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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10. 2024

도둑놈의 심보로 바람막이 싸게 구하기



바람막이를 반드시 필요한 생필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패션의 철학에 따라 바람막이 따위는 절대 입지 않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옷차림에는 바람막이가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이고, 어울린다 하더라도 스포츠 감독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 그런 사람들은 필시 바람이 불어 약간 쌀쌀할 때는 카디건을 애용하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산에 간다면 겨울이든 여름이든 바람막이를 목숨처럼 갖고 다니지 않을 수가 없다. 바람을 막아줄 구조물이 사라지는 능선이나 정상에 올라서면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대서 정신을 쏙 빼놓는 것은 물론이고 체온까지 탈탈 털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카디건 따위로 버티다간 저체온증에 빠지기 십상이다. 등산 따위 하지 않으니 나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은 날씨가 너무나 심하게 변화하는 만큼 여름이나 가을에도 바람막이 하나쯤 갖고 다니는 편이 건강에 이롭다. 바람막이가 없다면 할인 기간에 하나쯤 구비하길 권하고 싶다.


나는 원래부터 가볍게 걸치고 다니며 체온을 보존할 수 있는 바람막이를 좋아한 편이고, 가족 중에서 세 명이 사이즈를 공유한 터라 바람막이가 여섯 벌이나 있었다. 덕분에 등산을 시작하면서도 걸칠 옷에 부족함을 느끼진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용하게 써먹기 좋던 유니클로의 바람막이가 노후되어 방수 코팅이 여기저기 바스라진 이후로 새 바람막이를 찾기 시작했다. 나머지 다섯 벌 중에서 세 벌은 너무 얇았고 한 벌은 후드가 없었으며, 나머지 한 벌은 무거웠기 때문이다. 가죽 코트 수준이 아닌 다음에야 무거워서 입기 힘든 옷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이 바람막이는 무게를 재보니 540g으로 바람막이보다는 가벼운 점퍼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일상용으로 쓴다면야 아무 문제도 없지만, 중력을 거스르고 산 위로 올라가는 과격한 운동에 이렇게 묵직한 옷을 입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산에 올라갈 때는 눈썹도 떼어놓고 가는 법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결국 이상적인 바람막이를 찾아나서는 나의 우당탕탕 대소동이 시작되고 말았는데…… 이게 그냥 좋은 것 찾아서 사는 쇼핑에서 끝나지 않고 고난이 되고 만 것은, 사실 좋은 바람막이가 세상에 드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5만 원 이상은 쓰지 않기로 작정한 탓이라 할 수 있었다. 5만 원에 가볍고 예쁘고 방수 투습 잘 되는 기능성 바람막이를 구하려 하다니, 뭐 이런 도둑놈의 심보가 다 있나.


아무튼 잡다한 고민을 하며 시간을 마구잡이로 내다 버리고 하이에나처럼 중고 장터를 서성이던 내가 처음으로 구입한 등산용 바람막이는 바로 K2의 전문가용 고어텍스 프로쉘 제품이었다. 고어텍스 프로쉘! 물은 막고 수증기는 통과시켜 항상 쾌적함을 유지해주는 마법의 원단! 그중에서도 고급 제품이라는 프로쉘! 물론 서울 근교의 산이나 대여섯 시간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고어텍스 제품 자체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싸고 좋은 물건이 눈에 띄었으니 안 살 수도 없었다. 더구나 흔히 ‘벤틸’, ‘겨벤틸’이라고 줄여 말하는 겨드랑이 밑 통풍 지퍼도 달려 있어서 더울 때 옷을 벗지 않고 몸을 식힐 수도 있었으니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이 물건, 받아서 잘 살펴보니 일단 제품 설명과 다르게 후드가 원래 없는 게 아니라 분실된 상태였다. 게다가 벤틸은 지퍼가 빡빡했고, 원단이 상당히 뻣뻣해서 몹시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음질 자리를 밀봉하는 테이프인 심실링이 많이 떨어져서 멋으로 입기도 기능성으로 입기도 불가능할 판이었다. 나는 그래도 일단 좋은 제품이긴 하니 K2에 물어 수선 가능 여부를 물었는데, 후드는 따로 만들 수 없다기에 고민할 것 없이 환불하고 말았다.


(좋은 바람막이는 건강과 안전을 지켜준다. 덤으로 체면도.)


