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정치적 편식을 한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오래전 오늘, 내게로 온 짧은 글이 떠올랐다.
어른에게 나는 장난감으로 길들여집니다.
주말을 보내고 한 주가 시작되는 진한 어둠의 새벽녘에 만난 이 글에 꽤 오랫동안 매여 있었다.
어른 안 하고 싶어요.
두 번째 온 글이다. 십 년 전 우리 다이어리에 기록된 글이다. 그때만 해도 ‘싸이월드’가 압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 홈피로 들어가 비공개 다이어리를 열고 그날의 시작에서 다가오는 느낌들을 쓰곤 했다. ‘우리 다이어리’를 만들어 십 대들과 소통을 하던 시간들이었다. 열여섯 소년의 하소연에 나는 다음의 글을 기록해 두었다.
내 아이들을 위해 성장기에 꼭 필요하다는 우유와 함께 흡사한 유제품을 아침마다 우유주머니에서 꺼내 놓는다. 오늘은 내가 제일 먼저 우유를 꼭 마셔야지. 주머니 속 우유를 냉장고에 밀어 넣는다. 5초도 지나지 않아서 우유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잊는다. 그리고 종이 필터를 바꾸고 원두커피를 내려 스트롱을 만든다. 우유가 그렇게 매일매일 쌓인다. 낼 아침에는 우유를 꺼내면서 꼭 마셔야지. 쌓이는 우유를 보내지 말라고는 말을 못 한다. 내 아이들을 위한 것이니까. 하나씩 꼭 마시라 해야지~ 쌓여가는 오백 밀리 우유를 이백 밀리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오밀조밀하게 쌓이는 모습만 바뀌었다.
“우유 마시지 그래~”
웅..
“키 커야 한다며?”
웅.. 다른 거 마실 거 없어?
“우유 마시지..”
웅..
드디어 오늘 아침 우유를 내가 먼저 마셨다. 정말 안 넘어간다. 문득, 왜 마셔야 하지? 몸의 건강을 위해서, 이제는 마셔주어야 할 때이니까. 그런데 얹힌 거 같다. 그놈의 우유 덕에 내 마음의 건강이 뭉개진 거다. 커피 향도 우유 맛에 이상해졌다. 지금도 인상을 쓰고 있다. 아, 괜히 마셨어. 왕창 억울해하고 있다. 그 향기로운 내 아침을 망가뜨린 우유! 이제 안 마셔. 절대로 아침부터는 더욱!
우유는 어른이다. 그 순간 우유를 마시는 난 십 대였다. 엄마가 마시라고 하는 대로 마셔야만 하는. 그런데 어른인 나는 아침에 우유를 마신 것으로 하루 종일 억울할 것 같다. 나도 먹기 싫은 우유를 몸에 좋다는, 키가 크는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건넨다. 냉장고에 쌓이고 있는 우유를 여전히 아침마다 배달되도록 하고 있다.
무엇인가에 ‘길들여진다’는 의미를 십 대는 어찌 받아들일까? 나 자신에게도 물었지만 이미 어른이 된 나도 답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내가 갖고 있는 의미는 일반화되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 길들인다는 것은 나와 특별히 가까워진다는 의미이기에. 내 일상의 한 부분이 소년에게 어떻게 이해되었을지, 그때도 지금도 알 수는 없다.
부모는 아이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 거라는 말을 해야 했기에 쓴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아이들에게 ‘어른’은 무척 자유롭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강자일 뿐인가 싶다. 지독히도 변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크게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어른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살아나온 시간과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학습에 길들여져 있다. 지식이 많다고, 살아온 시간이 길다고 하여 결코 지혜롭다고는 할 수 없듯이 어른이라는 물리적 나이가 모든 판단에 합리적이고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온라인 카페 등 SNS를 통한 여러 방식으로 개인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 표현한다. 또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공감을 하기도, 그저 습관처럼 지나치기도 한다. 적어도 언어의 소통은 원활한 듯 보인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글로써 만나는 시간이 자꾸만 쌓여 가면 갈수록 대상과 나누던 눈빛과 목소리가, 얼굴의 표정들이, 숨소리들이 지나온 시간에 머물러 박제된 듯하다. 언어의 소통이 단절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대상의 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저, 듣기로 끝나 버리는 경우는 아닐까 싶다. 내 마음과 너의 마음이 공감을 이루는 과정이 사라진 말은 그저 허공에서 울리는 소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말이 너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반응 이외에는 남아지는 울림이 없는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인 듯 보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어른들은 자신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잘 표현한다. 대부분은 내가 바라는 것을 표현하는데 익숙할 뿐이다. 아이들은 듣는데 익숙해져 있다. 자신의 생각과 같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그저 듣는다. 사실은 그때뿐인 거다. 어른들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사회에서 요구하고 타인들의 시선에 습관적으로 길들여져 있다.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만 눈에 담고, 말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늘 어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런 어른의 모습을 아이들은 ‘잔소리’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요구하는 것은 대체로 반복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른이 금기한 것들을 하나씩 풀어놓을 수 있도록 ‘금지한 것들’을 ‘금(禁)’할 때 어른과 아이라는 그 경계는 무너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어른’이라는 말에 규정된 삶은 없지 않던가. 사전적 의미는 ‘다 자란 사람’ 일뿐이다. 물론 여러 개의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다 자랐으니 자기의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칭하기도 한다. 지위나 나이, 항렬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남의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며, 결혼한 사람을 표현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어떤 어른이 되느냐에 아이들에게 다르게 느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과연 어떤 어른인가?
어느 정치인의 말대로 정치적 편식만을 해 여전히 1번 만을 고집할 게 아니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일에 삶은 정체되었는데 미래 세대에게 과거를 학습하도록 요구한다. 현재 내가 볼 수 있고, 이 사회가 보여주는 것만을 바라보고 따르며 치열하게 살아가도록 길들여진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