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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01. 2020

쓸쓸하지만 찬란한...

원주 법천사지

생일을 음력으로 쇠다 보니 양력에 맞추려면 매년 생일이 달라진다. 올해는 마침 토요일에 걸려서 남편이 생일선물로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단다. 앗싸!

처음엔 폐사지 5선에 있는 원주 거돈사지만을 생각하고 원주로 행선지를 잡았는데, 가다 보니 문득 폐사지 10선이 있다는 게 떠올랐고 찾아보니 원주에 폐사지 두 곳이 더 있었다. 그리하여 급 목적지 변경. 법천사지-거돈사지-흥법사지로 행로를 정해 원주를 향해 갔다. 이 세 곳 중에서 오늘은 법천사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이곳만으로도 쓸 게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바람이 차갑긴 했지만 하늘은 더없이 맑은 날.
재미없는 고속도로보단 다양한 풍경과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하는 국도를 선호하기에 청주, 음성, 여주, 충주를 거쳐 원주 법천사지에 도착했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산 70-1에 있는 법천사지는 명봉산 기슭에 위치한다. 충주에서 내려온 남한강 줄기가 부론면 앞으로 흐르는데, 그 남한강 물이 섬강과 합쳐져 여주로 흘러드는 길목이다.

진리(法)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법천사(法泉寺).
법천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되어 법고사(法皐寺)로 불리던 절이었다. 고려 중기에는 대표적인 법상종 사찰이었으며, 고려 문종 때 당대 제일가는 고승이었던 지광국사(984~1067)가 젊은 시절 출가한 곳이자 말년에 열반에 든 곳이다. 이 절이 언제 법천사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조선 초기에는 학자 유방선이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쳤는데 한명회, 서거정, 권람 등이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허균은 이곳을 방문한 뒤 '유원주법천사기'를 썼는데, 그 책에 따르면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한다. 법천사는 고려 시대의 뛰어난 석조미술 양식을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지로 국보 제 59호인 지광국사탑비와 국보 제 101호 지광국사탑, 강원도문화재자료 제 20호 당간지주, 그 밖에 석탑재 일부가 유물로 있다. 그러나 현재 절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당간지주 한 쌍과, 북쪽 산기슭에 있는 지광국사탑비, 방문자센터 뒤에 깨어진 채 모아져 있는 부처머리와 광배, 연화문 대석, 용머리, 어디에 쓰였는지 모를 석조물들 뿐이다.


지광국사탑과 탑비의 주인공은 해린으로 승탑은 지광국사 해린이 입적한 1070년경 직후에 조성되었고 지광국사탑비는 1085년에 건립되었다. 탑비의 글씨는 당대의 명신 정유산이 짓고 명필 안민후가 썼다. 글씨는 구양순체이며 부드럽고 단아하게 작성되었다.


지광국사탑비는 전체 높이가 5m에 달하며 비신 높이만 2.95m인 대형 탑비이다. 이 탑비는 귀부이수형의 탑비이며 일반적인 탑비의 구성 형식과 마찬가지로 귀부·비신·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원주시에 위치한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는 나말여초기 크게 번성한 남한강 유역의 사찰들이다. 이 사찰들에 조성되었던 탑비만을 비교한다면, 흥법사지 탑비는 귀부와 이수의 모습에서 역동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거돈사지 탑비는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에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세련미가 강조되어 있으며,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또한 용두와 비신 측면, 이수 등에 있어서 다른 탑비와 차이를 보인다.


지광국사탑비의 용두는 목이 길게 솟아오르게 조각되어 있는데, 흥법사지나 거돈사지 탑비의 용두에는 없는 턱 지지대가 조각되어 있다. (이 지지대가 뭘까 궁금했는데 수염이다) 거북 등에 있는 무늬에 王자가 새겨진 것도 특이하다.

이수의 상면에는 귀꽃 형태의 솟음 장식이 달려 있으며 이수 중앙에 탑의 상륜부와 같은 형태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아울러 비신의 측면에는 화려한 용문양이 조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 법상종계 비석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보령 성주사지의 탑비도 국보지만 이렇게 화려한 문양은 없었는데, 법천사지 탑비는 정말 독특하고 화려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 탑비와 마주 보는 곳에 지광국사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탑은 '현묘'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어 '지광국사현묘탑'이라 불리기도 하며, 그 아름다움 때문에 더욱 깊은 수난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되어 현해탄을 건넜고, 그 뒤 반환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때 포탄에 온 몸이 찢어지는 큰 상처를 입었다. 간신히 복원되어 고궁박물관 야외에 서 있다가 100여 년 만에 법천사지로 돌아오기 위해 대전 문화재복원센터(정식 명칭은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재처리 중이다. 그렇게 제 자리를 떠난 100여 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겪은 이 아름다운 탑이 2021년에나 제자리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하니 그 날이 기다려진다.

법천사지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유물도 아니고 보호수도 아닌, 서쪽에 커다랗게 서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이다.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있음에도 굳건히 서서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이 노거수는 정확한 수령을 알 수는 없지만 법천사의 지나온 내력을 온몸에 품고 있는 듯 커다란 상처를 안고도 의연하게 서있다.

사실 법천사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보러 달려간 것이 이 느티나무였다. 그런데 나무에 대한 정보가 적힌 표지판은 보이지 않고 '서원'이라 쓰인 돌만 서있었다. 아마도 조선시대 유방선이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던 서원 자리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갔던 날에도 법천사지를 찾은 사람들이 의외로 좀 있었는데, 다들 유물도 아닌 이 나무를 한 번씩 둘러보고 갔다. 그런데 이 나무에 대해선 어떤 설명도 없으니 안타까웠다.


나무 앞으로는 폐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어마어마하게 쫘악 깔려있어 이 절의 규모가 참 컸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둘러본 폐사지 가운데 가장 넓은 터를 자랑하는 법천사의 절터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현재 너른 밭을 중심에 두고 외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을 전체가 절터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인 법천리가 법천사에서 유래됐을 만큼 큰 사찰이었을 것이나 발굴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 절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당간지주가 서 있는 위치에서 부도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는 북쪽 산기슭까지 거리가 무척 길고 넓어서 매우 너른 절터였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북쪽 산기슭의 탑비에서 아래 절터를 바라보면 참으로 광활한 그곳엔 멀리 당간지주가 굳건하게 서서 입구를 지키고, 나이도 정확히 모를 오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너른 절터를 보호하듯 서있다. 그리고 네모 반듯반듯한 절터가 비어있듯이 탑비 앞의 승탑 자리도 덩그러니 비어있다. 조만간 돌아올 그 날을 기다리며......

쓸쓸하지만 찬란한 법천사지의 가을은 시나브로 겨울을 향해 가고 있었다.


* 커버 사진은 방문자센터 안의 그림. 탑비가 텅 빈 탑터를 바라보며 승탑이 돌아오길 100년 동안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법천사지는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곳답게 화장실과 주차시설이 잘 되어 있다. 칭찬해~^^


지광국사승탑.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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