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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13. 2023

어제는 씽씽카를 탔지만 내일은 자전거를 타야해


씽씽카라는 단어를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게 지방 사투리인지 우리집 애칭인지, 혹은 그냥 제품명인지 확실치 않다. 요즘 말로는 킥보드, 영어로는 스쿠터라 부르는데, 일단은 킥보드라고 하자.


킥보드의 90년대 초 제품은 대개 앞바퀴가 하나, 뒷바퀴가 둘이었다. 요즘 나오는 아동용 킥보드처럼 앞바퀴가 둘, 뒷바퀴가 하나인 경우는 물론이고 성인용처럼 앞뒤에 하나씩인 모양도 본 적이 없다. 처음에 세발자전거를 축소해보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떠올려 만든 것일까? 그래서 요즘 애들 킥보드를 볼 때마다 좀 혼란스러운데, 체중을 앞으로 싣고 다니는 만큼 균형감각이 덜 발달한 아동이 타기에는 앞쪽이 안정적인 근래 모델이 나은 것 같다. 브레이크를 부착하기에도 뒷바퀴는 하나인 게 유리하다. 앞바퀴에 브레이크를 달면 멈추는 순간 뒷바퀴가 들리기 쉬울 것이다. 어디서 공학적인 분석을 본 것은 아니고, 그냥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똑똑한 사람이 잘 개량했겠지.


어릴 때 부터 나는 씽씽카를 재미있게 잘 타고 놀았다. 형이 자전거를 탈 때 나는 씽씽카를 타고 놀았는데, 어린데도 나름대로 요령이 붙게 된 덕인지, 어머니는 애가 씽씽카를 그렇게 잘 탈 수가 없었다고 감탄하곤 했다. 연립주택의 마당에서 그걸 아무리 잘 타봐야 고만고만할 테고 나 특별한 재주나 묘기를 부린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단 한 가지, 달리다가 멈출 때 발판에서 뛰어내리면서 앞바퀴를 높이 들어올린 것만은 기억난다. 나름대로 모터사이클의 재주를 따라해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싹수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뭘 타다 다리 하나쯤 부러졌을 것 같은데, 그런 적은 없어 참으로 다행이다.


질풍같은 씽씽카의 나날은 성장해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며 막을 내렸다. 화창한 봄날, 공원에서 한참 논 뒤에 어머니는 이제 씽씽카를 그만 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나는 길게 고민할 것 없이 그러겠다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씽씽카를 무척 좋아하긴 했지만 삶은 변화하기 마련이니 언제까지고 영원히 타고 놀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미취학 아동이 그런 음울한 생각을 했을리는 없으니 실제로는 슬슬 자전거를 타고 싶어진 것이겠지만. 아무튼 씽씽카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도록 공원에 그대로 두고 왔다. 딱히 근처에 줄 만한 애도 없고 90년대에는 중고 장터 앱도 카페 따위도 없었으니 그게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다.


(무엇을 애정한들 소라게가 집을 고르듯 몸에 맞는 이동수단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형에게서 자전거를 물려받은 나는 공원에서 자전거 타는 법을 대충대충 익히고 일요일마다 절에 다니며 몇 킬로나 주행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그 부근의 아파트 단지가 워낙 정비가 잘 된 덕이었다. 학생 시절에는 생활 패턴이 크게 바뀐 탓에 자전거를 주기적으로 탈 일이 없어졌지만, 공익근무를 할 때는 문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언저리를 달려 매일 출퇴근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요즘도 이틀에 한 번 이상 그 언저리를 지나며 구경도 하고 운동도 한다.


그 사이에 자전거는 꽤 여러 대를 탔다. 사실 몇 대인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자전거도, 물건 수리하는 일도 취미로 하는 아버지가 기회만 되면 자전거를 얻어오거나 헐값에 구해와서 수리하고 교체해주기도 하고 탈 일이 거의 없어진 물건은 또 처분하기도 했기에 어느날 갑자기 이제 새 자전거를 타라는 통보를 듣는 경우가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Q가 새 장비를 건네주면 본드가 투덜대면서도 받아쓰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다. 그래서 내게 자전거 한 대 한 대에 대한 애착은 별로 남지 않았다. 가장 오래 탄 자전거가 어디 제품이었는지 어떤 색이었는지도 기억이 없다. 선임들 연락을 씹고 애인을 자전거에 태워 놀러 나간다는, 어지간히 호르몬에 지배되지 않으면 못할 짓을 저지른 적도 있는데 그때 탄 자전거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주어지는 대로 쓰기만 하고 관리에 돈도 노력도 별로 들이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쏟은 시간에 비례한 애정 또는 미련을 갖게 되는 법이니까.


