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둘째 엄마는 경력직이라고 했는가

네 속도를 인정해 주는 일

by 이음 Eum

역시나 또, 아이의 부족한 모습만 잔뜩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동안 가라앉았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들었던 말을 하나하나 천천히, 곱씹다 보니 오히려 기분은 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 집에서 한글을 좀 봐주셔야 할 것 같다는 전화를 시작으로 둘째 선생님과의 상담은 늘 즐겁지 않은 시간이었다. 항상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으며 하하 호호 웃음으로 끝나는 상담에 익숙해져 있던 엄마에게 이런 상담은 너무 가혹하다. 똑같은 엄마 밑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키우고 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 내가 뭘 더 했어야 하나. 그런 자책감에 빠져 아이를 더 다그치던 날들도 있었다.


아이는 입학하고도 한참을 한글 때문에 힘들어했다. 예고된 받아쓰기 시험은 최대한 연습을 시켜 보냈지만 날짜를 착각하거나 준비도 없이 교과서에 나온 겹받침 시험을 봐야 했을 때는 집에 돌아와 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실력과 노력보다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아이였다. 또 잘하는 친구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당황스러운 것은 엄마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잘하고 싶다면 그렇게 울지만 말고 좀 더 공부를 하라는 대문자 T스런 발언은 고이 접어 넣어 두었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데, 매번 이렇게 달래고 위로해 주는 것은 좀처럼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한글이 되지 않으니 수학 문제를 푸는 일도, 글밥이 있는 책을 읽는 일도 쉽지 않았다. 공부 가르치랴, 멘탈 관리 해주랴 힘든 것은 나도 마찬가지. 무엇보다도 문제는 나도 한글을 제대로 가르쳐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문자를 빨리 가르치면 상상력이 제한된다기에 7살 즈음에 한글을 가르쳐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럴 겨를도 없이 책을 읽다 한글을 뗐다'. 자랑이 섞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던 첫째 육아 경험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가 둘째 엄마는 경력직이라고 했나. 이 아이와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을.


그렇게 나도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고군분투하던 1년이 지났다. 지난겨울방학에는 아이의 독서력 향상에 집중했다. 매일 오전 10시, 식탁에 둘러앉아 1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아주 짧은 동화책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100쪽이 훌쩍 넘는 책으로 발전했다. 도서관을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흥미를 돋울만한 책을 발견하려고 애쓴 덕에 아이가 흠뻑 빠져 읽는 책을 발견한 것이다. 20권 정도의 시리즈이라 그 덕을 많이 봤다. 책 읽느라 놀아주지 않는 가족들을 원망하며 책이 별로라고 말했던 적도 있던 아이였는데. 틈만 나면 책을 읽고, 부르는 소리도 잘 듣지 못할 만큼 책에 몰입한 모습을 이 아이에게서도 볼 수 있다니! 매일 읽은 책을 노션에 기록했는데 차곡차곡 쌓여 2달 만에 280여 권이 되었다. 처음 1시간 독서를 시작할 때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결과다.


아이의 자신감도 많이 회복되었다. 나도 이렇게 글밥이 긴 책을, 이만큼이나 읽을 수 있고, 읽었다는 사실이 자존감 향상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물론 아이뿐만은 아니다. 나에게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된 시간이었다. 또 아이를 믿고, 아이의 속도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아니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일임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조급함은 조금 내려놓고, 아이를 믿어도 된다고. 아이는 저만의 속도로 잘 자라고 있으니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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