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한반도로 들이친 태풍 때문에 한바탕 전쟁을 치루니 거짓말 같은 맑은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 펼쳐진다. 올해 제주의 가을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느끼며 길을 나서보기로 한다. 사실 제주하면 바다 이미지를 생각하지만 나들이 장소로 바다는 제주 사람들이 전통적인 선호 공간은 아니지 않았나 싶다. 예쁜 카페에서 시원한 바다를 즐기며 먹는 차 한잔의 여유로의 상징은 제주인의 라이프스타일이라기 보다 현대에 사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에 기반한 문화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제주사람이 내개 바다는 낭만적 감성의 근거라기 보다는 그저 좁은 제주섬을 벗어나는데 방해되는 장벽이었을 뿐이었다. 내게 제주 바다는 그랬었다.
'제주사람들은 오름자락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 라는 말이 있다. 바다에 비해 나에게 오름은 이런 곳이다. 나에게 제주 바다는 그래서 오름 정상에서 내려다 볼 때 그 존재의 의미가 부여된다. 올해 가을맞이를 오름과 숲길 걷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서기로 한 이유이다. 길을 나서는 이가 부딛히는 두번째 난관은 제주의 많고 많은 오름과 이어지는 숲길 중 어디를 선택하는냐? 하는 것이다. 언뜻 최근 자료를 보는 가운데 눈에 들어 왔던 한 두군데 트레일 코스가 떠오른다.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하구호를 갖고 있는 물영아리 오름의 '물보라길'과 그 물영아리 오름을 마주하고 있는 이름조차 낯선 '마흐니 오름 숲길'이다. 두 곳 모두 최근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려니오름 숲길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마흐니 오름'은 제주의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한라산 고사리 축제의 마을, 수망리에 위치해 있다. 문헌상으로 보면 표고 552m, 비고 47m로 나온다. 중산간에 위치해 높아 보이나 오름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다. 다른 문헌에서는 마은이 또는 마안이 오름이라고 불리는 이 오름 가는 길은 비교적 최근인 작년(2017년) 11월 8일 개장한 곳이다. 탐방로의 총 길이는 5.3km로 왕복 3시간 소요되어 동절기에는 오후 3시, 하절기에는 오후 4시 이후에는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고 숲길이 시작지점의 안내판에 적혀있다. 이곳은 물영아리오름 탐방안내소를 남조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안내표지판의 내용을 보면 현재의 수망리 마을은 4.3 이전까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화전을 이루고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현재의 위치보다 한창 남쪽에 수망리 본 마을이 있다.
제주의 오름을 오르기 위한 의식과 같이 탐방로의 시작인 목장입구를 지나면 한동안 시멘트 포장길이 조금끈경계가지 이어진다. 마흐니 오름의 숲길은 이곳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숲길은 평범하다. 제주 중산간의 여느 평범한 숲길과 마찬가지로 소나무와 다양한 활엽상록수 그리고 관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중간중간 목장지대는 단풍 대신 제주 중산간의 가을을 알리는 갈대가 한낮 태양에서 빛나기를 반복한다. 안내 표지판의 주요 지점을 제외하면 숲길을 안내는 사람들이 걸었던 흔적과 소박하게 화살표를 코팅해 표지해 놓은 안내표지를 따라가면 된다.
40~1시간 정도 걸으며 조금은 식상해할만 할 때 삼나무숲길입구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난다. 어쩌면 이곳부터가 이 마흐니 숲길의 정수라 볼 수 있다. 500여 미터의 깊고 울창한 삼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상쾌함이 배가되는데, 이는 소위 피톤치드 효과라 생각하면서 기운을 내어 한발짝씩 나아가다보면 어느새 계곡과 울창한 숲길이 어우러진 길에 들어섰음을 자각하게 된다. 쇠물통이다. 이곳에서부터는 오름 분화에 따라 흘러내린 용암들이 만든 다양한 형태의 제주 중산간 지형적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용양대지와 하천(수망천) 그리고 수직동굴과 그 연장선인 마흐니 계곡의 시작점에 위치한 마흐니궤(동굴)가 펼쳐진다. 용암대지와 마흐니 오름 정상까지는 곳곳에 펜스와 벤치 그리고 야자매트를 깐 탐방로까지 정비가 비교적 잘되어 있다. 쇠물통에서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코팅한 A4용지에 적힌 안내지도이다. 이 탐방로는 원웨이 편도 왕복길이라 갈 때는 몰라도 돌아갈때는 다소 지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이곳에서 기존의 정상 탐방로를 거쳐 다시 이 쇠물통까지 오는 코스를 새로 개설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새코스의 길이는 2.7km, 기존코스는 1.7km이니 새코스를 고르면 약 20~30분은 넉넉하게 더 걸릴 수 있음을 탐방시 고려해야 한다.
4.3이전 이곳에 어떻게 사람들이 화전을 이루고 살았을까?라는 의구심은 이곳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화산지형의 제주는 보통 중산간에 물이 부족하나 곳 주변은 신비지통, 따비튼물, 올리튼물, 장구못 등 수망천(의귀천)을 줌심으로 곳곳에서 물이 비교적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중간중간 바위에 낀 이끼도 보고 아직 사람 손을 많이 안탄 시점에 이 길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오름 정상을 향해 마지막 힘을 쏟아내 본다. 약 5분(비고 47m이다)의 오르막길에 힘을 쏟아내고 나면 정상까지는 굼부리 길이라 평지길과 마찬가지이다.
오름 정상 안내판을 맞이하면 다소 실소가 나온다. 낮은 비고로 짐작은 했지만 정상을 덮은 빽빽한 나무들로 조망권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이 정상인지 그냥저냥한 숲길인지... 길을 처음 내던 사람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동사면으로 나무를 조금 잘라내 조망권을 확보했다. 낮은 비고에 비해 표고는 높은 중산간이라 나름의 정상에 선 듯한 희열은 준다.
숲길을 걷고 오름을 오르는 길은 낭만적인 것 같지만 생각보다 이런저런 생각할 시간이 없다. 평지라면 몰라도 산길이기 때문에 정상을 위해 그냥 나가는 길이다. 아무생각 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 바로 숲길 걷기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3-4시간은 복잡한 도시생활에서 받는 여러 생각들을 땀과 숲길을 가르는 가을바람 그리고 청량한 숲 공기 속에서 잊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 마흐니 숲길 탐방코스는 생각보다 긴 코스이다. 다시 온 길을 재촉하면서 시작점으로 오니 약 왕복 4시간 30분 걸렸다. 사진찍고 쉬면서 간단한 차와 점심을 먹는 시간까지 포함한 시간이다. 운동삼아 찾는 숲길탐방자라면 3시간 정도면 왕복도 가능한 듯 하다. 결론적으로 점점 해가 짧아지는 가을이라 되도록 12시 이전 오전부터 걸어야 쉬엄쉬엄 숲길의 정취를 만끽하며 왕복할 수 있는 숲길이다. 1시 이후 탐방시작이라면 내려올 때 어스럼해져 걸음이 빨라짐을 각오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