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어머니의 생신을 기념하여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 머신을 들였다. 그로써 원두 커피와 이를 내리는 갖가지 방법들에 대한 검토는 막을 내리고, 간편하게 진보한 현대의 커피 문화를 즐기게 될 줄 알았다.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누르고 끝. 이보다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맛을 보장해주는 방식이 또 있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캡슐 커피 머신을 써보니,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진 않았다. 일단 커피 양이 적다! 평소에 350밀리 정도를 정량으로 생각하고 마시는데, 캡슐로 내린 커피는 그 반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을 더 타면 맛이 애매해지고. 자본주의의 총아 코스트코의 6종 캡슐 세트에서 Deciso는 물을 양껏 타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것을 발견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내가 즐겨 마시는 맛보다 산미가 강해서 식을 때까지 천천히 마시다 보면 어쩐지 좀 잘못 시킨 음료를 억지로 마시는 듯한 기분이 된다.
요컨대 내 몸에 꼭 맞는 캡슐과 희석 비율을 찾아서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신비롭고 향기로운 커피의 세계! 천변만화하는 맛의 도가니탕! 이렇게 써놓으면 느긋하게 즐겨보고 싶은 멋진 문화의 정수 같지만, 간편하게 쓰자고 들인 기기로 새 취향을 찾느라 몇날 며칠 별별 연구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닥 반갑지도 않다. 심지어 커피란 카페인 때문에 연거푸 호로록 마실 수도 없는 음료인 데다 한 잔당 가격도 웃어넘길 수만도 없으니 더욱 그렇다. 여러 맛을 다 즐기면서 자기 맛을 찾아가는 것 아니겠냐고 생각하기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부담스럽다.
그리하여 캡슐 커피는 긴급 카페인 보급용으로만 쓰고 아침의 정신 부팅용 방탄 커피는 그동안 먹던 대로 원두 커피를 핸드밀로 갈아서 수동 에스프레소 추출기인 카플라노 컴프레소로 내려 먹기로 정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이 과정이 은근히 귀찮다. 특히 피곤한 것은 원두를 핸드밀로 가는 과정인데, 믹서 형태의 전동 그라인더로 에스프레소가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입자가 굵으면 압력이 높아지지 않는다) 구입한 하리오 핸드밀(약 30000원)을 열심히 약 200바퀴쯤 돌리고 있자면 땀이 배고 팔이 아플 지경이다. 운동 시늉은 하고 사는 내가 이 지경이니 노약자에겐 도저히 권장할 수 없는 활동이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쟁기로 밭을 가는 기분이라면 약간 과장이지만, 아무튼 이 활동이 피트니스의 영역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도 수동이 그렇지 뭐, 운동도 되고 좋지…… 라고 생각하며 몇 달을 그대로 지냈는데, 최근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썩 훌륭한 핸드밀을 7만원 정도에 파는 것을 발견했다. 브랜드도 유명하고 설명도 제법 믿을 만했다. 두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돌릴 정도로 매끄럽다는 설명까지는 믿을 수 없었지만(에스프레소 굵기로 갈면서 그게 가능하면 현대 공학의 쾌거일 것이다) 그렇게 자랑할 정도라면 적어도 지금 쓰는 세라믹 방식보다는 확실히 잘 갈릴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원래는 10만 원 넘게 받을 물건을 기간 한정으로 싸게 판다는 말에 홀랑 넘어가서 펀딩에 참여했는데...... 커피를 한 번 더 내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니 마음이 아무래도 편치 않았다.
일단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브랜드가 아닌 만큼 품질은 믿어도 좋을 것 같긴 했으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써보고 좋다고 후기를 남긴 제품들 만큼 믿을 수야 없었다. 그런데 7만원이라면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 뭐! 교훈 삼아야지' 하고 웃어넘기기엔 적잖이 뼈아픈 금액이다.
그럼 그냥 성능이 보장된 핸드밀을 10만원쯤 주고 들이는 건 어떨까? 7만원에서 10만원으로 지출이 는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떨릴 지경이지만, 성능이 완벽히 보장된 제품이라면 두고두고 쓰며 행복할지도 모른다. 요즘 흔히 말하는 '가심비'에서는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10만원짜리 핸드밀의 기가 막힌 조형과 아름답게 커팅된 스테인리스 날을 보면서 공학적 황홀함을 느끼다가도 가격을 보면 역시 정신이 번쩍 든다. 저렴한 핸드밀로 에스프레소가 안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런 고급품을 사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에스프레소를 그대로 마시는 것도 아니고 커피 맛에 통달한 커피 마스터도 아닌 내가 1킬로에 8천 원짜리 원두 커피를 내리는 도구에 이 만큼 투자하는 건 온당한 일인가? 무엇보다 온당하고 온당하지 않고를 떠나서, 뭘로 갈든 차이를 느끼지 못하면 어쩌지?
다시 7만원짜리 펀딩을 본다. 10만원에 비하면 합리적인 것 같다가도 내가 아예 품질의 차이를 체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다. 게다가 지금이 아니면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나를 조종하고 있기도 했다. 만약 내가 '기간 한정'에 구애되지 않고 언제든 7만원에 괜찮은 핸드밀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구입할까?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펀딩을 취소하고, 핸드밀을 좋은 것으로 바꾸길 포기했다. 세상은 넓고 살 것은 많지만, 핸드밀의 우선순위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으며, 내가 그 우선순위를 거꾸로 타고 내려갈 정도로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기술이란 필요성이 어느 정도를 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 법이라는데, 이 경우가 바로 그렇다. 좋은 핸드밀을 쓰지 않는다고 부상을 당하거나 시간을 크게 손해보는 일도 없다. 그러니 힘 닿는 데까지 저렴한 핸드밀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매일 아침 세상을 밝히는 태양의 축복 속에서 무거운 핸드밀 손잡이를 돌리며 생각할 것이다. 이건 돌릴 때마다 커피와 함께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오는 멧돌이라고…….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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