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돌봄의 길로 들어선 어느 워킹맘의 이야기5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이적의 어머니 박혜란 선생님 책이 내 책장에 꽂혀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이들을 믿어주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먼저 믿어 주어야 한다고. 자기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엄마가 어떻게 자신의 분신인 아이를 믿어줄 수 있을까.
나도 내가 믿어주는 만큼 자란다. 내가 나를 믿는 과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에 공간살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공간살림을 지속하면 할수록 더 나은 내가, 내가 바라던 내가 될 수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나는 지금까지 공간살림을 기쁘게 이어올 수 있었다.
언젠가 공간살림을 가이드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내가 이 프로그램을 지속했더라도 이 글을 쓰는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하게 ‘나의 기쁨’에 집중한 결과였다. 삶의 부정적인 관습이 올라와 나를 갉아먹으려고 할 때도 나 스스로를 믿고 나의 하루를 정성스럽게 살아내고 거기서 기쁨을 누리겠다는 나의 의지로 나를 지킬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놀랍게도 나는 이리도 나를 사랑하는 존재였다.
새벽마다 일어나 이 글을 쓰면서 지난 시간을 복기하고 또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회상하며 나에 대한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공간살림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시작한 이 여정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은 것은 바로 나였다. 공간살림을 함께하는 도반들의 포스팅을 읽으며 내가 공간살림을 시작하던 날들의 기억이 떠올라 설랬고, 도반들의 기쁨이 내 기쁨인양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알알이 구슬처럼 박혔다.
도저히 혼자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방황하며 바닥을 치던 날들을 지나, 나 조차 알지 못했던 나의 민낯과 마주하며 당황했던 날들과,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길 위에서 수없이 좌절하고 후회한 시간들을 지나 회피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 딛었던 그 작은 걸음들을 떠올리며 나의 언어로 나의 여정을 정리하는 작업은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어떤 부분은 글을 쓰기 전부터 괴로움이 올라왔고, 어떤 부분은 글을 쓰면서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글을 쓰는 내내 기쁨은 늘 나와 함께 했다. 기쁜 마음으로 쓸 수 있어 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이 글을 여러 번 읽고 고치며 나는 몇 번이나 울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목을 타고 올라오는 어떤 뜨거운 기운이 나를 감싸고 내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슬퍼서 우는것도, 기뻐서 우는 것도 아닌 그냥 나를 위한 눈물이었다. 내가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
첫날 보낸 <살림 메시지>에서 내가 파이널 에세이를 쓰기 전 사전 작업 마지막 문장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그 문장의 바로 앞 문장은 이런 글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자주 눈물 바람인 나는 별로 슬프지 않은
드라마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보다가도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해
자주 울곤 했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슬픈 드라마나 영화, 책 등을 피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엔 격하게 이입해
그렇게 눈물 바람이면서 정작 내 감정엔 무뎠고
내 감정 때문에 슬퍼서 울어 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린 것이다. 내 감정에 너무 무뎌서 나를 위해 울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나를 축복하며, 내 삶을 감사하며, 내 생의 기쁨을 생생히 느끼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저 나로 살기를 바라고 바랐던 내가 이미 그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온몸의 세포는 깨어나 나를 위해 춤을 추었다. 기쁨의 춤을, 환희의 춤을, 그리고 축복같은 나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되리라는 예언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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