그러다 4년 전쯤부터 이동 수단에 소소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자전거를 내 돈으로 샀다. 자전거를 한참 타지 않아서 외발자전거 한 대 말고는 어디 몇 대가 저장되어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이 무슨 갑부 같은 소리인가), 인근에 우리동네 자전거포라고 해서 지자체 인증 자전거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한 대를 사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괜한 짓거리였지만, 그때는 도서관에 걸어가기가 너무 귀찮아서 아무렇게나 부담없이 대충 탈 이동수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터라 저지를 만한 일이긴 했다.


그렇게 구입한 자전거는 흔히 말하는 ‘신문사 자전거’로, 무겁기 짝이 없어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물건이었던 데다 넘쳐나는 중고 자전거의 시세를 생각하면 비싸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원하던 대로 대충 타고 다니기엔 문제가 없어서 한동안 도서관을 오가고 사소한 짐을 나르는 데에 매우 잘 써먹었다. 고급하지 않은 물건에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다만 그로부터 1년인가 2년이 지난 뒤에 아파트 자전거 보관소에 어느 집이 ‘필요한 분이 가져가세요’라고 적힌 자전거를 발견해서 곧장 애마를 바꾸고 말았다. 유명 브랜드의 중급쯤 되는 제품이라 가볍고 기어도 내가 선망하던 트리거식이었으므로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에는 정을 많이 붙였다. 내가 타본 것중에서 가장 좋은 제품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선의와 나의 행운이 가져다준 물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어떤 자전거보다 길게 타서 중간중간 손도 많이 봤고 잡다한 부속 장치도 많이 달았다. 이에 대해선 또 한 바닥 쓸 얘기가 있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자.


또다른 변화는 바로 킥보드를 주웠다는 것이다. 심지어 흔히 볼 수 있는 전동식이나 성인용 대형 킥보드가 아니라 접이식 킥보드였다. 모델명을 보고 잘 검색해보니 절판되긴 했지만 휴대성으로는 가히 최고 수준의 제품이란다. 설명을 보고 접어보니 손잡이와 지지대도 접히고 발판도 접혀서 잘 만하면 커다란 백팩에도 넣을 수 있을 듯했다. 과연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버려진 물건답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브레이크가 없었다. 어디 붙어있다 떨어진 흔적조차 없었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자라면 브레이크가 없는 이동 수단을 타고 다니지 않는다. 스케이트 보드나 인라인 스케이트도 브레이크는 붙어있다. 그래서 다시 사진을 보니 분명 원 제품에는 뒷바퀴쪽에 발로 밟는 브레이크가 달려 있었다. 어쩌다 원래 있었을 브레이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나는 그것을 도로 버리든지 바퀴를 발로 밟아서 브레이크를 대신하든지 브레이크 부품을 구해서 붙이든지 해야 했는데…… 아주 오랜만에 킥보드를 이용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수리를 택하고 말았다. 하여간 욕심이 끝없는 인생이다.


아주 작게 접히는 킥보드라면 제법 팔려서 부품 구하기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 나는 일단 각종 쇼핑몰을 뒤적였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해당 제품의 부품은 물론이고 호환품도 나오지 않았다. 잘 안 팔린 모양이었다. 결국 한참을 검색한 끝에야 그나마 사이즈가 비슷한 유명 전동 킥보드의 브레이크 호환품을 주문할 수 있었다. 재주 좋게 잘 부착하기만 하면 도서관처럼 적당한 거리는 번거롭게 자전거를 꺼내지 않고도 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럭저럭 괜찮다면 여행지에서도 유용하게 쓸 일이 있지 않을까하는 원대한 꿈도 품었다. 마트나 편의점이 먼 숙소에 머물 때마다 한참 걸어다니기 귀찮았던 경험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달여만에 도착한 브레이크를 부착하려고 킥보드에 대본 나는 낭패한 심정이었다. 분명 크기를 신경 써서 재보고 주문한 것인데도 브레이크를 끼워넣을 바퀴 앞 구멍보다 큰 게 아닌가. 몇 천 원 쓰지 않았으니 이제 슬슬 다시 내다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다시 머리를 처들었다. 괜한 욕심을 버리고 일상에 만족하면 평화가 찾아올 게 분명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브레이크 부품이 하나 남긴 하지만…….


