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용담 Jan 19. 2022

<220119> 도말의 기쁨

함박눈을 바라보며



느닷없이 눈이 내린다.

토실토실 함박눈이다.

이른 아침부터 안전 안내 문자로 전화기가 바쁘더니, 09시를 기점으로 대설주의보가 발효 중이다.

창밖에는 어느새 장관이 펼쳐졌다.

같은 모습인 듯 매일이 다른, 나의 집 큰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온통 하얗다.

공평한 눈.

눈은 어느 곳에나 똑같은 두께로 내려앉는다.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리지 않고, 자리의 크고 작음을 탓하지 않으며, 장소의 귀천이나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머무를 수 있는 모든 '곳'에 똑같이... 고르게... 공평하게...

왔다 가는 '때'도 동시에... 선후를 두지 않고... 미련을 남기지 않고...

내리는 눈을 볼 때면 나는 늘 <도말塗抹>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칠할 도(塗)

지울 말(抹)

'무언가'를 발라서 '어떠한 것'이 드러나지 않게 '완전히 없앤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처음 본 것은 성경 중 이사야 선지자가 쓴 부분인 '이사야서 44장 22절'에서였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塗抹)하였으니..."

'그리스도'를 발라서 '나의 죄'가 드러나지 않게 '완전히 없앴으니' 너는 더 이상 죄의 굴레에 속박되지 말고 살아도 된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최고 절정인 말씀이다.

내리는 눈의 두께처럼 공평하신 주(主)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저 사마리아 땅끝까지 동일한 '도말'의 사랑으로 내려앉으셨는데, 인간은 굳이 애써 그 사랑이 내려앉을 자리의 귀천과 죄의 깊고 낮음과 자격의 유무를 따지고야 만다.

눈이 제법 많이 쌓인 길을 일부러 걸어본다.

내리는 눈이 이미 난 발자국을 계속 지워 자꾸 새 길이 된다.

길 가장자리로는 크고 작은 눈 무덤이 불연속적으로 이어진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것들은 원래 존재했던 모습대로 올록볼록하다.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내다 버린, 재활용조차 되지 못할 폐기물은 그 형태대로, 아직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채 방치되었던 화분은 그 깊이만큼.

내용물이 터진 채로 길가에 얼어붙어있던 음식물 쓰레기 봉지 위에도, 어느 집 앞 사철 푸르를 나뭇잎들 위에도.

간밤에 어지럽던 마음을 헤아려본다.

성경 속 주(主)의 '도말'에 대한 약속 또한 존재의 원 모습을 탓하지 않으리라.

올록한 사람은 올록한 대로, 볼록한 사람은 볼록한 대로 똑같은 두께로 덧칠하여 완전히 없애 주셨으리라.

나 역시 나의 모습대로, 지금 이 자리대로 '도말의 사랑'을 받았으리라...

눈 온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차별 없는 눈의 공정심 덕분이겠다.

내가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건... '도말의 사랑' 덕분이겠다.

공평한 눈이 계속 내린다, 따뜻하게... 평화롭게......


매거진의 이전글 커fe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