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Dec 27. 2023

2023년을 빛낸 소비의 기록



근래에는 블로그보다는 책에 더 가까운 글을 쓰자고 결심하고 느린손을 열심히 놀려 좌충우돌하며 살았으나 어떻게 쓰든 별로 인기도 없고, 예전에 쓴 소비 어워드가 반응이 좋았으므로 올해 어워드를 다시 쓴다. 사실 무슨 물건을 고쳤다는둥 물건을 고치면서도 뭔짓인지 모르겠다는둥 늘어놓은 한탄보다는 무슨 물건을 사서 잘 쓰고 있다는 이야기나 어디 갔더니 재미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인기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중에게 제품 정보와 구매욕이라는 확실한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별 보상이 되지 못하는 글을 너무 길게 오래 공들여 써왔다는 후회를 하며 한 해를 마치자니 영 씁쓸하다. 이런, 또 푸념을 하고 있군.


1. 헌팅캡

아름다운 가게에서 몇 천원에 구입한 헌팅캡이다. 그간 나에게 맞는 모자는 정녕 없단 말인가, 하늘은 왜 나를 낳고 맞는 모자는 낳지 않으셨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통곡하며 정처없이 떠돌고 있던 터라 예뻐보이는 모자가 보이면 일단 써보는 습관이 들었는데, 이 헌팅캡은 써보자마자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양도 무늬도 예쁘고 내 머리에 맞았다. 오히려 줄여서 써야 할 지경이었다. 이 정도로 대형 두상에 적합한 모자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반면에 모자 크기를 잘 알아보고 사야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판매자가 워낙 많아서 ‘프리 사이즈’ 같은 언어도단적 표현만 적힌 제품은 너무 많다. 다들 프리 사이즈 긴고아를 쓰거나 프리 사이즈 아이언 메이든 같은 것에 처박히는 지옥에 가길 바란다.


아무튼 성인이 된 이후로는 거의 처음으로 잘 맞고 잘 어울리는 모자를 갖게 된 것 같다. 두껍지 않은 린넨 면 혼방이라 겨울에는 추울 것 같았는데, 린넨이 열 차단을 잘해서 겨울에도 괜찮다 한다. 실제로 영하 10도에 쓰고 돌아다녔는데도 머리 꼭지가 시리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새로운 발견이다. 친구들은 딱히 모자에 대해 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어머니는 모자만 30개 이상 보유한 모자-빌 게이츠니까 모자에 관해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


그간 모자 잘 어울리는 사람을 항상 부러워했는데, 괜찮은 모자가 생기니 나도 어엿한 어른이 된 것 같고 마음이 든든해서 외출할 때마다 쓰고 다닌다. 감지 않은 머리로 돌아다니는 자유의 맛이란! 흔히 패션의 완성은 모자라고 하던데 과연 이제 모자가 없으면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나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형은 헌팅캡을 보고는 왜 아빠처럼 하고 다니냐고 하고, 형수는 어르신이 나오는 줄 알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나이가 들어보이는 게 아닌가 의심은 든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올드한 룩이 어울리는 사람이니 어울리는 대로 사는 수밖에…….


2. 모그라미 슬로우 슬랙 패딩

본래는 등산에 적합한, 즉, 물에 젖어도 보온성이 떨어지지 않는 합성 충전재 패딩 재킷을 사려던 차에 중고 장터에서 발견해서 주문한 롱패딩이다. 절판되고도 아직 남아있는 리뷰를 찾아보니 가볍다는 사람도 있고 무겁다는 사람도 있어서 망설이면서도 샀는데, 받아보니 가볍다곤 할 수 없었다. 다른 제품의 라지쯤 되는 것 같은 스몰이 1470그램 가량으로, 내가 가진 롱패딩보다 약간 더 무겁다. 다만 면적이 분명 더 넓으니 충전재 자체가 다운보다 더 많이 무겁다곤 할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훌륭한 인공 충전재도 거위 솜털을 따라갈 수 없고 보온성을 따라잡으려면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는 말을 많이 봤는데, 실제로 합성 충전재 패딩을 써보니 천연 소재를 능가할 날이 곧 올 것 같다.


다만 이러나저러나 이렇게 무거운 옷을 입고 산에 오를 순 없으니 원래 목적과 달리 일상용으로 쓰게 되었다. 그래서 괜한 물건을 더 늘이고 말았다고 후회했으나, 일상속에서 입고 돌아다녀보니 제법 만족스러웠다. 필요에 따라 하단부를 떼어 숏패딩으로 입을 수도 있고 팔을 떼어 조끼로 입을 수도 있다는 게 상당히 유용하다. 나는 하단을 떼고 팔 연결 지퍼를 반쯤 열어 통풍구로 쓰며 아주 추운 날 자전거를 탈 때, 혹은 짧은 외출을 할 때 입는다. 체감 영하 13도에서 자전거를 타면서도 무난했으니 보온성은 충분한 듯하다.


