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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고양이 Jan 22. 2021

ep2-1.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변태들을 위한 기도

#1. 봄이 가던 시절

개망초가 지천이었다.

개망초는 잘 가꿔진 정원이든, 풀밭이든 가리지 않고 꽃을 피워냈다.

전주에서 김제를 거쳐 부안까지 가는 오래된 직행버스의 구닥다리 냄새도 봄 향기에 덮였다. 나는 버스 뒷좌석 창가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좌우로 진자운동을 하는 버스의 음률에 맞춰 좌우로 몸을 흔들며 지금은 어느 때인가를 생각했다. 어린이와 성인 중간쯤, 봄과 여름 중간쯤, 어디에 눈을 두든 짙어지는 푸른 빛 풀밭 위로, 점점이 하얀 개망초와 점점이 노란 금계국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처럼 펼쳐졌다. 하얀 점과 노란 점들 위로는 또 하얀 나비와 노란 나비가 날아들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늘 그렇듯이 그 해에도 나는 몇 달째 봄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낡은 버스 창가에 기대앉아 꽃을 보다가 하늘을 보았고, 또 나무를 보다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낏하면서 아지랑이 같은 눈으로 나비처럼 봄 사이를 날아 다녔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애벌레가 저렇게 예쁜 나비가 되다니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날숨으로 가득 찬 직행버스 안에서 아지랑이 같은 나는 그렇게 잠에 빠졌다.

잠이 깬 건 김제역 정류장에 거의 도착해서였다. 나는 내가 내릴 곳인지를 확인하며 한시름 놓고 다시 의자에 기대며 ‘5분은 더 자겠군’ 생각했다. 그런데 왼쪽 허벅지가 축축한 듯 이상했다. 단정한 교복 치마 위 가지런히 놓인 검정 인조가죽 가방 사이에, 축축한 남자의 손이 끼어져있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30대 중반 같아 보이던 남자. 그는 내가 그의 딸이라도 되는 냥, 아니면 여자친구라도 되는 냥,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내 다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놀라운 건 내 첫 감정이다.

그의 손을 느끼자마자 불쾌함 보다 먼저 날 덮친 건 무서움이었다.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그의 뺨을 시원하게 후려치며 치한이라며 소리 지르고 욕하는 건 드라마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대로 얼은 채 꼼짝 못했다. 내가 깼다는 걸 그가 알까봐 무서웠다. 왜? 모르겠다. 나한테 더한 해코지를 할 것 같았다. 눈 떴을 때 바로 내릴 걸 후회했고, 차라리 깨지 말걸 후회했으며, 아무리 졸았대도 누가 날 만지고 있는 것도 모를 수가 있는지 내가 바보 같았다. 김제역에서 김제터미널까지 10분이 안 걸리는 그 시간동안 나는 온갖 생각을 했다.


‘가만있으면 이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겠지? 아니야, 가만있지 않으면 같이 내려서 날 쫓아올지도 몰라.’

‘집에 아무도 없는데…. 쫓아오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해야하나? 그랬다가 엄마가 알면 혼날텐데.’

‘내려서 집까지 가는 길에 도움을 청할 곳이 있나? ok마트에 들어갈까?’

‘그냥 터미널 대기실에 계속 있는 게 나을까?’


‘사람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까지도 생각한 끝에, 내가 한 행동은 조용히 일어나 곧 내릴 것처럼 출구문 쪽으로 가서 서는 것이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 사이에 남자가 일어나 내 뒤에 아무렇지 않게 설까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다행히 그는 내리지 않았다. 다행은 아니다, 불행이다. 그는 앞으로도 여느 때처럼 여자들의 몸을 제 몸처럼 아무렇지 않게 만질 거다. 여자가 소리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았던, 나로부터 알게 되었던 그는 더 자신감을 얻게 될 거다. 버스를 내리면서 그의 손이 훑고 지나갈 수많은 여자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런 일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있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 같은 거였다. 학교에 들어가면 싫어도 숙제를 하고, 숙제를 안 하거나 공부를 못하면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맞듯. 그러한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어떤 판단이 만들어지기 전에 나의 판단 따위는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눈치로 몸으로 익히게 되는, 그런 일이었다.

우리들은 나비의 ‘변태’를 배우기 전, ‘변태새끼’를 한 단어처럼 생활 속에서 익혔다.

