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Jan 24. 2024

싸구려 커피와 도파민 찾기



하루에 커피를 두 잔 정도 마신다. 세 잔을 마셔야 하는 게 아닐가 싶을 만큼 몽롱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여기서 카페인 섭취량을 늘렸다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게 아닐까 싶어 멈춰서 있는 것이다. 이런 나도 커피를 마시지도 않을 뿐더러 커피를 마신다고 잡다한 물건을 열심히 챙기거나 약속에 늦는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며 커피따위 사라지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한 시절이 있었으니…… 그 시절을 생각하면 입맛의 변화와 노화의 슬픔은 무섭구나 싶다. 이제 커피 없이는 정상적으로 살 수가 없다. 커피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침에 식사 대용으로 마시는 커피는 유행이 지나간 방탄 커피로, mct오일과 버터를 넣는 게 기본 레시피다. 공복 상태를 유지해서 쓸모없는 자기 살을 소비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당장 쓸 에너지만 공급한다는 개념이 바로 이 레시피의 효과인데, 내가 오랜 음용으로 득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침 식사를 쉽게 저렴히 대체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은 매력적이라 애용하고 있다. 근래에는 커피를 내린 다음 버터 잘라 넣기도 귀찮고 설거지도 심히 까다로워 단백질 보충제를 대신 넣고 있으나, 커피를 마시고 나면 가루가 대부분 바닥에 남는 걸 보니 이것도 다 헛짓 같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밥을 먹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냐면 그건 전혀 상상도 못하겠지만.


저녁에 마시는 커피는 순수히 각성용이다. 언제부터인가 몸에 피가 도는 게 아니라 피로가 도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변화해버려서 각성제를 음용하지 않으면 초저녁부터 늘어지는 터라 선택사항이 아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300밀리리터 이상의 커피를 마셔야 그나마 사람다운 기분으로 뭐든 할 수 있다. 다만 이때는 아침과 달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니……’라는 생각에 초조해진 터라 아침처럼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릴 여유 따위 존재하지 않으므로 따서 마시기만 하면 되는 기성품 커피를 사다 마시고 있다. 커피값에 대한 고민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오로지 뇌를 속여서 피로 감지를 무뎌지게 할 용도로 커피를 마신다면 굳이 비싸고 훌륭한 커피를 사다 마실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싶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단 커피가 대체 얼마인가 계산해보았다. 내가 마시는 한 잔을 300밀리리터 가량으로 생각했을 때, 1킬로그램에 1만 원 가량인 원두 커피는 내 방법 대로라면 50잔이 나오니 대략 한 잔에 200원 정도다. 이만하면 대단히 준수하지만, 추출이 번거롭고 차게 먹으려면 시간을 들인 추가 공정이 요구된다는 게 문제다.


한편 쉽게 사서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콘트라베이스는 900밀리를 마트에서 2000원에 샀다고 쳐도 666원. 오, 이런 악마의 가격이 있나. 계산해보지 말 걸 그랬다. 할인한다고 생각 없이 사다 꿀꺽꿀꺽 마실 일이 아니었다. 한 달 마시면 20000원에 달한다.