이 시점에서 나는 일단 고어텍스 같은 투습 원단 바람막이가 정말 필요한 것인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의문을 갖게 되었다. ‘고어텍스 무용론’이라는 이 주제는 등산 커뮤니티에선 아주 해묵은 문제로, 등산에 빠져들어 장비를 마련하는 사람 상당수가 고민하고 답을 찾아보게 된다. 성능을 체감한 적도 없는 기능성 의류에 비싼 값을 지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등산복은 다른 패션 의류처럼 비싼 값에 맞게 보기에 좋아서 어딜 입고 가도 보는 사람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옷이라고 감탄하는것도 아니고, 그냥 편하게 입고 다니는 한국 중년 패션이 될 공산이 크니 당연한 일이다. 어느 누가 의미 없는 일에 기꺼이 돈을 쓰고 싶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대단히 무거워서 그 어떤 활동을 한대도 별로 손이 가지 않는 아버지의 고어텍스 재킷을 빌려입고 자전거를 타보았다. 자전거로 땀나게 달리는 행위는 오르막길을 오르며 바람을 맞는것과 비슷하니 그리 나쁘지 않은 필드테스트가 될 법도 했다. 실제로 자전거 의류와 등산 의류를 교차해서 쓰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아무튼 테스트 결과, 나는 습기가 잘 빠진다는 기능성 의류에 의미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다른 바람막이를 입었을 때와 달리 재킷 안이 후텁지근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한 비교를 하려면 좌반신 우반신을 나눠서 옷을 두 벌 걸쳐입고 다녔어야 했을 테고, 다양한 온도 조건에서 반복해서 실험할 필요도 있었겠지만,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인기 없는 등산용 바람막이를 싸게 구할 정도는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다음으로 구한 것은 쿠팡에서 할인가에 파는 방수 재킷이었다. 처음에는 보자마자 그냥 이름 없는 중저가 브랜드 제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찾아보니 이 브랜드는 제법 품질이 괜찮은 제품을 만드는 듯했다. 게다가 이번에 찾은 방수 재킷은 디자인도 캐주얼해서 등산복으로 보이지 않는 데다가, 충실하게도 벤틸까지 딸려 있었다. 어지간한 아웃도어 브랜드는 벤틸을 중급 이상의 상위 옵션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서 적당한 값에 벤틸까지 있는 제품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므로 이건 속는 셈치고 사볼만 했다.


로켓배송으로 빠르게 도착한 방수재킷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디자인도 준수해서 일상적으로 입고 다니기에도 부족하지 않았고 지퍼도 매끄러웠으며 몸에도 잘 맞았다. 입고 뜀뛰기를 해서 간이 테스트를 해봤을 때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 싶었다(다만 이 테스트는 뭘 입고 해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620g으로 상당히 묵직했던 데다, 원단이 퍽 두툼해서 움직임이 은근히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약간 과장하자면 방수포를 두른 기분이었다. 자주 입고 벗어야 하는 옷이 뻣뻣하고 무거우면 불편감 때문에 입고 벗기를 덜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손이 자주 가지 않게 된다. 나는 이 옷도 반품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지난한 잠복의 시간이 이어졌다. 틈틈이 장터를 뒤적이다 괜찮아보이는 물건이 발견되면 사진을 확대해서 벤틸이 있는지관찰하고 몇 그램인지 알아내려고 제품의 공식 정보를 검색했다. 이 작업에는 난점이 정말 많았다. 일단 바람막이의 겨드랑이를 잘 보이게 찍는 사람이라는 게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분, 이 제품은 벤틸도 있고 좋습니다, 하고 자랑하면 좋으련만.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제품을 잘 써먹은 사람은 팔 이유가 별로 없을 테고, 잘 써먹지 못한 사람은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모를 테니 중고 매물에서 정확한 설명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수십 수백 벌이나 되는 물건을 파는 업자들도 그렇게까지 사진을 세심하게 찍을 여유는 없는 듯, 이들이 파는 바람막이 중에서 따로 정보를 찾아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설명이 잘 된 매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공식 정보를 찾는 것도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운 좋게 태그의 일련번호를 보고 검색해도 어지간히 유명한 요즘 모델이 아니면 아무 정보도 없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스니커즈는 모델명으로 정보 찾기가 용이한데 의복은 그렇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의복의 종류가 더 압도적으로 많고 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팬들이 적기 때문일까? 아무튼 화면을 캡쳐해서 사진 검색으로 비슷비슷한 바람막이들 사이에서 정확한 판매처를 찾아내도 궁금증이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백화점의 지점에서 올린 제품은 무게나 재질을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조차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었고, 공식 쇼핑몰까지 들어가도 제품의 무게는 명시되지 않았다. 최고의 전문가를 위한 아웃도어 제품이라고 홍보를 하면서도 무게 하나 쓰지 않다니, 전문가는 무게를 따지지 않는단 말인가……. 심지어 제품 문의로 무게를 물어봐도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다. 믿고 들어가서 무게를 알아볼 수 있는 쇼핑몰이라곤 ‘오케이몰’ 정도였다. 물론 거기엔 싼 물건이 없어서 나와 연이 없었지만…….


