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는 그럭저럭 쓸 만한 물건이 자주 버려지는 편이다. 재활용품을 버리는 날이면 책장이나 매트 같은 생활용품부터 선풍기나 청소기 같은 가전제품까지 다양한 물건이 도처에 등장하는데, 옛날부터 물건 수리하는 게 취미였던 아버지는 이런 물건들 중 괜찮아 보이는 것은 가져다 뜯어보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고 있다. 전기공학에 아무 조예도 없는 나야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버지 말로는 간단한 고장이 많다는 모양이다. 선풍기로 예를 들자면 회전이 안되거나 버튼 하나가 안 되는 식의 고장이다.
이런 물건들이 쉽게 버려지는 데에는 현대인의 나태와 물질 문명의 부패보다는 수리는 어렵고 번거로우며, 사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는 문제가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은퇴한 사람이나 집에서 일하는 사람, 또는 일이 없는 사람 처지에선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평일 내내 일하고 주말에나 겨우 숨을 돌리는 사람이 선풍기 하나 고장났다고 그걸 들고 AS센터까지 찾아가거나, 대형 박스에 잘 포장하여 발송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 새 선풍기를 사는 건 집안에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3만원대에도 해결할 수 있으니, 수리비와 그에 걸리는 시간을 따져보면 역시 새로 사는 게 압도적으로 합리적이다. 예전에는 ‘전파사’라고 해서 간단한 가전제품은 뭐든 수리해주는 가게가 동네마다 있어서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고.
여담인데, 불과 10년 전쯤에도 전파사를 잘 이용한 기억이 있다. 동아리 방에 있던 선풍기의 날개가 깨져서 딱 맞는 것을 빠르게 구해야 했을 때다. 근처의 전파사에 가니 아주머니 한 분이 가게를 보고 있다가 곧바로 딱 맞는 날개를 찾아주었는데, 이때 날개의 규격을 맞추는 기술이 인상 깊었다. 구멍에 볼펜을 슥 찔러보더니 들어간 깊이로 호환품을 찾아낸 것이다. 다른 측정 장비 없이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작업을 수월하게 처리하는 이 기술을 보니 믿음직한 가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풍기 날개를 얼마나 다뤄봐야 그런 요령이 생기는 것일까?
아무튼 세상에 재주 좋고 똑똑한 사람도 많고 고장나는 물건도 많으니까 동네마다 세금으로 돌아가는 전파사가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고장이 잘 나는 저가형 제품을 쓰는 계층이 이용할 확률이 높고, 환경 보호에도 도움이 될 테니 이건 세금으로 할 만한 일이 아닐까?
각설하고, 저번 주에는 아버지가 주워서 수리해 놓은 선풍기를 집안 곳곳에서 끌어모아 보니 예닐곱 대는 되어 슬슬 보관의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단 한 대를 중고 장터에서 팔아봤는데, 하나 팔고 영 할 만한 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일단 저렴한 선풍기는 신품도 3만원대다. 따라서 2만원대에 팔면 적당할 듯싶으나 멀쩡히 잘 쓰던 물건은 또 아닌지라 값을 더 낮춘 만 원 언저리에 팔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니 거래 자체가 이득이라고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중고 거래라고 별 노동도 없이 공돈이 막 생기는 게 아니다. 구매자가 문의하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답변해야 하고, 약속도 잡아야 하며, 물건을 들고 나가서 기다렸다가 건네주기도 해야 한다. 한 번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선풍기처럼 무겁고 운반이 어려운 물건을 한여름에 갖고 나가는 짓을 몇 번이나 한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입맛이 달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집에서 쓸 것을 제외하고 세 대를 한꺼번에 기증할 방법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기증도 그냥 마음먹었다고 짠!하고 단숨에 깔끔히 처리되는 일은 아니었다. 가져갈 사람을 부르면 그 나름의 비용이 발생하며, 택배로 보내는 것도 상당히 비효율적인 작업이다. 선풍기라는 물건이 소형가전이라기에는 부피가 작지 않을 뿐더러 막 다루면 부서지기에 포장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직접 갖다줄 수 있는 거리의 공공기관인 주민센터(동사무소 혹은 행정복지센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도 좀 이상했다. 사용하지 않는 가전제품을 받아서 점검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건 분명 주민 복지 차원에서 함직한 일인데, 그런 행정 절차, 창구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검색해 보면 누가 선풍기를 여러 대 기증했다는 동네 인터넷 기사는 있으나, ‘가전제품 기증? 저에게 맡겨주세요!’ 같은 홈페이지 메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그런 창구를 상설해 놓는 것이 행정에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는 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회전은 안 되는데 돌아가긴 하니까 기증이나 하지 뭐!’하고 반쯤 폐기하듯이 떠넘기는 사람이 늘어날 수도 있고, 이것들을 검수하자면 새 물건을 마련하는 것 이상의 비용이 지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주민센터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봤다. ‘담당자 연결’이 잘 되지 않아서 전화를 다시 걸어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뭔가의 담당자와 통화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증은 불가능했다. 새것이라면 가능한데, 중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절차적인 이유가 있으리라. 담당자는 직접 처리하시는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만약 폐기하시는 거라면 따로 모아놓고 있으니 연락을 달라고 했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딱히 처분할 방법이 없으면 버리라는 식으로 들렸다.
내게 남는 자원이 있고, 이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데 절실함을 평가할 방도가 없으니 법적으로 그것이 가능한 기관의 도움을 받겠다는데 이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줄이야. 다시 파는 수밖에 없나? 한참 고민하던 나는 밑져야 본전으로 옆동네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번에는 반응이 달랐다.
“그래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라도 맞이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초수급자들 중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얘기를 듣자니 센터 직원이 수거하러 올 수도 있는 듯싶었으나, 행정력을 낭비시키는 것도 미안하다 싶어 직접 가져가기로 했다.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마음대로 끌어다 쓰는 것은 일 없는 프리랜서의 특권이다. 그리하여 점심을 먹고 손수레로 선풍기 세 대를 날랐다. 바닥에 캠핑용 테이블 상판을 깔고 테이프와 줄로 이리저리 감았는데도 진동에 따라 자꾸 흘러내려 더위 속에 악전고투를 해야 했지만, 잘 쓰겠다는 담당자에게 전달하고 나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했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이번 일을 둘러싼 부조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묘하게 씁쓸해졌다.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는 물건을 버리고 새로 사는 게 편해서 그렇게 하게 되는 상황도 있고, 가전제품을 기증하겠다 해도 이를 적재적소로 보낼 수 없어 버릴 방법을 알려주는 상황도 있는데, 그로부터 20분 거리에는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 보낼 물건이 모자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누가 악의를 갖고 행동한 게 아닌데도 이 모양이다. 일본에서 올림픽 때문에 준비했던 도시락을 내다버리는 와중에 봉사자들은 도시락이 적으니 그거라도 달라고 요청하는 촌극을 보며 어이없어 했는데, 이런 일은 의외로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요컨대 절차와 제도의 개선 없이 개인의 선의로 자원을 적절히 분배하고 환경을 지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노력을 다 헛된 짓이라고 폄하하면 안 되겠지만, 개인의 선의와 노력이 제도를 타고 효율적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봐야 뭘 할 맛이 좀 나지 않겠는가?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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