여자중학교 주변에는 종종 바바리맨이 출몰했고 그는 가끔 수업 중인 학교 교정 안으로도 들어왔다. 내 눈으로 목도한 것은 학교에서 시내 한 복판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놀라운 건 그렇게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아니라 그가 진짜 바바리를 입고 있었다는 정도다. 나는 그걸 신고해야하는 일인지도 몰랐고, 그렇게 배우지도 않았다. 그가 무섭지 않았으며, 그에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궁금했다. “왜 그렇게 입고 다니세요?”

바바리를 입고 맨 다리를 드러내는 센스 없는 패션 감각은 변태가 되기 위해선 필수일까? 다른 방법은 없나? 하는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순수하게 묻고 싶었다.


“바지는 어디서 벗었어요? 여기서 벗고 준비하신 거예요?”

“집에서 나올 때부터 그렇게 나오신 거예요?”

“바바리에 맨 다리를 그렇게 드러내는 게 스스로는 괜찮은 것 같아요?”


바바리맨은 학교 앞에 있는 문구점처럼, 여자학교 주변에는 문구점과 짝꿍을 이루는 늘 있는 상수였지, 변수가 아니었다. 동네 바보를 바보라고 놀리듯, 변태새끼를 변태새끼라고 놀리는, 반은 조롱이 섞인 그건 분명한 공포는 아니었다.



내가 공포를 처음 갖게 된 건, 중학교 3학년이 된지 얼마 안되서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두산아파트에 사는 친구 K의 집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의 단짝인 K는 못하는 게 없는 아이였고, 아파트에 사는 나의 첫 단짝 친구였다. 김제 시내 한복판에 새로 생긴 최신식 아파트, 7층에 그녀가 살았다. 집에는 고동색의 가죽표지를 두른 전집이 있었는데 ‘짜라투스트라’라는 어려운 이름을 가진 책과 ‘테스’나 ‘폭풍의 언덕’ 같이 당시 내게는 할리퀸 류와 다름없어 보이던 책들이 쭉 진열된 유리문 책장이 있었다. 부안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 1학년때 전학을 와서 나와 단짝이 된 그녀는, 못하는 게 없었다. 그 중 제일 부러운 건 그녀의 자신감이었고, 두 번째로 부러운 건 피아노였다. 영롱하게 새겨진 영창 글씨를 가진 피아노가 있었고, 그 피아노로 ‘여명의 눈동자’ OST를 제법 잘 쳤다. 피아노를 치는 빠른 손가락의 놀림이 정말 부러웠다.


나의 첫 시작 중 많은 것들을, 내 첫 단짝인 K와 함께했다. 지금도 잊지 못할 거금을 들여(무려 14,900원이었다!) 시장통 옷이 아닌 어엿한 ‘브렌따노’라는 브랜드를 가진 네이비 맨투맨 티셔츠를 똑같이 사 입었다. 그 옷은 나의 첫 커플 티였고, 어른 없이 산 첫 옷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팬을 자처한 ‘서태지’를 K는 함께 좋아했고, 내가 산 첫 앨범인 ‘서태지와 아이들’ 1집도 K와 같이 사서 사자마자 K의 집으로 달려가 조심스레 비닐을 뜯어 처음으로 같이 들었다. 친구간의 외식도 K가 처음이었다. 우린 돈이 생길 때마다 신포우리만두에 가서 쫄면을 사 먹었다.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K는 늘 양념장을 반이나 덜어내면서도 나와 같은 메뉴를 먹었다.


그렇게 그녀가 중3 여름방학을 앞두고 다시 전학을 가기 전까지 2년간 K와 나는 단짝이었고 우린 늘 붙어 있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함께 하교해 그녀의 집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산아파트 뒷문으로 나오면 내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까지 10여분을 걸어야 했다. 여느 날처럼 그녀와 팔짱을 끼고 무슨 재미난 이야기였는지 까르르 웃으며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오는 아저씨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골목은 한적했고 그렇게 좁은 골목은 아니었으나 그 아저씨와 나는 살짝 어깨를 부딪쳤다. 나는 “죄송합니다.” 말하고 금세 잊었다. 정류장까지 배웅을 해준 친구는 돌아가고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길을 걷다가 누구와 부딪치는 일, 자주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일, 그래서 지나치면서 잊는 일. 나와 부딪친 사람이 몇 살 쯤 되어보였는지,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떻게 생겼었는지, 내 말에 대답을 하긴 했었는지 그런 것은 아예 기억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했을 때, 나는 누군지 전혀 몰랐다.

그는 내게 대뜸 말했다.


“어른하고 그렇게 부딪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네?”


나는 전혀 모르는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2편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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