이쯤되면 나도 지칠 수밖에 없는 터라 에라 모르겠다 헐값에 나온 중고 제품을 냅다 사버렸다. 밀레의 고어텍스 XCR제품으로 고어텍스 제품군에선 구형 상위 모델인데, 어깨의 미끄럼 방지 우레탄 코팅이 벗겨지고 있다는 이유로 배송비를 합쳐 만 원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받고 보니 코팅 가루가 도무지 깨끗이 떨어지지 않아 입을 때마다 주변이 엉망이 될 것 같았고, 게다가 700그램을 넘겨 내가 추구한 경량화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입기야 하겠지만 이만한 짐을 걸치고 산에 오르고 싶진 않다. 무릎도 계속 삐걱이고 있단 말이다.


다음으로 또 냅다 사버린 것은 마운틴 하드웨어의 제품이었는데, 이 역시 받아보자마자 망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묵직했다. 심지어 지퍼 방향이 반대였다. 지퍼 헤드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선 특별한 용도가 아니면 보기 힘든 구조라 검색해보니, 미국 제품 중에 이런 게 종종 있어서 직구하고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혹시 남녀 단추 방향의 영향을 받은 걸까? 이것도 검색해보니, 지퍼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YKK에서도 정설을 알진 못하고 몇가지 설만 제시했다. 그중 가장 유력해 보이는 것은 지퍼의 특허를 회피하느라 좌우가 다른 지퍼도 만들어졌다는 얘기였는데, 어쨌든간에 국제표준이고 뭐고 무시하고 사는 미국놈들이 저지를 법한 일이다 싶다.


마운틴 하드웨어의 바람막이는 600그램대로 내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무겁긴 했으나 700그램대를 입어본 뒤라 그런지 이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진홍색과 보라색의 중간이라 도저히 일상적으로는 못 입을 것 같긴 했지만, 너무 지쳐서 다른 물건을 더 찾을 자신도 없었다. 예전에 ‘완전히 등산객 패션’이라는 평을 몇 번 듣고 충격을 받은 터라 가급적 일상복에 가까운 옷만 입고 싶은 마음이긴 하나, 겉보기 정도는 타협해야지 어쩌겠는가. 중고로 물건을 구한다는 건 결국 모험과 타협의 연속임을 나는 오래도록 경험해왔다.


그리하여 이 녀석을 입고 아름다운 불암산에 다녀왔다. 아주 편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으니 합격점인 것 같긴 하다. 좀 입다 보면 정이 들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옆주머니가 정확히 배낭의 벨트에 가려지는 위치라 제법 아쉽다. 평소에도 주머니에 뭘 많이 넣어 다니는 터라 이 부분을 봉인하고 다니기가 편치 않다.


결과적으로 대충 아무거나 걸치고 다녀도 상관없는 산들만 다니면서도 굳이 기능성 바람막이를 고집하고, 그러면서 편리한 녀석을 심지어 싸게 사겠다는 도둑놈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종종 장터를 뒤적이면서 가볍고 벤틸이 있고 가슴에도 주머니가 있으며 옆 주머니도 높은 곳에 있거나 지퍼가 길게 트인 바람막이를 찾고 있다. 아마 20만 원쯤 들이면 간단히 새 옷을 사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평생 이렇게 내가 들이는 시간은 고려하지 않고 중고를 싸게 사면 좋다고만 생각하며 어리석게 살아온 것을. 그리고 한 달에 24시간도 안 되는 등산 시간 동안 재킷 입고 벗기 귀찮다는 이유로 더 좋은 재킷을 사려하는 어리석음에 비하면 이쪽이 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어리석음 아닐까?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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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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