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오늘날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라 못하겠다. 이 작은 책이 긴 호흡으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책으로 들어가는 말에 꽤 오래 시선을 멈추었다. ‘벗’이라는 말의 느낌이 참 좋다. 대상과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 말의 힘은 살아오면서 힘겨운 일들에 늘 힘이 되어 주곤 했다. 이 책에서 몇 가지 벗의 이야기를 꺼내 다시 음미해 보고 분주하게 거리를 지나는 자동차 행렬 속에 갇히곤 하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위로였으면 한다.
조선시대 심대윤이라는 학자는 마흔의 나이에서야 생계를 꾸리기 위해 당시에는 비천한 장인이나 하는 일로 간주한 소반을 아우 둘과 만들면서 깨달았다. 명문가의 후예로 특권층으로 누리던 삶에 없었던 ‘마음의 한가로움’을 일을 한 후 느낀다며 ‘크고 작기를 가릴 것 없이 스스로 먹고 갖은 힘을 다해 먹고산다는 점에서 모든 일은 똑같다’고 그의 글 『치목반기』를 남겼다. 직업에 대한 귀천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현대에서 여전히 천 년 벗과의 대화는 내 안에서 갈등하는 사회를 어찌 바라보아야 할지 성찰의 시간을 준다.
부동산 투기, 집값 상승으로 원금이 껑충 뛰어오른다고 들리는 정보들은 지역 작은 읍에서 살아가는 내게는 꿈만 같은 일이다. 고려 500년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규보가 지어 전하는 노극청의 사연은 충분한 위로는 되었지만 한국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몰염치가 일상화된 시절에선 허탈한 이야깃거리에 지날 수도 있다.
천년의 벗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맹목적인 허위욕망에 따끔한 충고를 이리도 멋들어지게 한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경우’를 다하려는 개인들이 많아지는 것이겠지 하면서도 국가를 이끌어가는 이들의 ‘경우 없음’은 대한민국사에 넘칠 것이니 후대인들이 역사를 접할 때 그 비루함이란 이루 말할 수도 없겠다.
고려 명종 때 노극청은 살림이 빈한하여 집을 팔려 내놓았는데 아내가 자신이 없는 사이 집을 살 때 낸 백은보다 세 근이나 많이 받은 일은 경우가 아니라며 집을 산 현덕수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에 현덕수는 “댁 혼자만 경우를 지키고 나는 못하게 하는 거요?” 엎치락뒤치락 서로 받지 않으려 했고 “내가 노극청만 못한 사람이 될까 보냐?” 되돌려 받은 세 근을 절에 바쳤다는 이야기이다.
평범한 사람 노극청의 결코 평범치 않은 이런 행위를 실록을 편찬하던 이규보는 그 사실을 『고려사』에 덧붙여 실었다고 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시대정신이 된 현대에서 사람은 없고 돈만 넘치는 꼴사나움은 천 년 후의 벗에게 벌써 부끄럽다.
저자는 ‘한 여인의 우울한 죽음’에서 1702년 현재의 경북 구미시에 살았던 박향량이란 여인이 강물에 투신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참 뒤에 조정에서는 그녀를 ‘열녀’로 인정했다. 그녀의 행동에 열녀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 고을의 사대부들은 고을의 명예를 지키면서 이런 여성을 위로할 유일한 제도적 장치가 그것뿐이기에 호응했던 것이라 한다.
하지만 평범한 양민 여성이 누구보다 유명한 여인이 됐던 이유는 그녀의 선택이 실존적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이라 보았다. 향량은 남편의 학대로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가족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그야말로 거추장스러운 인간이었다.
한국사회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 불리기도 한다. 자살하는 이들의 명예를 위해 우린 또 그렇게 명명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주검을 발견할 수 없다면 금지된 죽음의 행렬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 개인의 명예는 결과에 덧 씌워지거나 입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백여 년 전 한 여인이 선택한 자살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오히려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모욕이다. 죽음마저도 사회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는 삶의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삶의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한 시대, 생명이 자본에 의해 거래되는 인간성 상실이 일상이 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와닿는 러시아의 우화 ‘독수리와 꿀벌’에서 강자의 독수리와 약자인 꿀벌의 대화는 한국사회의 강자 독식을 통쾌하게 드러낸다. 권력자들의 탐욕과 부패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비웃음이 등장한다. 다만 민중들의 분노가 거대한 물결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또 다른 이유를 묻게 한다.
미디어를 통한 소통의 한계는 접속의 시대에서 빈곤한 접촉의 부재에 있었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빠른 뉴스를 만들어내지만, 수용자의 판단을 강자들의 논리에 맞추도록 급하게 퍼져 나간다. 결국,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회적 속도는 틈을 주지 않는다. 정보를 판단할 시간적 여유, 사유의 삶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구리울음소리를 듣는 이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조선의 이옥은 ‘후와명부’에서 개구리도 사람과 같아 그 소리가 감정에서 생겨난다고 했다. 이옥은 세상의 온갖 소음 속에서 익명의 군중들이 내뱉는 갖가지 소회와 발언을 분별하여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한적한 동네에서 살아가는 나는 개구리울음소리가 텅 빈 시간에 남겨진 홀로 있음을 채워주는 정겨운 소리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울음이 광장에서 소리 없이 전해지는 민중의 통곡처럼 온 밤을 뒤척이게도 한다. 차가운 길 위에 누운 사람들과 나의 불안은 들끓는 영혼들을 찾아 헤매며 개구리울음처럼 이 시대, 이 어둠을 가른다.
2015. 02. 25. 안대희 『천 년 벗과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