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전직 기자의 아픈 기억
노무현의 피해의식
저런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렇지 않은 기자들도 있습니다.' 라는 부제의 칼럼을. 어쩌다 운 좋게 기자가 되고, 사이즈 큰 특종을 쫓아 이리저리 뛰던 때다.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열심히 내달리기만 하던.
2008년 12월의 어느날, 노건평 씨 구속을 하루 앞두고, 노 전 대통령 사저에 가서 리포트를 만들어 오라는 총을 맞았다. 형님의 구속 결정을 앞둔 전직 대통령의 심정을 담은 기사. 법조팀도, 정치부도 아닌 사건팀 나부랭이는 그게 어떤 맥락인지도 몰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하루 한 번 사저 앞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기자는 나 혼자. VJ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은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든 나를 흘끔 보며 발언 수위를 조절했다. 사인을 해달라는 아주머니들에게, "상황이 너무 잔인해서 어려울 것 같다"고 답했다.
"심경이 어떠십니까?"란 질문을 해야했지만, 이미 필요한 답이 나온 셈. 상황이 잔인하다. 그래.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팩트가 아니라 심경 묘사가 필요한 거라면.. 당시만 해도 한마디 한마디를 비틀어 조롱하던 언론이 차고 넘칠 때였다. 그러기 싫었다.
이윽고 노 전 대통령과 눈이 마주쳤다. 질문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한 듯한 표정. '질문할까?' 2초 쯤 고민하다 그냥 눈인사를 건네고 목례를 했다. 그러자 돌아온 노 전 대통령의 눈인사. 이어지는 한 마디.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그리고 그는 사저로 향했다.
기사로 말하겠다는 뜻이었다. 내 눈인사의 속내는. 그가 알아차렸을리 없지만. 그렇게 건조한 기사를 내보내고. 좀 더 의연히 대처해 달라고, 그렇지 않은 기자들도 있다는 사족을 달아 글을 썼다. 몇 주 후 나는 검찰로 발령이 났고,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그 수사를 취재했다.
노 전 대통령을 허망히 보내고, 박연차 게이트의 전말을 알게되고, 슬금슬금 발을 빼는 언론을 보면서.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잘 모르는 기자가, 생각하지 않는 언론이, 얼마나 무서운 흉기일 수 있는가를. 그리고 내가 바로 그 흉기였다는 사실을.
나는 얼치기 기자였다.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벗어제끼고, 다른 길을 걷겠다 마음 먹은 지금도. 문득문득 그 때의 눈인사가 떠오른다. 노 전 대통령과의 유일한 기억. 평생 머릿속을 맴돌겠지.
남은 인생은 조금 더 진중히 살고싶다.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고, 스스로를 부던히 살피면서.
또 다시 부끄러워지지 않게.
비가 온다. 부슬부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