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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04. 2020

천 년, 600년, 63년

괴산의 새로운 발견

경상도를 갈 때, 강원도를 갈 때도 국도를 이용하다 보면 자주 지나쳐갔던 괴산.

남편이 은행나무로 유명한 괴산 문광저수지를 좋아해 그곳을 목적지로 자주 가긴 했지만 그곳을 제외하곤 십 년 전쯤 산막이옛길 간 거랑 올해 300년 전쯤 방풍림으로 조성된 마을숲인 후평숲을 찾아간 거 빼고 괴산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이었다.

괴산에 63년 된 청인약방이 있다고 하여 그곳을 찾아가던 날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었다.
가는 길에 오래된 고목이 있다는 초등학교 두 곳을 들르다 보니 괴산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하게 되었다.

2013년은 충북 괴산군이 '괴산(槐山)'이란 지명이 탄생한 지 600주년을 맞은 해였다. 괴산군은 본래 고구려 때 잉근내군(仍斤內郡)에서 신라 경덕왕 때 괴양(槐壤), 고려 때 괴주(槐州), 시안(始安)으로 바꿨다가 600년 전인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괴산(槐山)으로 굳혔다. 괴산의 '괴(槐)'는 느티나무 또는 회화나무를 뜻하는 한자이다. 지명의 유래가 된 느티나무는 현재 괴산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괴산군에는 수령 1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110그루가 넘고, 300년 이상 생존한 느티나무도 50그루가 넘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느티나무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괴산의 고목을 찾아다니는 시월의 마지막 날은 곳곳에서 노랗게, 붉게 물들어가는 커다란 느티나무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괴산의 느티나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쓰려고 한다. 느티나무 이야기로만 한참 쓸 내용이 많고, 아직 괴산의 대표 느티나무들을 다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찾은 곳은 청안면 백봉초등학교의 600년 된 느티나무이다. 1943년에 설립된 전교생 26명의 이 작은 학교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눈부시게 황홀한 단풍들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교문에서 느티나무가 있는 운동장 저 끝까지 직선거리로 한 200~300m에 이르는 교정에 도열한 단풍나무들이 어찌나 예쁜지 구경하느라 한 걸음 한 걸음 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괴산의 고목으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백봉초를 알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디서 어떻게 아셨는지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작은 시골학교 교문 입구부터 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어서 놀랐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못할 정도로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많은 분들이 교정 이곳저곳을 삼삼오오 단풍구경 중이었다.

단풍을 구경하면서 교정을 한 바퀴 도는 동안 600년 된 느티나무는 운동장 끝에서 수많은 가지들을 하늘 높이 뻗어 올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도열한 단풍나무들의 풍경이 감탄을 절로 나게 했다.

 
청인약방을 먼저 갈까, 청안초를 먼저 갈까 하다가 거리상 청인약방이 좀 더 가까워서 청인약방을 다음 목적지로 정했다. 가는 길에 문광저수지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지난 월요일에 들러서 실컷 은행나무길을 걸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지나쳤다. 그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단풍철 주말이라 문광저수지를 찾은 인파가 장난 아니게 많아서, 2차선 국도의 반대편 차선이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렇게 긴 줄은 명절 때나 볼 줄 알았는데...  노란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참 많은 사람들이 문광저수지를 찾았는데 정작 은행나무잎은 거의 다 떨어져 월요일보다는 볼품이 없었다.(아래 사진은 10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찍은 문광저수지 풍경) 



반대차선을 달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도착한 칠성면 도정리 청인약방은 산막이옛길 가는 길 어귀에 있다. 200년 된 느티나무와 수천 년 된 고인돌 7기, 칠성면의 유래가 된 칠성 소나무로 둘러싸인 청인약방은 한 자리에서 63년을 이어온 노포이다.

1932년 칠성면에서 태어난 신종철 옹(88세)께서 약방을 연 것은 63년 전인 1957년의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청주 지인의 도움으로 약방을 차린 신 옹은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청주 있는 분이 내가 인천 있을 때 약방 허가증을 내줘서 오늘까지 살고 있다' 란 뜻으로 '청인약방'이란 상호를 지었다고 하신다.