무엇보다 이 패딩이 멋진 점은, 다른 패딩과 달리 젖거나 오염되지 않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싸게 구하기도 했지만 합성 충전재라서 대충 세탁기에 돌려버리기에도 부담이 없다. 군필자들이 흔히 일상속에서 막 쓸 물건을 ‘전투용’이라고 부르는데, 과연 전투용이라고 부르기 좋은 패딩이다. 나는 아름답고 비싸서 평소에 잘 모셔두고 가끔 쓰는 물건보다는 이렇게 손이 자주 가는 물건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3. 프로월드컵 워킹화


이 신발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따로 글을 쓰고 싶은데 신발 고치는 얘기를 좋아할 독자보다 지겨워할 독자가 많은 듯해서 일단 짧게 정리한다. 


이 꼴이 된 신발을 이제 버렸나 싶을 정도로 뒷굽이 심하게 마모된 이 신발을 주운 것은 석 달쯤 전이다. 주우면서도 또 미친 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디자인이 마음에 들고 안감이 고어텍스로 처리된 제품이라 일단 고쳐보기나 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어지간한 신발은 다 손볼 수 있다고, 사실과 동떨어진 오만한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을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워킹화, 독특하게도 밑창이 신발 자체보다 더 넓게 튀어나온 데다가 걷기 좋으라고 뒷굽을 둥글게 만들어놓았고, 게다가 마모는 사선으로 편마모가 심했기 때문에 원상태에 가깝게 균형을 맞추는 게 더럽게 힘들었다. 골든 구스 복원은 작업 대부분이 생각대로 진행되었지만 이건 적정모양을 찾는 것부터 지독하게 난해했다. 게다가 겨우겨우 실리콘 냄비 받침과 김밥말이로 복원을 마치고 신어보니 빗길에 미끄러워 처음부터 재작업해야 했다. 실리콘 소재를 쉽개 구해 밑창을 수선하라고 쓴 글도 고치고 다녀야 했다. 하마터면 이때 마음이 꺾일 뻔했다.


그런 고난 때문에 두 달만에 복원을 겨우 마쳤다. 실리콘을 포기하고 운 좋게 주워온 프로월드컵 샌들 밑창과 침대 갈비뼈 고정용 고무 틀을 이용했다. 그야말로 별걸 다 주워쓰는 세기말적 미친 작업이었다. 나원참. 아무튼 간신히 수선을 마치고도 밑창 재접착을 거치며 신게 된 이 신발 역시 전투용으로 맹활약중이다. 검은색이라 자전거 기름때가 묻어도 티가 나지 않고 앞뒤 가드가 튼튼해서 구겨지지 않으며 겉이 가죽, 속이 고어텍스라 비에도 젖지 않고 바람에도 시리지 않다. 심지어 기대하지 않았던 접지력도 훌륭하다. 프로월드컵 브랜드를 대단치 않은 브랜드라 생각하고 기능성 신발은 밑창에 이름이 붙은 유명 브랜드만 고집해왔는데 샌들 밑창이 이렇게 신뢰할 만할줄 몰랐다.


그나저나 막 신을 수 있는 신발을 마련한 것은 좋은데, 밑창이 특이하게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서 내가 손본 티까지 감추지 못한 탓에 보는 사람마다 무슨 신발이 그러냐고 묻는다는 게 문제다. 남들이 보기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별 재주가 없는 모양이다.



4. 와이어 신발끈 혹은 다이얼 신발끈

지금은 처분한 경찰 기동화(이런 게 왜 있나)로 와이어 신발끈을 체험하고 그 편리함에 상당히 감탄했다. 이후로 다른 신발도 이 끈을 쓸 수 없을까 고민하며 방랑하다 최근에 신발에 직접 장착하는 키트를 구입했다. 보아핏 시스템으로 처음 등장한 이 기술은 특허가 만료되었다고 하니 심리적인 부담도 없었다.


아무튼 시험삼아 복원한 프로월드컵 워킹화에 장착했다. 설명서가 너무 작고 내용이 자세하지 않아 시행착오를 겪긴 했으나, 장착해서 써보니 여간 편하지 않다. 모든 신발의 끈을 교체하고 싶을 지경이다. 산속에서 고장나면 매우 위험한 지경이 되니 등산화는 반드시 끈을 써야 한다는데, 유사시에 여분의 등산화 끈으로 발을 동여맬 준비를 하고 다닌다면 등산화에도 와이어 방식의 이점이 크지 않나 싶다. 필요할 때마다 신발끈을 고쳐 묶는다는 건 너무나도 번거로운 일이니, 발등부터 발목까지 딱 맞게 감싸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안정감을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얻는 게 좋지 않겠는가.