한참 고민하던 나는 결국, 당연하게도 브레이크의 개조에 착수했다. 어리석게도 브레이크에 투입한 매몰비용을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돈이 그냥 없어졌으면 모르되, 돈을 주고 산 부품이 무용지물이 되어 내 손으로 내다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시도해보고 실패해서 버리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 물건을 그냥 버리겠나. 과장하자면 그건 농부가 직접 키운 사과를 따서 곧장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내 영혼의 일부를 손상시키는 것이나 다를바 없단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궁리를 거듭한 끝에 브레이크의 테두리를 약간 잘라낸 다음 발판의 고무 패드를 약간 뜯어서 틈을 만들었다. 그런 뒤에야 브레이크는 아슬아슬하게 들어갔다. 이것만으로도 사용은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안전 장치를 대충 밀어넣어 끼워놓기만 하고 타고 다닐 순 없었다. 나는 또다시 궁리한 끝에 글루건으로 브레이크를 접착하고, 브레이크와 고무판을 나사로 고정했다. 고무판이 브레이크를 단단히 고정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브레이크가 제자리를 완전히 벗어나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수리한 킥보드를 타고 아파트의 구석에서 남몰래 돌아다녀보니 은근히 신경 쓰이는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손잡이도 손잡이까지의 지지봉도 모두 접이식이라 어쩔 수 없이 유격이 있었던 것이다. 작은 봉이 큰 봉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라 너무 빡빡하게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손잡이도 지지봉도 모두 덜컥거리니 도무지 안정감이 없었다. 이중에 손잡이는 충격 방지 패드를 붙여서 유격을 줄일 수 있었으나 지지봉은 손보려면 해체해야 하는 구조라 어쩔 방도가 없었다. 결국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수리한 킥보드는 힘을 주어 흔들면 손잡이가 앞뒤로 5센티 이상을 움직이는, 조금이라도 험한 주행을 하면 불안감이 엄습하는 물건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이 공포의 킥보드는 시운전 이후로는 자전거 보관소에 묶인 채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일단 집이 얕은 언덕에 있는 터라 어딜 가도 돌아올 때는 걸어와야 하는데, 아무리 작고 가벼운 킥보드라 해도 쇳덩어리인 물건을 들고 오기가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나 역시 어디 다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이어가고 싶은 기본적 욕망을 가진 생물인 터라 도통 손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넘게 묵혀둔 킥보드를 저번 달에 겨우 실제로 사용해봤다. 택배를 편의점에 접수하러 가야 하는데 족저근막염으로 발바닥이 편치 않아 걷기는 귀찮고, 자전거를 타자니 자전거를 꺼내서 계단 위로 끌어올리거나 먼 경사로로 돌아가야 했던 탓이다. 그만하면 킥보드를 타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헤아리기도 싫을 만큼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마침내 나는 킥보드를 다시 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길 위로 나서자마자 나는 모든 게 틀렸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말았다. 일단 그놈의 킥보드는 미약한 경사로를 올라가는 것도 도통 편치가 않았다. 바퀴 달린 물건이니 걷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예상했는데, 끊임없이 바닥을 발로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퀴가 낮은 쪽으로 구르려는 것을 막고 반대로 밀어내야 하는데 이걸 한 발로만 하니 빠르게 지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킥보드가 짧은 탓인지 아니면 가벼운 탓인지 발을 구를 때마다 위로 향하는 힘이 손잡이까지 전해져 매번 덜컹거렸다. 그렇다면 내리막에선 편했을까? 나도 그러길 기대했는데, 그다지 그렇지 않았다. 빠르게 힘을 들이지 않고 내려갈 수는 있었지만 타이어가 속이 꽉찬 고무라서 노면의 요철이 그대로 느껴졌고, 심지어 브레이크의 마찰력이 약해서 사력을 다해 밟다 못해 마지막엔 뛰어내려 몇 걸음이나 달려야 했다. 요컨대 이 작고 귀여운 킥보드는 부딪힐 게 전혀 없는 허허벌판이 아닌 다음에야 탈 물건이 아니고, 빨라질 수록 눈앞에 119 구조대가 오락가락하는 접이식 고문기구에 가까웠다.


결국 나는 이 저주받은 물건을 분리배출일에 폐철을 모으는 쪽에 내다버렸다. 씽씽카는 평평한 앞마당과 공원에서 타고 놀 때나 아름답고 즐거운 놀이기구였던 것이다. 늙고 지친 데다 지독하게 무거워진 어른이 일상 속 이동수단으로 고려할 물건은 아니었다. 나는 또 길고 긴 시간을 들여 헛짓을 하고 말았다. 복구할 수 있는 추억과 그럴 수 없는 추억이 있다는 걸 언제쯤 잘 이해하고 분별하게 될까? 추억의 가치는 값으로 따질 수 없다고 하면 보통 추억이 귀하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거기엔 사실 추억이란 값을 지불한다고 되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뜻도 있음을 쓰레기장에서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 추억으로 남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 이어져온 자전거의 즐거움을 열심히 아끼며 살아가련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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