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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나 May 25. 2021

관계가 어려운 역할 수행자 이야기

소속감이 주는 충만감


라이언 덕후인 둘째 놈.


학교 간다고 나서는 순간부터 애잔하고 보고 싶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애착이 강한 적이 있었던가. 고작 20대의 연애라고 부를 만한 몇 번의 연애에선, 남자 친구들의 불만은 하나같이 “넌 내가 없어도 잘 사는 애” 또는 “알아서 잘하는 애”였다.


분명 그건 아니었을 텐데, 표현이 부족했던 탓인지, 딱히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 같이 하는 취미보단 혼자 보는 영화나 게임에 푹 빠져있었고,  확실히 둘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들이 편했다.


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어리고 이기적인 내가 느끼기엔 굉장히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혼자 보내는 시간을 쪼개어 데이트 시간을 만들어야 하고, 운동복이 편한 내가 청바지나 스커트를 챙겨 입어야 하고, 씻어야 하고, 맘에 들지 않는 그의 친구들을 같이 만나줘야 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겨울 스포츠를 같이 해줘야 하고, 무엇보다 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말하지 않고 맞춰주는 것이 가장  ‘희생이었다. 당시엔 그런 연유로 나는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을 해야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냥 물과 공기처럼 곁에 있어도 의식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지만, 곁에 있는 것이 한순간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


어쨌든, 나는 연애도 소위 말하는 썸도 그렇게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하는 조금 사회화가 덜 된 사람임은 틀림없다. 확인되지 않는 감정의 기류들을 느끼며 밀당을 하는 단계에서 무척 설렘을 느낀다는 친구의 말과 다르게 나는 확인되지 않고 불안한 관계에서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관계가 조금만 길게 지속되면 매우 피곤함을 느꼈다. 너와 나는 연인, 너와 나는 부부, 너와 나는 친구. 뭐가 되었든 정의 내려져야지, 그 어느 경계에 선 관계라는 것은 썸과 로맨스라는 그럴듯한 말로 아무리 포장해도, 그냥 소모전일 뿐이었다.


애착도 집착도 쉽게 형성되지 않는, 조금은 무미건조한 감정을 가진 내가 소위 ‘내 것’이라는 바운더리 안에 누군가를 넣기 시작했을 때, 나의 애착형성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사건이 가족의 형성이었다. 정확하게는 소속감이겠지. 어느 그룹에 소속되는 순간부터 주어진 역할이 생긴다. 그때부턴 나만의 무언가를 줄여나가고 노력하는 것은 더 이상 희생이 아니라 역할 수행이 된다. 딱히 가족계획이란 것이 없던 나는 ‘출산의 적정 나이’라는 시기를 지나 양가 부모님의 눈치에 밀려, 밀린 과제를 해야 하는 학생 같은 마음으로 큰아이를 가졌다. 새벽에도 우유를 먹고 잠든 아이를 두고 눈을 감는 게 아쉬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낙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완벽하게 한치 의심할 것이 없는 ‘나의’ 살과 핏덩어리라니. 이제부터 나의 역할은 엄마. 그렇지 엄마지. 엄마라고 정의 내려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굉장히 충만한 소속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는 어느새 자라서 이제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다 걸리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기고 무엇보다 물과 공기처럼 조용한 존재는 절대 아니다. 가끔은 아이들의 요란스러움에 리모컨의 음소거 버튼이 아이들에게도 먹혔으면, 동물 마취총을 아이들에게도 쏠 수 있다면 슉! 불어 기절시키고 싶을 만큼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그들은 유일하게 나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는 존재인 것이다.


사회적인 공인에서 오는 소속감이라는 것이 개인의 애착이나 감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미 경험칙상 알고 있다. 소속감에서 나의 역할을 정의하고, 역할에 열과 성의를 다하다 보면 인정을 받고, 인정을 받다 보면 관계가 안정되고, 안정된 관계에서 애착을 강하게 형성하게 된다. 분명히 나는 관계는 서툴고 역할은 잘하는 사람이다. 규정되기 전의 관계에서 행동의 반경을 결정짓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느끼고 역할과 소속감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관계는 있되, 역할과 소속감이 없는 지금의 삶이 무척이나 힘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누가 봐도 너는 내 아들이고 내 소속이지. 이렇게 닮았으니. 하지만 빈대들. 엄마는 너희들 소속이지만 너희들은 엄마의 소속 이어선 안돼. 엄마보다는 훨씬 다양한 관계에서 역할 이전에 즐거운 희생과 배려도 배워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어느 순간엔 엄마품을 떠나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너희들 만의 소속을 찾아갔으면 좋겠어. 엄마도 이제는 하나씩 하나씩 엄마의 소속을 만들어가 보려고.


지금은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다만, 소속은 돼있으되, 정진아는 여전히 정진아 꺼라고 느끼해주는 물과 공기 같은 소속을 만들어보려고.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긴 마당에, 공부라는 것도 좀 해야지 않겠니.



#멈춰있던것들을_굴리다보면

#소속감이생기는날도_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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