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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17. 2024

에어포스1과 평범성의 번뇌


나이키 에어포스1을 아시는지? 이름까지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 몰라도, 신발 모양을 보면 길거리에서 자주 보는 그 신발이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의 신발을 유심히 관찰하면 한 칸에 한 명 이상은 반드시 이 신발을 신고 있다. 20대 친구들로 보이는 여행객 여성 세 명이 모두 디자인만 다른 에어포스1을 신은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그만큼 10대에서 40대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신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50대는 왜 안 좋아하냐고? 이건 내 추측이지만, 50대부터는 슬슬 발과 무릎에 편한 신발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에어포스1도 에어쿠션이 들어간 만큼 평범한 스니커즈에 비하면 그럭저럭 걷기 좋은 신발이지만, 그 값이면 더 편하기로 정평이 난 신발을 고르고도 남는다. 말하자면 건강한 다리의 특권이랄까.


유지 관리의 편이성 때문에 나는 오래도록 어두운 신발만 고집하고 살았는데, 작년초부터 새하얀 에어포스1을 신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정확히는 새하얀 색이었다가 약간 바래서 미색이 된 에어포스1을 신고 싶어졌다. 그때쯤 흰색 바탕에 남색과 적색으로 꾸며진 에어 맥스 90을 주워다 고친 터라 스니커즈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족저근막염 때문에 중고 신발을 한참 뒤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남이 낡은 에어포스1을 신고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도 보기 좋게 느껴졌다. 새것보다는 낡은 게 더 멋졌다. 나는 스타워즈에서 새하얀 첨단 우주선 따위를 만든 다음에 일부러 닳아빠진 모습으로 꾸며 허구적인 소품 느낌을 지우고 ‘실제로 오래 쓰여진 병기’처럼 만들어낸 기법을 참 좋아하는데, 약간 낡은 흰 가죽 신발에도 그런 멋이 있다. 빈티지의 멋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실전용’임을 주장하는 듯한 생동감 있는 멋이다.


그런 이유로 작년 초에는 하얀 스니커즈를 중고로 이것저것 사서 신어봤다. 아디다스 스니커즈도 두 켤레나 신어보고 골든 구스도 복원해서 신어봤으며, 에어포스1의 다른 버전인 에이콘도 신어봤다. 심지어 에어포스1의 모조품이라고 해도 좋을 물건도 새걸 주문해서 신어봤다. 하지만 아무래도 에어포스1의 말끔하면서도 전투적인 맛은 나지 않았다. 특히 에이콘은 에어포스1에 가깝지만 밝은 갈색인데다 온통 가죽이라 무겁고 내 발에도 맞지 않았고, 모조품은 모양이 비슷했으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고 깨끗해서 장난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대부분을 다시 처분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애초에 에어포스1을 샀으면 될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에어포스1은 중고로도 별로 싸지 않다. 워낙 사랑받는 모델이라 매물이야 자주 나오긴 하지만 발가락이 넓은데다 통증에 시달리는 내 발에 맞으면서 감당할 정도로만 손상된 물건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하여간 중고 탐색자란 사냥꾼이나 낚시꾼처럼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하는 법이다. 돌아설 때는 대충 아무거나 잡아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러다 여름에 딱 적당한 매물이 포착되었다. 슈프림 컬래버 제품인데다 외관은 크게 이상이 없는데 가격은 만 원. 뒤축과 뒷굽이 닳긴 했지만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다 싶어 당장 약속을 잡고 30분 가량 자전거로 달려갔다. 판매자는 일하는 중이라 짬을 내겠다고 하고 나왔다. 매물을 봐도 말투를 봐도 30대 남성이 오래 신은 신발을 버리기 아까워 회사 근처에서 대충 처분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도, 판매자는 60대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말투로 사람을 구별하려는 생각은 그만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쇼핑백에 넣어온 신발을 보여주며 판매자는 안이 좀 닳긴 했지만 아주 튼튼하고 작업용으로 딱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긴 했으나, 뒤축 안, 갑보가 닳은 정도는 사진보다 심각했다. 솔직히 보기 좋게 고칠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근심스럽게 신발을 살펴보고 있자니 판매자가 “빨리 일하러 가봐야 하는데…….” 하고 재촉하는 게 아닌가. 나는 신발을 다시 쇼핑백에 넣으며 닳긴 좀 닳았네요, 하고 슬쩍 불평했다. 그러자 이 분, “좀 신다가 나중에 또 당근으로 팔면 되지~.”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 원 참. 거래를 여러 번 해봤지만 이만큼 능청스럽고 능숙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웃으면서 만 원을 건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만하면 다른 문제가 발견되어도 괜찮은 거래였다.


이렇게 입수한 나이키 에어포스1의 문제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안이 더러웠다는 것. 깔창을 빼보니 기본 깔창 위에 기능성 깔창 한 장을 더 깐 상태였는데, 거의 모든 부분에 짧게 잘린 머리칼이 붙거나 박혀 있었다. 깔창을 사서 새로 끼울 정도였으니 일상 생활 속에서 이 신발을 신고 활동하는 시간이 길었다는 뜻이고, 머리칼이 많이 들어가 있었으니 주인이 미용사일 거라고 추측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용사의 신발에 머리칼이 이렇게 많이 들어갈 거라곤 상상한 적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미용사는 손만 바쁠 것 같은데 실제론 끊임없이 쏟아지는 머리칼이 발등과 신발 사이로 박히는 것을 참고 있는 모양이다. 그간 미용사가 괜한 질문을 많이 한다고 피곤해했는데, 그 정도는 참고 감사히 여길 일이다.


