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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16. 2021

시계 약 바꾸기와 재주에 관하여


아무리 품이 들어도 내가 해서 아낄 수 있는 돈이라면 아끼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집안에서 자라며 익힌 재주로 손목시계 약 바꾸기가 있는데, 그런 소박한 재주를 과연 재주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재주라면 보통 남들이 좀처럼 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리키기 마련인데, 손목시계의 배터리를 바꾸는 것은 적절한 도구만 주어진다면 누구라도 대단한 요령 없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드라이버로 여느 가전제품의 나사를 돌리고 뚜껑을 열고 배터리를 바꾸는 작업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손목시계 관리 공구 세트도 어디에 숨겨진 어둠의 공구상 같은 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대충 어느 쇼핑몰에서 검색해 봐도 즐비하게 나오게 되어 있다.


손목시계 약 바꾸는 작업에서 ‘재주’라고 할 만한 부분을 찾자면 아마 실제 작업 외의 다른 부분이 될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적당한 배터리를 알아내는 것. 당연한 얘기지만 손목시계에는 다양한 형태와 기능이 있고, 들어가는 배터리도 규격이 다양하다. 심지어 국가마다 회사마다 네이밍이 다르고, 배터리의 소재에 따라 코드명도 바뀐다. 천만다행으로 국제규격을 정리한 표를 찾기는 쉬운 편이라 이를 참조하면 되긴 하지만, 그 이전에 시계에 들어갈 배터리가 뭔지부터 알아내야 표를 보고 주문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배터리 호환표. 왜 국제규격 놔두고 국가별 규격도 있죠?



사야 할 물건이 뭔지 알아야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 대체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일까? 처음으로 시계 배터리를 자가 교체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상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공구와 배터리를 같이 주문하고 싶은데 살 배터리를 알아내려면 공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청에서 무슨 서류 두 가지를 떼어야 하는데 가서 보니까 서류 발급에 필요한 증명서 하나는 시청에 가서 떼어와야 하는 격이라고 할까……. 사실 지불하는 것은 택배비와 기다리는 시간뿐이지만, 택배비가 아까워서 괜히 물건 하나 더 고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렇게 주문하면 다음날 받아볼 수 있는 요즘 대도시 환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문턱이 높은 셈이다.


참고로 나는 이 문턱을 우회해 보려고 시계의 수입사에 배터리가 뭐냐고 문의해봤는데, 예쁘기만하고 이름은 없는 브랜드라 그런지 수입사도 아는 바가 없었다. 결국 이를 갈며 공구 따로 배터리 따로 주문해야 했다. 시계 뒷편에 적합한 배터리 모델명을 적어주면 환경 보호에도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배터리의 규격을 알아낸 다음 맞닥뜨리는 난관은 무수히 많은 배터리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문하는 것이다. 한낱 손목시계 배터리에 무슨 고민할 거리가 이렇게 많은가 짜증이 나서 제일 싼 배터리를 샀다면…… 뽑기를 돌린 것과 마찬가지다. 저렴한 배터리는 언제 수명이 다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aaa규격 같은 배터리에 비해 버튼 전지는 작고 기본 수명이 짧아 일어나는 일이리라.


내가 이 사실을 확신하기까지는 반 년 가까이 걸렸다. 기껏 배터리를 바꿨는데 시계가 두어 달 만에 죽어버려서 교체일을 기록해 보니, 저렴한 배터리는 배터리를 교체할 때마다 유지 주기가 감소하고 있었다. 보관 중인 배터리도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저렴한 것 중에도 준수한 배터리가 있긴 했지만, 신뢰할 수 없는 배터리를 넣은 시계를 쓰다가 수업에 지각하고 교수에게 ‘손목 시계가 고장나서 늦었습니다’ 라는 거짓말 같은 사유를 댄 적이 있는지라 가격과 신뢰도를 타협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알아낸 해결책은 ‘수명’이 표기된 배터리를 쓰는 것이었다. 값은 좀 더 나가지만 배터리가 한두 달마다 떨어져서 매번 뚜껑을 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나는 그런 배터리 중에서 레나타 제품을 구입해서 장기간에 걸쳐 시험했는데, 내 손목시계는 8개월 가량 작동했고(계기가 많은 시계라 소비가 심하다), 표기된 기한이 지난 뒤에는 정말 거짓말처럼 손목시계의 작동 기간이 팍팍 줄었다. 표기된 기한 이상으로 유지가 잘 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신뢰할 수 있는 결과였다. 이 정도로 정확하다면 다른 회사 제품까지 비교해볼 필요도 없는지라 지금까지 열 개 들이를 두 세트째 쓰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이란 이렇게 소중한 법이다.


아무튼 시계의 배터리를 바꾸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제품을 테스트하고 최선을 알아내는 과정의 수행은 분명 재주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요컨대 어떤 일을 해내는 것보다 그 일을 수행하기까지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비슷한 예로 밀키트를 사다 끓여먹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같은 요리를 직접 해 먹는 것은 차원이 다르게 어렵기 마련이다. 재료를 선택하고, 양을 조절하고, 발생한 쓰레기를 버리고, 남은 재료는 잘 보관했다가 어딘가에 써먹어야 한다. 이런 것은 누가 방법을 알려준다고 곧장 익혀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절실한 상황이 아니면 따라하려다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이렇게 어떤 작업이든 눈에 보이는 작업은 아주 쉬워보이더라도 그 이면에 어떤 밑준비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남이 하는 일을 보고 ‘그까짓 거 나도 하겠다’ 같은 말은 쉽게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손목시계 배터리를 직접 교체하면서 내가 얻은 소소한 교훈이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재주라도 그 뒤에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쌓여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 일만 힘들고 남의 일은 시답잖아 보이기 쉬운 요즘 특히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손목시계 약을 직접 바꿔보라고 하고 싶은데,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 시계나 스마트워치만 써서 도통 권할 수가 없다. 손목시계 약 바꾸기처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나 시도할 만큼 적당한 난이도로 물건 손보는 재미를 느낄만한 일이 없는데 아쉬운 일이다. 어느 유명 아이돌이 손목시계 약 바꾸는 게 취미라고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기적을 기대하면 안 되겠지?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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