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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09. 2020

가을비 낭만에 젖어 거닐다

보령 성주사지

블로그 이웃 중에 '탑블로거'를 자처하는 분이 계시다.우리나라의 탑들을 열심히 찾아다니시며 꼼꼼하게 글을 올리시는 분인데, 이 분 블로그에 보니 우리나라의 가볼만한 폐사지 다섯 곳이 소개되어 있었다. 올 가을이 가기 전에 적어도 한 곳은 꼭 가봐야지~ 하고 있다가 제일 먼저 간 곳이 보령에 있는 성주사지다.

보령 성주사지는 사적 제307호로 성주산 아래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에 자리했다. 11월 첫 날, 가을비 내리는 일요일에 찾은 성주사지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 고즈넉 그 자체였다. 폐사지라곤 하지만 절터가 잘 관리되어 있고, 평지에다 도로와 마을이 가까이 있어 접근성이 좋다. 고색 창연한 석조물들이 띄엄띄엄 서있는 성주사지는 가을비 내리는 낭만 속을 거닐며 사색에 잠기 딱 좋은 곳이었다.

알고 보니 성주사는 지금은 폐사가 되었지만 번창하였을 때는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 리나 흘렀다고 할 만큼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 탄 뒤 중건하지 못하여 커다란 탑비와 5층 석탑, 3층 석탑 세 기, 석불 입상, 석등, 석계단 등 석조물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다.


성주사는 백제 시대에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로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호국 사찰이었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통일 신라 시대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염대사(801~888)가 847년부터 머무르면서 다시 크게 일으켰고, 신라 문성왕이 '성주사聖住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한다. 이 9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 특히 성주산문은 9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무염대사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성주사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이후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발굴 조사 결과 중문-석등-5층석탑-금당의 불대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왼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이 터에는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 중의 하나로 국보 제8호인 대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를 비롯하여 통일 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보물 제19호 성주사지 오층석탑,  앞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33호 성주사지 석등, 뒤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140호인 성주사지 석계단이 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성주사의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으로 계단 양쪽에는 조각수법이 뛰어난 사자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86년 도난당해 현재 있는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설명이 없는 받침돌(금당의 불대좌로 추정)이 금당터 한가운데 있고 그 너머에 보물 제20호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조각 수법이 뛰어난 보물 제47호 성주사지 서삼층석탑 과 보물 제2021호 성주사지 동삼층석탑이 있다. 동삼층석탑 뒤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민불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73호 석불입상이 있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성주사지의 맨 위쪽이자 안쪽 깊이 자리하고 있다.

국보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따로 보호각을 만들어 보존에 신경을 쓴 모습이 역력하다. 탑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의 얼굴이 깨져있어 좀 안타깝지만 남포오석을 사용한 비석은 대체로 양호하다. 10세기 초에 세워져 천 년을 버텨온 이 비석엔 5120여자의 긴 비문이 새겨져있는데, 최치원의 화려한 문장을 최인연이 해서체로 쓴 것이라고 한다.

낭혜화상의 깨달음은 깊고도 깊었다고 하는데, 당시 당나라의 여만선사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며 낭혜화상을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기단 부위가 깨지거나 상륜부가 없어지긴 했으나 더 오래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석탑들에 비해 석불은 심하게 풍화되어 얼굴은 거의 사라지고 코는 시멘트로 보수했다는데 다 갈아낸 듯한 모습인 데다(오히려 뒷머리가 더 선명한 편. 일본 귀신 가오나시를 닮았다) 오른쪽 귀도 없어지고, 손도 다 사라지고 없건만 의외로 법의의 옷주름은 U자형으로 선명하게 남아있어 보는 마음이 짠했다. 그래도 막걸리랑 생수를 바치며 발원을 드릴 만큼 성주사지에 있는 석조물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문화재인 듯 하다.



한때 경순왕이 묵었다는 성주산에는 성주사지를 비롯하여 광불사, 대영사, 성주암 등 사찰과 암자가 들어서 있고, 휴양림을 중심으로 주변에 석탄에 관한 모든 것을 전시하고 있는 보령 석탄박물관과 대천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 용두해수욕장, 오서산이 있다.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보령의 산천이 가장 훌륭하다”라고 하였는데, 『택리지』를 쓰던 무렵 보령의 서쪽에 수군절도사 군영이 있었으며 영 안에 영보정(永保亭)이 있었다. 이곳은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전망이 활짝 트여 있어서 명승지라 불렸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였던 박은은 일찍이 보령을 일컬어 “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날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도 같다”라고 기록하였다.

옛 이름이 신촌현(新村縣)인 보령시가 오천군, 남포군, 보령군을 통합하여 보령군으로 개편된 것은 1914년이다. ‘대천 바다도 짚어보고 건너라’라는 말이 있을 만큼 바닷물이 얕으며 바다 밑이 고른 대천해수욕장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보령 머드 축제'가 벌어지는 서해안의 대표 해수욕장이다. 또한 모세의 기적처럼 매년 4월 초쯤 바닷길이 열리는 무창포해수욕장도 가볼만 하다.


* 보령에 대한 소개는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의 내용일부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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