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찾아온 다섯 가지 기회
가을이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걷고 싶었다. 집 주변의 깜깜한 시골길을 따라 걸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문드문 별빛이 보였다. 여전히 덥지만, 신기하게도 불어오는 바람에 선선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바람을 타고 가을이 피부에 살며시 스며들자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로 시작하는 윤동주 <별 헤는 밤>이 떠올랐다.
시인은 현재 고독한 상황에서 별을 바라보며 과거를 추억한다. 그리고 멀리 북간도에서도 같은 별을 보고 있을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시인에게 별은 시공간을 초월하게 해주는 매개체이자 부끄러움을 자랑으로 바꿔주는 희망이다. 시인이 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별은 더 이상 과거에 죽은 빛이 아닌 우주에서 유일한 현재의 생명이 된다.
밤하늘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현재 우리에게 보이는 밤하늘의 별은 과거에서 온 빛이다. 만일 지구에서 1억 광년 떨어진 별이 폭발하면 그 빛은 1억 년 후에 지구에 도달한다. 즉 현재 지구에서 보는 별빛이 사실 1억 년 전 과거의 빛이라는 말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은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해 달려와 우리 눈에 박힌다.
별빛은 반짝하고 빛나는 우리 인생과 닮았다. 현재의 별빛이 아득한 과거에서 왔듯 현재의 나는 태초부터 이어져 온 생명의 연장선 위의 한 점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미래의 후손에게 생명을 잇는 연결고리로써 우주의 시간을 품은 삶을 살아간다. 나의 일생이라는 시간 속에서도 과거는 현재에, 현재는 미래에 영향을 끼치며 한 인생을 완성해 간다.
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세상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70억 개의 인생이 있다. 그러나 인간 존엄성이 사라지고 생명 경시 풍조가 세상을 지배한 지 오래다. 세계적인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서울에서 출퇴근 지하철을 한 번이라도 타본 사람이라면 “사람이 너무 많아!”라며 짜증을 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나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는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분노한다. 우리는 저마다 의미 있는 반짝임을 간직한 인생을 고귀하게 여겨야 한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오연호 작가는 저서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에서 치열한 경쟁으로 영혼 없이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그는 ‘꿈틀리인생학교’를 통해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는 꿈틀거림을 현실화했다. 덕분에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개인이 어떤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현재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소명과 작은 실천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경제 분야부터 개인의 철학을 바꿔야 함을 느꼈다. 그동안 나는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고객에게 질 좋고 싼 가격에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 대기업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연호 작가의 말처럼 이웃을 사랑하려면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절실히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검증된 브랜드, 프랜차이즈 제품을 선호했던 나는 공정 무역, 공정 여행, 지역 경제 활성화, 개인 운영 매장 이용 등에 적극 참여해야겠다는 인식 전환을 맞이했다.
윤리 분야에서는 막연히 모두가 똑같은 기준 안에서 양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리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의구현’이라는 명확한 초점이 있어야만 성립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윤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울타리’가 아닌 ‘나만을 사랑하는 철창’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동네 주민들이 장례식장 건축 반대를 위한 촛불집회를 열었다. “아이들이 저승사자와 함께 등교할 수 없다”라는 말도 안 되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속내는 집값이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유대인 부모가 아이들을 상갓집에 자주 데리고 다니며 죽음을 통한 인생의 가치를 교육하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장애 학생 부모들이 특수학교 설립을 호소하며 지역 주민에게 무릎을 꿇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누구나 공공시설의 필요성을 알지만, 막상 자기 일이 되면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변한다.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가 주장한 것처럼 사회윤리의 목표는 정의, 개인윤리의 목표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데 필요한 공공시설은 나만을 사랑할 때 혐오 시설로 탈바꿈되는 위험을 늘 경계해야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우리를 사랑하며 사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마을 공동체와 협동조합의 예가 있다.
천안시는 전국 최초로 도심 속 ‘육아 품앗이’의 장을 열었다. 11곳에 운영 중인 ‘공동육아나눔터’는 가정에서의 육아 부담을 줄여주는 동시에 이웃 사랑의 나눔터가 되고 있다. 마을 공동체의 좋은 모델로 자리 잡아 전국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에 등장하는 ‘집시들의 해방구’ 크리스티아니아 공동체는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만의 철학을 인정받아 덴마크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우리나라에도 서로 돕고 희생하며 사랑하는 철학이 근간을 이루는 마을 공동체가 있다. 성미산마을, 인수동마을, 꿈틀리마을 등이 좋은 예다. 스스로,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는 마을 공동체의 모습은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준다. 이렇듯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가치와 정신은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 선한 영향력으로 퍼져나가야 한다. 집단주의에 빠져 외딴섬이 되지 않으려면 마을 공동체는 언제나 ‘더 많은 우리를 사랑함’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이상적인 협동조합의 모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힘썼던 호세마리아 신부가 네 가지 철학 인간 존엄성과 연대, 노동 가치와 교육을 강조하며 시민과 민주적인 모임을 가진 데서 협동조합이 출발했다. 세계 최대 노동자 몬드라곤 협동조합에서는 조합원 7만 4천 여 명이 일하며, 스페인 GDP의 10퍼센트를 책임진다. 우리를 사랑할 때 “사랑이 밥 먹여준다”라는 오연호 작가의 말을 가장 잘 실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도 수많은 협동조합이 있다. 한 예로 쿱비즈협동조합은 불합리한 가맹 시스템을 혁신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 최근에는 빨래방카페에 협동조합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도입해 공정 계약 문화 확산을 도모한다. 빨래방카페가 갑질의 그늘에서 벗어나 과거 우리나라 빨래터나 미국 빨래방처럼 이웃 관계를 맺는 소통의 장으로 거듭났으면 한다.
오연호 작가는 덴마크의 교육 환경이 사실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나도 30년 전 기억을 더듬어보면 서울 아파트에 살았지만, 이웃 간에 온정이 넘쳤었다. 몇 층 몇 호에 누가 사는지 알고 지내는 것은 물론, 김장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일손이 필요하면 이웃끼리 서로 돕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파트 경비원만이 나를 맞아주는 도시 문화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서로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내 안에 빛나는 별이 소중한 것처럼 내 옆에 빛나는 이웃 별도 소중하다. 별빛으로 가득한 밤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수많은 별이 저마다 따로, 또 같이 질서를 유지하며 빛나기 때문이다. 나 혼자 먹고살기에도 힘들다며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N포 세대, 30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불편하다고 해서 그른 것이 아니며 편리하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니다. 숨고 싶은 뙤약볕은 과일을 잘 익게 하고, 피하고 싶은 태풍은 바닷물을 순환시켜 정화 작용을 돕는다. 우리는 불편한 만큼 성숙해진다.
*이 글은 <서른 넘어 찾아온 다섯 가지 기회>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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