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보살피는 일을 무겁게 여긴다. 그래서 동물을 장기간 키운 적이 없다. 형이 주워온 병아리들이 하루만에 죄다 죽어나가는 참사를 본 적도 있고 금붕어를 페트병에 담아 이틀 쯤 놔뒀다 어디로 보내는 모습도 봤으며 아버지가 직장 근처에서 데려온 개를 집 앞에 이틀 쯤 묶어놓은 적도 있으나 내가 책임을 진 적도 없고 정이 들만큼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가 있어선지 나는 방에서 식물조차 키우지 않는 메마른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때까지는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 터라 좋고 싫고도 없었고 생활의 풍경이 메마른 건지 촉촉한 건지도 몰랐다. 그러다 몇 년 전 작업을 하러 도서관에 다니다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과도하게 크고 깔끔해서 환경 재난으로 망해버린 인류의 마지막 벙커처럼 삭막해 보이기 직전이던 그 도서관 곳곳에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놓여 이용자의 정서를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물을 채운 아크릴 상자에 키우던 개운죽은 말끔하고 청량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나도 저걸 좀 키워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마음먹고 개운죽을 열 뿌리 주문했고, 도착한 그것들을 집에 있던 물병 둘에 나눠 꽂고 책상 좌우에 놓았다. 가로로 긴 통에 일렬로 꽂아서 대나무숲처럼 시원한 느낌을 더 주면 좋았겠지만 기다란 통을 구하기 어려워 그 정도로 만족했다. 그것만으로 내 책상은 새까만 화면과 잡동사니로 가득한 미치광이 발명가의 작업대가 아니라 생기있는 삶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대기업 사무실에 가면 에어컨 바람을 가리는 용도인지 커다란 초록색 바나나 잎 같은 장식들이 자리마다 놓여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보기에 좋았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데 문제를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개운죽은 그냥 물을 주고 종종 물을 갈아주거나 너무 길어진 뿌리를 잘라주는 것 말고는 아무 관리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잘 자랐다. 40센티 정도의 길이로 자랐기에 나는 주워온 화병으로 분갈이를 해주고, 좀 더 욕심을 내서 테이블 야자도 두 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테이블 야자 역시 야자 나무의 축소판 같은 모양새로 청량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좋았으며 수경재배도 가능했다. 나는 이 사소한 인테리어에 만족해서 더 진지한 식집사가 되어볼까 생각했다. 그럴듯한 카페에서 종종 보이는 몬스테라가 참으로 멋져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격도 문제인데다가 그렇게 큰 화분을 놓을 공간이 없었다. 이미 바닥부터 천장까지 다 드러난 벽이 없을 지경인데 무엇을 어디에 더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나는 거실에 있던 스킨답서스와 다육이 하나를 방으로 가져오고 수국 조화를 한 다발 사서 책장 위에 놓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그게 내 보잘것없는 식집사 커리어의 최고점이었다.
내리막의 시작은 뜻밖의 영역에서 찾아왔다. 바로 풍수지리다. 민간 신앙이나 습속등으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바꿀 정도는 아니지만 생활의 작은 선택은 고려할 정도로 풍수지리를 신봉하여 해바라기 그림을 곳곳에 놓기도 하던 어머니가 축축 늘어지는 식물을 놓으면 기운이 좋지 않다는둥 복이 달아난다는 둥 영문 모를 주장을 하며 스킨답서스를 치우길 권했던 것이다. 결국 모양이 그리 예쁘게 잡히지 않아서 딱히 큰 정을 붙이진 않았던 스킨답서스를 다시 베란다로 반납하고 말았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서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식물을 두면 운의 흐름이 끊긴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오래된 격언이나 속담, 풍습 따위에는 어떤 식으로든 합리적인 이유나 교훈, 또는 과거의 생활상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려던 나도 여기엔 넌더리가 났다. 운의 흐름이란 대체 무엇이며 얼마나 나약하고 변화무쌍한 것이기에 고작 식물 열 줄기에 바뀌고 말고 난리부르스를 춘단 말인가. 그리고 애초에 개운죽은 모양만 대나무 비슷하게 마디가 있을 따름이지 대나무조차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받아넘겼는데, 그러기를 한 일 년 가까이 하다 보니 지치고 말았다. 몇 줄기 식물 때문에 끊임없이 불합리한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그냥 포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내 방 인테리어라곤 하지만 늙은 나이까지 얹혀 살면서 내 방은 내 마음대로 할 거라고 주장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개운죽을 깔끔히 정리해서 당근에 올렸다. 몇 년을 물주고 먼지 털며 키운 생명들인데 대충 잘라 죽여버리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운죽은 원래 저렴한 식물인데다 남이 키우던 걸 사려는 사람도 얼마 없었던 탓에 5천 원이라는 헐값까지 떨어트린 뒤에야 간신히 새 주인을 찾아줄 수 있었다. 그래도 팔렸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면 어디 몰래 풀어줄 수도 없고 어쨌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심취해서 침대 방향을 정하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집은 그 정도도 아니고 수맥에도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도 감사히 여길 일이다. 달리 뭐 어쩌겠는가.
