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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an 02. 2021

작고 초라해 보여도 그게 다가 아니죠~

원주 흥법사지

해 처음으로 소개할 곳은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외 7필지에 있는 폐사지 '흥법사지'이다.
작년 11월 중순에 다녀왔던 곳으로, 올 겨울 들어 처음 얼음을 봤던 곳이기도 하다. 늦은 오후에 찾았음에도 '감운대'라고 쓰인 주초석과 나란히 놓인 우묵 패인 주춧돌 안에 고였던 물이 얼음이 된 채 남아있어서, 이곳이 강원도는 강원도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서 찾았던 원주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절터가 꽤 너른 편이어서 이곳도 각오를 하고 왔는데, 의외로 이곳은 작았다. 영봉산 산비탈 밭 한가운데 자그맣고 쓸쓸하게 있어서, 일부러 찾지 않는 한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다. 이곳이 한때는 절이었음을 보여주는 탑비마저도 비신은 사라지고 귀부 위에 이수만 덩그러니 얹혀있는 모습이 이채로웠으나, 삼층석탑만은 겨울 햇살을 받으며 당당히 서있었다. 무엇보다 절터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앞에 가린 것 없이 툭 트여있어서 가까운 시내와 먼 산까지 한눈에 들어와 개방감이 있어서 좋았다.



흥법사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초에 활발히 활동했던 고려 태조의 왕사(왕의 스승이 될만한 승려라는 뜻으로 지덕이 높은 승려에게 내리던 칭호. 국사보다 한 단계 낮다)였던 진공대사 충담이 입적할 때까지 머무른 곳이다.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태조 왕건의 명으로 924년 크게 중창한 원주지역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진공대사탑비에 진공대사가 태조 23년(940)에 이곳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신라시대에 이미 제법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에 기록된 당시의 사찰 명칭은 '흥법선원'이었다. 고려 태조가 진공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변의 거돈사지, 여주 거달사지 등과 더불어 고려 전반기의 선종계 사찰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흥법사의 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1693년(숙종 19)에 이곳에 '도천서원'을 건립하였다가 1871년에 폐지되었고, 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변한 채 밭 한쪽에 진공대사탑비와 삼층석탑만이 빈 절터를 지키고 있다.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었다.

흥법사지에는 원래 삼층석탑(보물 464), 진공대사탑(보물 365), 진공대사탑비,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104)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염거화상탑은 서울의 탑골공원으로 옮겨지고 진공대사탑과 진공대사탑비의 비신은 일본으로 반출된 것을 되찾아 지금은 3점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 464호인 삼층석탑은 오랫동안 밭 가운데 있다보니, 경작으로 말미암아 지대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지대석 위에는 하대석과 중석을 한 돌로 만들어 4석으로 구성된 기단이 있다. 3층의 쌓은 탑신부는 받침돌인 기단에 비해 몸돌의 폭과 높이가 크게 줄어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다. 1층 받침돌 각 면에는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세 구씩 조각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1몸돌에는 네모난 문과 문고리 장식을 새겼는데, 이는 이곳에 부처의 사리를 모셨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상륜부에는 많이 손상된 노반 1석이 있다. 탑의 전체적인 비례, 탑의 구성이나 각 부분의 조각 기법, 장식 등으로 보아 , 신라시대 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전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진공대사탑비의 귀부는 용두화한 거북머리에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특이하게도 옆에서 보면 여의주를 앙문 용의 입 사이로 뻥 뚫려있는 공간이 있어서 건너편이 들여다보인다.
등에는 이중의 육각형 무늬가 새겨져있는데, 그 안에 만자와 연꽃무늬가 보인다. 탑비의 덮개 부분인 이수의 앞면 중앙에는 '진공대사'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휘젓는 용이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총 여덟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는데 부조임에도 입체감이 강하다. 웅장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조각은 고려 초기의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준다.
신이 사라진 덕분에 높이 있어서 자세히 관찰하기 어려웠던 이수를 눈높이에서 꼼꼼히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흥법사지의 탑비는 그 독특함으로 인해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다.