그렇다면 예전에 두 번쯤 사서 마셔본 콜드브루는 어떤가 싶었다. 진한 원액을 사다 희석해서 마시는 것이니 좀 싸지 않을까, 그리고 자꾸 커피를 사다 나르는 수고도 훨씬 줄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계산해보니 의외로 양이 적었다. 1리터를 9200원에 사서 4배의 물을 타서 희석하면 5리터가 되는데, 이 말은 300밀리 한 잔에 약 575원이란 소리였다. 다른 레시피에 활용하면 또 모를까, 나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실 작정이라면 계량컵이나 저울까지 동원해가며 제조하는 보람이 없는 가격이다. 대충 만들었다가 맛이 좋지 않아 실망한 적도 많기에 더욱 마실 생각이 달아났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콜드브루를 직접 제조할 생각을 해봤다. 콜드브루라면 보통 커피를 담아놓고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아주 천천히 우려내는 점적식만 알고 있었는데, 그보다 단순하게 커피 가루를 물에 담가서 12시간쯤 우리는 침출식도 널리 추천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덕이다. 어려울 것도 없는 터라 바로 시도해 봤다. 그 결과 썩 나쁘지 않은 커피를 얻을 수 있긴 했는데…… 가격을 따져보기 이전에 과정이 의외로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다시백에 커피를 갈아서 넣다가 흘리는 가루를 청소하는 것도 일이었고, 커피를 우리기 위한 병과 우려내어 완성된 원액용 병을 따로 마련하는 것도 일이었다. 게다가 커피 한 잔 내리기도 정신이 없는 아침에 콜드브루를 따로 미리 준비하고 있자면 손끝으로 시간이 줄줄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어 편치도 않았다. 심지어 그렇게 다시백으로 우려낸 원액은 별로 진하지 않아서 노력하고 기다린 것에 비해 완성품의 양이 적었다. 더 연구하면 좋은 결과물이 얻어질 것도 같으나, 그런 위험부담을 떠안기가 두렵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가루형 커피를 마시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회사 다닐 때 탕비실에서 꺼내 마신 카누가 괜찮았던 탓이다. 카누의 가격은 1.6g 60봉에 16000원 가량. 한 봉지로 한 잔을 마신다고 매우 넉넉히 잡았을 때 266원이다. 이 정도라면 무난한 값이지만, 카누의 공식 레시피는 200밀리니까 실질적으로 한 잔에 400원에 달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카누가 가루 커피치곤 맛있다지만  한 잔에 400원이나 쓰고 싶진 않다.


귀찮은 것도 싫으면서 편안하게 마시는 커피에 400원도 쓰기 싫다니 이 무슨 도둑놈의 심보인가…… 생각하면서도 대체재를 찾아봤다. 인터내셔널 로스트 호주 전통 커피, 쟈뎅 콜롬비아 수프리노 아메리카노, 투썸 에이리스트 스틱 커피, 루카스 나인 시그니처 아메리카노, 곰곰 아메리카노 등등이 그럭저럭 괜찮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사실 무조건 이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렴한 커피는 없었다. 하기야 발포주처럼 세금을 피하는 인조 커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물건을 비슷한 방식으로 가공해서 팔 테니 압도적인 차이가 생기진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중에서 저렴하면서도 평이 썩 나쁘지 않은 제품을 하나 골라 한 상자를 주문했다. 그로써 커피와 지갑의 비참한 전쟁은 막을 내리고 나의 피곤한 우주에는 카페인의 균형이 찾아올 줄 알았다. 정말 그러길 바랐는데…… 도착한 커피를 찬물에 타서 마셔보니 이만저만 맹탕이 아니었다. 예상과 달리 세 봉을 타야 그나마 커피 비슷한 맛이 나는데, 그것도 도저히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따뜻한 물에 마시면 비교적 더 나아지긴 했지만 이 역시 다시 찾고 싶은 맛은 아닌지라 결국 카누 미니를 반쯤 섞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맛의 한계점을 맞추었다. 나는 자신이 커피를 아주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맛도 잘 구별하지 못해서 애호가라는 주장을 했다간 진짜 커피 애호가들에게 돌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에게도 정말 맛이 없는 커피와 맛이 있는 커피를 구별하는 수준의 미각은 존재했던 것이다.


