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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04. 2020

따사롭고 평온한...

원주 거돈사지

원주·여주에는 총 네 곳의 폐사지가 있다.
원주의 법천사, 거돈사, 흥법사와 여주 고달사.
남한강 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수많은 절들이 자리잡고 고려 초기를 기점으로 팽창의 절정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고달사·법천사·거돈사·흥법사 모두 당대의 최고 선승들을 모시고 사세를 확장해왔음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거돈사 역시 그 무렵에 창건되고 발전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인지 이웃해 있는 절들의 탑비나 석물의 형태·문양 등에서 비슷한 요소가 발견되기도 한다.


오늘은 원주 거돈사지를 돌아보자.
강원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41-1에 있는 거돈사지는 사적 제168호이다. 지난 번 소개한 법천사지에서 4km 정도 들어가면 정산리란 마을이 나오고, 마을앞 삼거리를 거쳐 폐교된 정산초등학교(지금은 거돈사지 전시관)를 지나면 곧바로 왼쪽에 잘 다듬어진 석축과 커다란 느티나무가 반기는 거돈사(居頓寺)지에 닿는다. 거돈사지 입구에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도 볼 수가 있는데, 하루 세 번 버스가 다닌다고 한다.


거돈사지의 느티나무는 한눈에 봐도 참 오래돼 보인다 했더니 터만 남은 거돈사를 지켜온 지 천년이 된 보호수였다. 높이 21m 둘레 7.5m의 이 느티나무는 두 갈래로 갈라진 몸통줄기 가운데 더 크고 굵은 줄기가 손님을 맞이하는듯 길쪽으로 허리를 구부린 채 석축 위에 서서 오는 이들을 반긴다. 석축을 올라가서 보면 나무 아래 쉬었다 가라고 짙은 갈색의 나무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 앉아 너른 거돈사지를 남동북쪽에서 지키고 있는 3층석탑과 불좌대, 탑비와 승탑을 바라보는 것도 꽤 운치가 있다.


거돈사지 절터는 약 7,500여 평이라고 한다. 법천사지만큼은 아니지만 꽤 큰 편이다. 빈 절터를 가운데 두고 낮은 야산이 병풍처럼 빙 둘러져있고, 동쪽의 정산저수지(2000년 준공) 아래로 흘러내리는 개울이 있는 앞쪽은 살짝 트였다.
우리가 찾은 날은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는데, 거돈사지는 희한하게도 바람이 불지 않아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였다.


거돈사는 신라시대로 창건시기를 잡고 있으나 연혁을 밝힐 만한 문헌자료는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석물은 금당 앞의 삼층석탑과, 금당터 위에 놓인 거대한 화강석 불대좌, 원공국사탑비와 원광국사승탑이다.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조각난 부재들이 한쪽에 모아져 있었다는데, 맞은편에 있는 전시관으로 옮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절터에서 나온 기와조각과 토기, 석물들에서 신라 말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존속해 왔던 절로 밝혀지고 있으며, 고려 초기에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돈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폐사시기에 관한 기록은 없다.


한림대학교 박물관에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한 결과, 거돈사지의 전각과 당우의 위치가 파악되었다. 절터 남단에 석축을 높이 쌓아 지대를 조성했고, 절 중앙에 금당을 안치하였다. 금당 터에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초석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20여 칸 크기의 대법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금당터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에는 높이 약 2m의 불좌대가 있으며(커다란 돌 세 개를 쌓아놓은 듯한 모습이다. 법당에 보통 세 존의 불상이 모셔시는데, 그 불상 아래를 받치던 각각의 불대좌를 한꺼번에 모아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불좌대 주위에는 원래의 위치로 보이는 주춧돌들이 비교적 정연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다. 기단은 대부분의 지대석과 면석이 남아 있어, 나말 여초의 사찰로는 매우 희귀하게 상태가 좋다고 한다.