원주시에서는 2016년부터 흥법사지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달라고 문화재청에 요구해왔다. 국가사적인 거돈사지나 법천사지와는 달리 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어 흥법사지의 역사적 의미나 유존 석조물 등을 고려할 때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8월 문화재청은 '발굴에 의해 조사된 지역을 중심으로 지정구역을 조정하고, 강원도 기념물로 우선 지정해 토지매입과 조사, 학술적 검토를 선행하라'는 주문을 하며 또다시 국가 사적 지정이 미뤄졌다. 이로써 현재 잠정 중단 상태인 '남한강 유역 폐사지'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고 한다.

원주역사박물관장에 따르면, 흥법사지는 고려 태조 왕건과 밀접한 사원으로 문헌자료와 현지에 남아있는 진공대사탑비의 기록으로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며, 중심사역 전면에 석축과 중문터가 온전하게 남아있고, 2018년 발굴조사를 통해 목탑지 또는, 금당지로 추정되는 유구까지 발견됐는데 더 이상의 근거가 필요한지 의문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생경했던 풍경이 바로 흥법사지의 국가 사적 지정을 촉구하는 현수막이었다.

흥법사지는 유존 석조물 4점이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거돈사지와 법천사지의 유존 석조물 중 각각 3점과 2점만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과 비교해도 흥법사지를 당연히 국가사적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이유다. 겉으로 보기엔 작고 초라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따져볼 때, 그리고 남한강 유역 폐사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위해서도 흥법사지의 국가 사적 지정은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작품인 전원형 뮤지엄 '산' 이 원주의 핫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는데, 여기 가는 길에 흥법사지가 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오랜 역사와 유물을 지닌 이곳을 들러보시는 것도 흥법사지의 국가 사적 지정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듯 하다.​

* 흥법사지 국가 사적 지정에 관한 내용은 아래 기사 참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71626


* 진공대사의 정확한 입적시기는?

위에 쓴 글은 흥법사지에 있는 설명판에 쓰여진 내용을 기반으로 썼는데 자료조사하며 보니 두산백과의 설명은 좀 달랐다.


'고려사'에 따르면, 937년 진공대사 충담이 입적하자 940년 진공대사의 부도탑이 있는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니 진공대사의 정확한 입적연대는 937년이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흥법사지에 설치된 설명판에는 진공대사가 940년에 입적했고 941년에 탑비를 세운 것으로 나와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진공대사의 입적 시기는 대부분 940년으로 되어 있으며, 탑비도 940년에 세운 것으로 나와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 설명에도 진공대사의 입적을 940년으로 하고 있어서 940년이 맞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리려 했으나 뭔가 찝찝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다른 대사의 탑비를 찾아보았다. 마침 같은 강원도인 강릉 보현사의 낭원대사탑비도 진공대사 탑비와 같은 태조 23년인 940년에 건립되었는데, 이 탑비는 대사가 입적한 10년 뒤에 세워졌다고 쓰여져 있다. 국사도 아닌 그 다음 단계인 왕사이다 보니 아무래도 낭원대사탑비처럼 입적 즉시보다 3년 늦게 세운 게 맞다 싶기도 하고... 진실은 무엇일까?

그래서 좀더 자료를 찾아보니 강원도민일보에서 향토사학자 김호길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기사가 있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고려태조는 진공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고 흥법사를 중건해주는 등 극진했으며 이때부터 흥법사는 흥법선원이 되고 선수행을 닦기 위해 찾아오는 스님들이 수백명에 달하며 번창하게 됐다고 한다. 진공대사가 71세로 입적, 태조는 시호를 진공이라 내렸으며, 흥법사에 부도를 세우고 손수 비문을 짓는 등 예우를 다했다고 하는데 진공대사의 생몰연대가 869~940으로 나온 걸 보니 아무래도 940년에 입적하신 게 맞는 것 같다.

강원도민일보 기사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84939

*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맨 끝 사진)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동한 고승 진공대사의 묘탑과 석관으로 1931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절터에서 옮겨왔다. 진공대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 때에 귀국하여 왕사가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가 940년(태조 23)에 입적하였는데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을 정도로 대사는 생전에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탑은 팔각 집 모양을 기본 평면으로 하였으나 기단 중간부는 원통형으로 하여 구름과 용무늬를 새겼고. 아담한 탑신 위에는 곡선이 강한 지붕을 얹고 보개로 장식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탑은 고려 태조의 왕명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려시대 초기 승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설명)

두산백과에 나온 흥법사지 전경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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