다만 신발에 달려서 나오지 않은 제품을 직접 장착하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오늘도 아버지가 산 또다른 키트를 장착하느라 진땀을 뺐다. 제품마다 편차가 큰 모양이다. 게다가 일반 끈을 끼우게 되어 있는 구멍을 몇 번이나 통과한 와이어는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아서, 다이얼을 아무리 돌려도 아래쪽은 조여지지 않는다. 이 부분은 손가락으로 당겨줘야 한다. 하기야 다이얼의 위치와 끈 길이, 마찰력과 각도까지 모두 적절하게 조절된 완제품과 같을 턱이 있나……. 그래도 나는 계속 교체를 진행할 작정이다. 신발을 신고 명탐정 코난처럼 다이얼을 돌릴 때마다 느끼는 효능감을 포기할 수 없다. 일상속에서 이렇게 작은 기쁨을 누리게 하는 소품들은 많을 수록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고도 하고.



5. 코오롱 트라이포드 미드

등산화 방랑에 대해 몇 편이나 글을 썼는데, 그 이후로도 이어진 방랑에서 내가 가장 좋다고 느낀 것은 코오롱의 트라이포드였다. 디자인으로는 최고라고 불리는 호카(구 호카 오네오네)의 등산화와 비슷하면서도 내구성은 훨씬 낫고, 밑창도 견고하며 접지력이 사계절 모두 준수한 비브람 메가그립이다. 일상화로 신어도 패셔너블한 부츠로 보일 법하면서 튼튼하고 미끄럽지 않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나는 오랜 족저근막염에 이어 무릎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한 이후로 쿠션 좋은 등산화를 찾다 찾다 이 녀석을 중고로 구매했는데, 신어보니 명성만큼 충격을 잘 흡수하는지 별로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신던 등산화를 신고 트래킹을 가보니 트라이포드의 충격 흡수가 뛰어났다는 것을 당장 체감하게 되었다. 등산 장비도 이렇게 좋을 때는 좋은 줄 모르다가 좋지 않은 것을 겪어보고 나서야 그게 진짜 좋았다는 것을 체감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좋다고 정평이 난 물건을 쓰게 되어 깨달은 것은, 역시 뭐든 이것저것 사보느라 돈과 시간을 버리지 말고 가급적 좋은 물건을 사는 게 이득이라는 점이다. 등산인들이 근교의 산에 가면서도 수십만 원짜리 장비를 사용하는 건 돈자랑이 좋아서가 아니라, 비싸도 검증된 물건을 사는 게 이익이고 금전적으로도 성능적으로도 안전하기 때문이다(고급 장비 보유와 자랑에 대한 욕구 혹은 열등감 회피도 물론 이유가 된다). 그리고 수치로 정리된 스펙을 찾기 좋은 전자기기와 달리 등산용품은 평이 대개 주관적이고, 심지어 그런 평조차 정리된 곳이 없으니 괜찮은 가성비 제품따위 찾을 길이 없을 수밖에. 그렇다고 일단 싸고 괜찮아보이는 걸 샀다가 산속에서 ‘어이쿠, 비가 샐 줄이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써놓고도 요즘 나는 싸고 좋은 바람막이를 찾는다고 시간을 길게 죽이는 중이다. 사도 후회하지 않을 물건을 찾아놓긴 했지만 비싸서 사지 못하고 있다. 좋은 물건이 왜 좋은지 절실히 느꼈으면서도 이렇게 임시방편으로만 살아가는 건 역시 좀 어리석은 일인 것 같아서 냅다 새 바람막이를 사려하긴 했으나…… 그 와중에 스마트폰이 고장나고 말았다. 충전만 느려진 줄 알았더니 메인보드가 고장나서 언제든 복구 불능이 될 수 있단다. 헤어질 때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아니 그냥저냥 쓰던 스마트폰이 참 좋고 예뻐 보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좋은 케이스를 쓸 것을.


지금 이 시점의 좋은 게 좋다는 걸을 인식하고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 언제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후회가 덜할까? 2023년도 사실 참 좋은 해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후회를 잊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내년이 되어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모양이다. 올해는 그저 중고 등산화를 신고 중고 등산복을 입고 혼자 산에 있는 게 여행처럼 즐거운 순간의 연속임을 깨달았다는 것을 가장 큰 수확으로 여겨야 할 모양이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이전 글을 유튜브와 팟빵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건해의 취미 수필 - YouTube

이건해의 취미 수필 - 팟빵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https://millie.page.link/pEXWM

이전 09화 자전거는 내가 고칠 수 없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