그간 청인약점, 청인약포, 청인약방으로 상호를 바꿔 주민 건강을 책임져왔고, 사랑방 역할도 했다. 지역에서 신망이 높다는 이유로 여러 직책을 맡아 마을 대소사를 챙기셨고, 마을에 문맹자가 많아 부고장을 도맡아 쓰셨으며, 1천700쌍의 주례도 섰다. 돈이 급한 주민들에게 차용증을 써 주신 일도 부지기수라고 하신다. 수백 명의 보증을 섰는데 그들이 갚지 못한 빚 10억 원을 40년에 걸쳐 대신 갚으시기까지!

이런 신 옹의 사연이 각종 매체에 소개됐고, 청인약방은 일약 칠성면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청인약방에 켜켜이 쌓인 근대문화유적의 가치와 수십 년을 기록한 신 옹의 장부와 일기는 보존가치가 높다. 그래서 신 옹은 청인약방을 개인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고 싶지 않고, 많은 이들이 지금처럼 다녀가고 괴산군의 자랑이 되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2020년 6월 25일 약방을 괴산군에 기증하셨다. 괴산군은 신 옹의 큰 뜻을 기려 '청인약방'이 오래 기억될 수 있게 관광자원으로 재단장해 그 가치를 드높일 것이라고 한다.

내가 찾아갔을 땐 신 옹은 안 계시고, 허리는 굽었지만 맑고 고우신 얼굴의 할머니만 계셔서 인사드리고 약방 안을 둘러본 뒤 나와서 주변을 탐방했다. 청인약방이 어떤 곳인지 모른 채 약을 사러 들른 일행들이 오자, 안채에 계신 할아버지가 곧 나오실 건데 좀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부디 두 분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빌며 약방을 떠났다.


청인약방에서 나와 부지런히 찾아간 청안면 청안초등학교는 대전 TJB에서 제작하는 '화첩기행'에 소개된 곳으로 천 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다.

정식 이름은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로 천연기념물 제 165호이다. 이 나무는 고려 성종 때 이곳의 성주가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성내에 연못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백성들이 '청당'이라는 못을 파고, 그 주변에 심은 나무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나무가 지금까지 잘 보호되고 있는 것은 나무속에 귀가 달린 뱀(와~ 진짜 이런 뱀이 있었을까?)이 살면서 나무를 해치려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고 하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약 1,0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64m, 가슴 높이 둘레 7.35m이다. 줄기 곳곳에 가지가 잘린 흔적이 있고, 가지의 일부는 죽었으나 비교적 사방으로 고르게 펴져 있다.

좀 느지막한 시간에 갔더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라 기울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노오란 황금빛 이파리들이 가득한 청안초 은행나무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주변을 몇 번이나 뱅글뱅글 돌면서 나무를 꼼꼼히 살피며 우러러보았다. 열매가 달린 걸로 봐선 암나무인데 아직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히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 학교건물은 차단막이 세워져 있어 백봉초에 비해 운치가 덜 했지만 천 년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은행나무에 절로 드는 경외심이 충만했다. 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등교할 때마다, 수업할 때면 창문으로, 운동장에서 놀 때 수시로 이 나무를 접할 수 있으니 참 행운아들이네~ 자연의 위대함을 절로 깨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장을 빙 둘러 작은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멀리로 플라타너스 몇 그루가 보이는 작은 학교가 참 커 보였다.


해가 더 길었다면 괴산의 느티나무들을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평소보다 늦게 출발한 데다 중간에 청인약방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더 둘러보지 못한 채 돌아왔다. 다음엔 괴산의 대표 느티나무들을 차근차근 둘러본 뒤 그 소회를 적어보련다.

백봉초 600년 느티나무
문광저수지 은행나무길
청인약방 200년 넘은 느티나무
청인약방 주변의 꽃. 잎. 밭
청안초 천 년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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