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은 향이 강하거나 맛이 씁쓰름한 채소를 좋아하신다. 봄엔 씀바귀나 쑥이라면 가을엔 단연 생강이다. 생강차, 생강절편, 생강청은 물론이고 백숙이나 수육 삶을 때 넣는 생강편까지도 꼭 찾아서 드신다.
어머님과 합가한 뒤부터 매년 가을이 되어 햇생강이 나올 때면 우리집에서 하는 연례행사가 있다. 서산 햇생강을 넉넉히 사다가 껍질을 벗겨서 잘 씻어 말린 뒤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두는 것이다. 하루 날 잡아서 이렇게 간수해두면 다음 해에 햇생강이 나올 때까지 1년 내내 냉동실에서 곶감 빼먹듯 생강을 쏠랑쏠랑 꺼내어 편하게 쓸 수 있다.
올해는 작년에 갈무리해둔 생강이 아직 많이 남아있어서, 좀 더 있다가 생강을 살까 어쩔까 하던 참에 어머님께서 가을 초입, 독감 예방접종을 맞으러 집 앞 병원에 다녀오시면서 햇생강을 2kg이나 사오셨다.
"어머 그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오셨어요? 제가 나중에 사오려고 했는데..."
"어깨가 빙신이라 품에 안고 아장아장 걸어왔재. 농협에 들러본께 생강을 쌓아두고 팔길래, 햇생강 나올 때구나 하고 사왔다. 생강도 이라고 햇것 나올 때 사야 싱싱하고 가격도 더 싸야."
어머님께서 사오신 생강을 물에 잘 씻어 물기를 좀 뺀 뒤에어머님과 마주 보고 앉아 생강 껍질을 깠다. 햇것이라 숟가락으로 슬슬 밀어도 껍질이 술술 잘 벗겨졌다.
햇생강 손질할 때면 생강이랑 계피 넣어서 수정과를 만들기도 하고, 생강을 갈아서 매작과(타래과 또는 약과 라고도 부른다) 만들던 생각이 나서 생강정리가 끝나자 나는 수정과를 만들고, 딸은 매작과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들 어릴 땐 나 혼자서 이 두 가지를 충분히 하고도 체력이 남았지만, 지금은 이걸 다 하기엔 내 체력이 딸리는지라 혼자서라면 수정과만 만들고 매작과는 나중에 만들었을 텐데 딸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준 덕분에 매작과까지 한달음에 만들었다.
"어디 보자~ 이쁘게 만들어진 것은 손녀솜씨고, 커다랗게 만든 것은 엄마 솜씨구만. 맞지야?^^"
다 만들어진 매작과를 드시러 오신 어머님께서 매작과 모양을 보시더니 솜씨 좋은 딸의 작품을 바로 알아보신다. 곰손인 나보다 황금손인 딸의 작품이 훌륭한 건 당연지사.
이가 안 좋으신 어머님은 좀 단단하게 튀겨진 매작과를 많이 드시진 못하셨지만 생강 맛이 잘 나서 좋다고 하셨다.
오래오래 끓여서 뭉근하게 우러난 수정과에선 생강과 계피향이 진하게 풍기고, 생강 듬뿍 넣은 매작과에서는 알싸한 생강 맛이 확 느껴졌다. 3대가 함께 사니, 이런 것도 만들어 먹게 되는구나.
내가 어릴 땐 가을 무렵부터 겨울까지 집에서 여자들이 모여 앉아 이런 거 만드는 일이 늘상 있었다. 매작과에서부터 김부각, 고추부각, 들깨강정, 깨강정, 오꼬시라 부르던 쌀강정을 비롯한 한과, 송화다식, 조청, 순대를 역할분담해서 둘러앉아 만들던 기억이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오롯하게 떠오른다.
우리 아이들도 할머니랑 함께 사는 덕분에 이런 음식을 함께 만드는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이길 바래본다.
* 생강에 대해 더 알아볼까요?
생강의 뿌리는 식용과 약용으로 쓰인다.
뿌리를 말려 갈아서 빵·과자·카레·소스·피클 등에 향신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껍질을 벗기고 끓인 후 시럽에 넣어 절이기도 하며 생강차와 생강주 등을 만들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뿌리 말린 것을 약재로 쓰는데, 감기로 인한 오한, 발열, 두통, 구토, 해수, 가래를 치료하며 식중독으로 인한 복통설사, 복만에도 효과가 있어 끓는 물에 생강을 달여서 차로 마시기도 한다. 약리작용으로 위액분비촉진, 소화력 증진, 심장흥분 작용, 혈액순환촉진, 억균작용 등이 보고되었다.
오늘날에는 전라북도·충청남도 등지에서 재배되며, 전북 완주군 봉동읍이 생강 주산지로 유명하다. 1300년 전에 신만석이라는 사람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생강을 얻어와 봉동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생강 재배의 시작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재래종 품종에는 '봉동재래'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충남 서산은 일제시대에 봉동의 생강을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산의 생강도 일제시대부터 심어와 그 땅에 토착화한 것은 '서산재래'라고 부른다. 서산 생강은 국내 생산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