아 본다면 생길 수 있는 치명적인 일들이 있지요. 그것들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것으로 세상살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대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나뿐만 아니라 타인을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많은 인내와 공감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때론 단호하게, 때론 따뜻하게 그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내 마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우정은 나에게 자부심을 줍니다. 내가 한 대상에게 작은 위안일 수도, 때론 힘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공을 들이게 되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되돌아보며 생기는 기쁨을 만날 수 있죠. 그리고 자긍심을 찾도록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그 대상이 얼마나 많은 보물을 가졌는지를 알려 주고, 자신을 알아차리게 해 주는 데 조력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주 특별한 관계는 시간을 넘나드는 우정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홀로인 깊은 밤에 전화를 겁니다. 내가 부르는 이름으로 친애하는 벗에게 노래를 청합니다. 벗이 다행히 마음으로 그 순간 통했다면 최백호부터 김광석, 신해철까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반주 없이 들려주곤 합니다. 벗은 내 귀에만 들리는 노래를 부르지요. 내가 청년기라면 꽤 낭만적이라고 마구 자랑했을지도 모릅니다. 올해로 십 년을 채우는 내 오랜 벗이기에 혼자만의 유쾌함에 밤의 긴 고독은 열망에 밀려납니다. 우정의 힘은 누군가에게는 햇빛이 되기도 하지요. 친애로 소통하는 작은 힘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이 올 수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우정의 힘이 공동의 선을 쌓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실종된, 혹은 우리가 잃어버린 채 찾고 있지 않은 마음인 '우정'또는 '친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가까이 있는 대상과 지금 함께하여 마음을 주고 기댈 수 있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열릴 수 있다면 하고 말입니다. 우선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교육의 환경에 변화가 와야 하겠지요. 그 변화가 너무 더디게 올 것이기에 더욱더, 지금 내가 주변에 건네주어야 할 우정, 벗 사랑이 넘쳐나길 바라게 됩니다.
‘마음 맞는 사람을 얻게 된다면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겠네.’
추사 김정희가 쓴 시의 일부입니다. 이 시는 소년 김정희가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온 스승 박제가를 부러워하며 쓴 시라고 합니다. 박제가는 김정희에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지식을 알려 주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꿈꿀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승과 제자로서 맺어진 그들의 우정은 김정희가 여섯 살 때 써서 대문에 붙인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씨 때문이었답니다. 삐뚤삐뚤한 글씨에서 느껴지는 힘은 자신이 쓴 글씨 못지않다고 생각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글씨를 쓴 소년을 만났던 것이지요. 이 역시 우정의 첫 시작인 불쑥 찾아가기였던 것입니다. 그 후 몇 년 후에 이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가 되었던 겁니다.
개인들의 깊은 관계 맺음은 그 사회의 부정의를 향해 함께 소리치게 되는 힘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나눈 따뜻한 기운들이 경직된 사회를 유연하게 해 주며, 상호 간의 조화로움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지요. 우정은 격한 이데올로기나 강제된 규범들에 의해 기만당하는 일들을 함께 극복해 나가도록 해 줄 수 있는 공동의 선을 만들어 나가는 동력입니다. 내가 다른 대상에게 종속된 관계가 아니라 나이와 학벌,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한 인격체로서 서로 마주 보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들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함께 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을 바람에 실어 보낼 우정이, 친애가, 벗 사랑이 우리에게 '지금 함께할 수 있는 시간'들로 열리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