개운죽이 떠나고 나자 내 책상은 테이블 야자만이 살아숨쉬는 공간이 되었다. 다소 심심해졌어도 아직은 양호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책상이 찬 게 싫어서 진녹색 매트를 깔아서 안온하고 차분해지기도 했다. 그나저나 테이블 야자는 신기한 구석이 있는 식물이었다. 내가 뭘 착각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키우다 보니 어느 시점엔 뿌리를 나누면 별 손상 없이 나뉘어 증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테이블 야자의 작은 뿌리들을 떼어서 곳곳에 두고 방안의 녹지를 늘리는 시도를 했다. 카페 중에서 어떤 멋스러운 곳은 트레이에 조그만 수경재배 화분을 올려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 정도로 작은 화분이 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마음이 다소 맑고 편안해져서 좋은 시도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물이 문제였는지 과한 광량이 문제였는지 이 조그만 화분들은 내 삶의 희망처럼 갈색으로 말라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15센티 정도로 키웠던 녀석도 모든 잎과 줄기가 말라버려 자르고 또 잘랐더니 극도로 작은 싹 하나만 남고 말았다. 야자라고 하면 뜨거운 태양 아래 쭉쭉 자라서 그늘을 드리워줄 것 같은데, 개운죽 수준으로 아무렇게나 키워도 될만큼 튼튼한 녀석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30센티쯤 되는 테이블 야자가 두 그루, 흙에 심은 홍콩 야자가 한 그루 남아서 다소 미적지근한 녹지를 연출하고 있다. 아쉬운 차에 키워달라는 쪽지가 붙은 채 버려진 아이비를 발견해서 주워온 적도 있긴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슨 병충해가 있는지 모를 식물을 들이는 것도 수경재배 하나 똑바로 못하는 식집사 실격자가 할 짓이 아니다 싶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예전에 후배가 포인세티아를 선물받았다가 진드기를 이기지 못해 줄기며 잎이며 모조리 잘라냈던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떨어진 신발 밑창도 붙이고 노트북 배터리도 직접 교체하는 나지만 살아있는 것을 건강히 잘 돌볼 자신은 없다.
아무튼 여전히 다소 심심한 책상을 보면 열심히 키웠던 개운죽이 그리워진다. 재수가 없다는 누명을 쓰고 팔려간 죄없는 개운죽.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그러나 그립다고 풍수지리의 습속이 횡행하는 이 땅에 다시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있는 야자나 잘 키워야겠는데…… 가지도 잎도 다 시들어 새싹 한 줄기만 남은 화분을 보자면 아무래도 걱정스럽다. 스스로 자르지 못해 친구에게 잘라달라 해서 문 밖에 내놓은 후배의 포인세티아는 어느날 돌아보니 다시 희망의 메타포처럼 건강한 잎이 자라났다는데, 죽어가는 나의 테이블 야자도 그렇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나도 식집사 실격자로서의 죄책감과 자괴감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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