첫 번째 문제는 세척으로 쉽게 해결했지만 두 번째 문제인 갑보 손상은 상당히 넘기 힘든 난관이었다. 스펀지가 닳아서 없어진 건 쉽게 채울 수 있어도 그 위를 덮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전문가들은 매쉬 원단을 바깥 테두리에 박은 다음 뒤집어서 신발 안에 밀어넣는 방식으로 수선한 티가 나지 않게 만들지만, 나는 그런 재주도 도구도 없으니, 이번에도 수선재를 접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갑보가 가죽인 골든 구스와 달리 에어포스1은 밖으로 드러난 부분까지 매쉬 원단으로 되어 있어 경계에 맞춰 말끔히 만든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곡면이 대단히 복잡한 모양이라 본을 뜨고 그대로 붙일 길이 보이질 않았다. 소재 역시 문제였다. 인조 가죽이나 튼튼한 천을 쓰면 오래지 않아서 곡면이 들뜰 게 뻔했다.


(신을 열심히 신었다는 증거)


그리하여 며칠을 고심하며 잠을 설치던 나는…… 결국 다이소에서 파는 리폼용 패브릭과 따로 구해둔 강력 양면테이프, 그리고 실리콘 접착제, 아크릴물감으로 수선에 성공했다. 수선한 티를 감출 자신이 없던 터라 애초에 대놓고 잘보이는 검은색 바탕에 꽃무늬 천을 택했는데, 보기에 아주 이상하진 않게 되었다. 세 번째 문제인 뒤축 마모는 실리콘 뚜껑을 잘라 붙여서 해결했다. 젖은 바닥에선 미끄럽겠지만 보강한 면적이 좁으니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평범한 욕망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이상할 정도로 염원하던 신발을 몇 달 만에 손에 넣었다. 나는 좋은 물건을 제값에 사서 쓰는 것보다 망가진 물건을 헐값에 사서 고치고 애정하길 더 즐기는 요상한 취미의 소유자니까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바라던 바를 이룬 셈이다. 결과물도 마음에 들었다. 에어포스1은 스트릿 패션의 전천후 아이템이라 불리는 신발답게 어디에든 잘 맞았고, 심지어 깔창을 신경 써서 깔고 나니 기대보다 편했다. 덕분에 오만가지 중고 신발을 뒤적이며 소유욕을 불사르는 바보짓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등산화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찾긴 했지만, 적어도 보기 좋고 발도 편한 일상화를 찾겠다는 열망을 잠재우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다. 그간 이 신발 저 신발에 이끌려 사지 않아도 되었을 물건을 사거나 살까말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이래저래 아쉽다. 처음부터 영혼의 갈망에 귀기울이고 돈을 더 들여서라도 그것을 충족시켜줬다면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리되었을 게 아닌가. 마치 진정한 사랑을 잊느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 이게 아님을 깨닫는 것과 비슷한 꼴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신발은 선택받지 못했다고 상처를 입지 않으니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정 바라는 게 있으면 곧바로 그걸 살 것’이라는 교훈만 얻고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간사하게도 심경의 변화가 생기고 말았다. 돌아다니면서 에어포스1을 워낙 자주 보다 보니 과연 그 욕망이 합당한 것이었나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게나 중고장터를 뒤적이고 자전거를 타고 가서 거래하고 잡다한 재주를 동원하여 수선한 결과물이 서울 지하철 2호선에서 몇 초에 한 번 볼 수 있을 정도로 이상적인 평범함의 영역에 속해 있다니, 이건 남들 다 갖고 논다는 이유로 다마고치를 갖고 싶어한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그동안 나는 부족함이나 제약은 있을지언정 나의 주관과 취향을 따라서 선택한 물건으로 다소나마 미적 감각을 드러내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후배 한 명이 신발을 보면 성격도 알 수 있다고 했을 때(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대사였다), 나는 ‘이만하면 썩 나쁘지 않은 성격이 아닌가’하며 제멋대로 흡족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때는 통가죽 신발밖에 신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소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 늦은 때에 스니커즈라는 영역을 알게 되고 이 신발 저 신발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좋다고 붙잡은 것이 가장 대중적인 모범답안이었다니, ‘튜닝의 끝은 순정’도 아니고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한편으로 등산화도 이것저것 유명한 건 다 신어봐야 소재로도 쓰고 아는체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과도하게 많은 것들을 구해서 신어보고 메모를 남기고 처분했는데, 근래에는 등산화계의 에어포스1이라 불리는 캠프라인의 등산화도 신어보게 되었다. 사실상 한국 등산용품의 기본 장비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니 이걸 신어보지 않고는 다른 등산화를 논하기도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신발의 기능성과 무관하게 이 녀석도 산에서 질릴 정도로 자주 보다 보니 아무래도 정이 덜 가게 되었다. 거참, 남들을 따르고 싶어하면서도 따르게 된 뒤에는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지는 이 심리란 무엇일까. 무리에 속하려는 사회적 욕구와 남보다 돋보여서 선택받고자 하는 번식 욕구의 충돌일까? 나로서는 답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남들만큼은 가지려는 욕망이 사라지거나 남들이 가진 것을 나까지 갖지 않아도 나는 나대로 적당히 즐겁고 신난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애써 가진 ‘기본템’들 앞에서 바라게 된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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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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