(미디어는 커피를 늘 감성으로 포장하지만 대체로 커피는 여유의 정반대 위치에 있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예민한 감각과 날카로운 취향으로 자신이 애정하는 분야에서도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별하는 능력은 그 능력의 소유자를 과연 행복하게 해주는가? 내가 커피의 맛과 향이 나고 카페인이 들어있는 음료라면 뭐든 맛있다고 마실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떠들기 망측한 곤란과 계산을 겪지 않고 싼 값에 피로를 망각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 발상을 더 확장해보면 뭐든 대충 좋아한다고 장기적으로 무조건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으리라는 추측에 이르게 된다. 게임이라면 아무 게임이나 다 재미있게 하는 사람, 노래라면 아무 노래나 다 좋아서 듣는 사람, 빵이라면 붕어빵이든 슈톨렌이든 다 맛있게 먹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편하기는 할지언정 즐거움의 한도는 정해져있을 것 같다. 더 나쁜 것을 찾을 수 없다면 더 좋은 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극이 늘 비슷하면 도파민이 나오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서 봐도 아무거나 대충 좋아하는 취향은 딱히 신이 날 일이 없는 취향인 셈이다. 그리고 개인적 경험에 따르자면, 아무데나 가자거나 아무거나 먹자는 사람과 동행하면 편하긴 해도 재미는 없다(만약 데이트라면 죽도록 불편하다). 무엇을 깊이 좋아하면 까다롭게 좋아하게 되는 법이라는데, 나는 무엇을 깊이 좋아하는 사람을 매력적이라 느끼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아무 사람이나 좋아하진 않는 셈이라 다행이다.


다시 커피로 얘기를 되돌리자. 지난 연말에는 공모전에 낼 원고를 쓰느라 고역이었는데, 그 와중에 맛없는 커피를 마실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무슨 포인트나 쿠폰이 생길 때마다 커피를 사다 마셨다. 대체로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행사 중인 커피를 애용했다. 화가 날 정도로 맛없는 커피를 마시다 보니 그런 기성품 커피도 여간 맛있지 않았다. 그러다 근래에는 쿠폰으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사다 마실 일이 생겼다. 나는 원래 스타벅스 커피를 별로 맛이 없다고 생각하던 터라 쿠폰이 생기면 다른 음료로 바꿔 마시곤 했으나, 이번에는 카페인을 확보해둬야 해서 별수 없이 아메리카노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마셔보니 이게 웬걸, 편의점에서 사다 마시는 것보다 훨씬 고소하고 맛있는 게 아닌가. 저렴한 커피의 폭격에 시달리느라 비참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던 미뢰 하나하나가 반기는 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무슨 참여 이벤트 따위에서 여차하면 스타벅스 쿠폰을 주는 행태를 아니꼽게 보던 나도 이제 스타벅스 커피라면 단비를 기다리던 농부처럼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반기게 되었다.


커피 맛의 품질에 대한 기준뿐만 아니라 취향도 좀 바뀌었다. 예전까지는 커피에서 꽃향기나 과일향이 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고소한 커피맛만 고집했는데, 얼마전에 편의점에서 예가체프 커피를 할인하기에 사다 먹어보니 이것도 여간 색다르고 맛있지 않았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외국 음식이 뜻밖에 입에 잘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피로와 노화를 가져오긴 하지만 이렇게 경험을 수용하는 자세나 취향의 변화도 함께 가져온다고 생각하면 다소 즐거워지는 구석도 있다. 변화를 가져온 게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탕약처럼 억지로 먹어야 하는 가루 커피라고 생각하면 미각적 고통에 대한 보상이 되는 셈이고.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더럽게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있다. 오늘은 카누를 섞지 않았더니 견디기 힘들 지경이라 커피 사탕을 입에 물어 맛을 속이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이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무엇이든 맛날 거라는 생각을 하니 나아지는 구석이 있다. 흔히 하는 옛말에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는데, 고생이 끝나면 그 결과로 낙이 오는 게 아닌 것 같다. 고생이 정말 끝나면 그 뒤에 오는 것은 과학적으로 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아마 그런 굴곡의 이치에 있으리라. 하지만 이 커피의 형상을 한 고생만은 다시 사지 않으리라고, 다시 한번 커피를 마시며 다짐한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이전 글을 유튜브와 팟빵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건해의 취미 수필 - YouTube

이건해의 취미 수필 - 팟빵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https://millie.page.link/pEXWM

이전 13화 에어포스1과 평범성의 번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