금당터 앞에는 보물 제750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이 있다. 높이가 5.4m이고, 별다른 장식 없이 그저 평범하고 소박하다. 다만 돌로 된 축대 안에 흙을 쌓고 그 위에 석탑을 세운 것이 특이하다. 석탑의 상태도 매우 양호해 최근에 새로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석탑을 이룬 돌들이 깨끗하다. 3층탑 앞에 있는 배례석은 상부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화려해 눈길을 끈다.


금당 뒤로는 문을 내고 긴 회랑을 둘렀다. 탑을 축으로 정면에 금당을 두었으며,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을 두른 가람배치 형식을 취하였다. 절터 뒤로는 넓은 공간을 층단 조성하여 강당과 전각 들을 건립하였던 석축이 남아 있다.


3층 석탑에서 동쪽으로 110m 떨어진 곳에는 보물 제78호로 지정된 거돈사 원공국사탑비가 있다. 탑비의 주인공인 원공국사 지종(智宗)은 930년(태조 13)에 출생하여 1018년(현종 9) 89세로 입적한 고려 전기의 고승이다. 그는 광종대를 전후하여 일시적으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법안종의 승려로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원공국사탑비는 1025년(현종 16)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대의 대표문인이었던 최충이 짓고 글씨는 김거웅이 썼다. 탑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의 용두가 사진으로 보기에는 양의 머리처럼 보여서 특이하다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용이 씨익 웃고 있는 듯 입술을 양옆으로 길게 늘인 모습이 양뿔처럼 보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이를 귀여운 괴수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비신의 높이 2.45m, 폭 1.26m이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비신은 가늘어 날씬한 편인데, 귀부와 이수는 꽤 큰 편이어서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조각기법은 매우 생동감이 있다. 거북등은 겹테의 정육각형문 안에 불(佛)자와 만(卍)자, 연꽃무늬를 교대로 새긴 점이 독특하다. 등 위로 비좌의 사면에는 안상(코끼리 눈과 같이 생겼다는 뜻에서 생긴 명칭의 문양)을 새겨 돌리고 비신을 안치한 다음 이수를 얹었다. 이수에는 구름 속에서 노니는 용이 꿈틀거리는 듯 사실적이다.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이 탑비는 원래 현재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원공국사탑의 지대석터 옆이 아닌지 모르겠는데, 언제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알 수 없다.


금당터에서 북쪽으로 100m쯤 떨어진 산속에는 보물 제190호로 지정된 원공국사탑이 있다,
1018년(현종 9) 4월 왕에게 하직하고 거돈사로 하산한 지종이 4월 17일 8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원공국사로 추증되었고, 입적 직후에 원공국사승묘탑이 조성되었다.


거돈사지 원공국사탑(흔히 부도라고 불림)은 팔각당 형식이며 신라 승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고려시대 비석양식의 시원적 조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단정하고 균형잡힌 형태와 격조 있는 장식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고 한다. 상태가 좋고 탑에 새겨진 문양들이 예뻐서 꼼꼼히 들여다보았는데, 현재 그 자리에 있는 것은 2007년에 세운 복제품이었다. 실물은 일제시대때 서울로 옮겨져 일본사람 집에 있다가,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겼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니 아쉬웠다.


이 탑이 위치한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한눈에 거돈사지를 볼 수 있다. 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가는 늦가을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노래진 잔디가 더욱 따스한 빛을 띠어서인지 거돈사지는 무척 평온하고 따스해보였다.

답사길잡이에 따르면 석양 무렵의 거돈사지에서 보는 삼층석탑은 절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고 하니, 언젠가 해질 무렵 시간을 잘 맞춰서 한 번 더 오고픈 곳이었다.


* 사진 맨 끝에 정산저수지 정상에서 바라본 거돈사터가 있어요. 저수지 가는 길에 있는 폐가엔 방자리에 꺼진 구들장 대신 나무의자가 마련되어있어 인상적이었답니다. 저수지쪽으로 올라가면 작실고개 정류장이 있다고 해서 저수지를 빙 돌아난 비포장도로를  따라갔는데 중간쯤 가니 더이상 차가 다니기 어려워보이는 길이라 돌아나왔답니다.


- 거돈사지의 발굴과 가람배치 등에 관한 설명은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의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12&cid=42840&categoryId=4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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